소설리스트

53화. (53/137)

53화.

가준은 헛웃음을 터트릴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까지 눈앞에서 몇 번이나 죽은 녀석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 했단 점에 제 눈치를 보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은 백선우가 계속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백선우는 그러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리고 사실, 이제 가준은 그의 착한 성정을 억지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 방향 외의 다른 방향은 없대?”

“응. 아무래도 내 진 이능이 그쪽과 관련 있으니까…….”

진(眞) 이능, 능력의 근간이자 외국에서는 Lethal power라고 칭하는 힘. 마나의 순도가 높은, 즉 등급이 높은 이능력자는 저마다 강력한 비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필살기, 궁극기와 같은 힘으로,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백선우도 잠재력이 S급인 만큼 그런 능력이 있는데, 그 힘 자체가 타인의 죽음에 무감해야 하는 종류인 듯했다.

즉 그의 능력의 근간부터가 누군가의 목숨을 이용하는 힘이란 뜻이다.

잠시 가준이 말없이 백선우를 바라보았다. 참 백선우와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란 감상이 들었다. 어째서 그가 애들에게 능력을 선보일 때마다 눈치를 보는지도 알게 해주었다. 가준은 그의 진 이능이 궁금했고, 캐묻는다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림자에 가려진 백선우의 얼굴을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스스로가 그런 능력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인데, 억지로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침묵이 묘하게 무거웠다.

그즈음 툭-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벽에서 마나 아티팩트를 떼어내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당장 가준이 옆으로 다가가자 백선우가 설명했다.

“원래 이틀을 숨길 마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미 하루를 썼고 또 분리하면서 효능이 떨어져서 이제 10시간 정도만 사용 가능할 것 같아.”

“그것도 엄청난데? 혹시 옷에도 사용 가능해? 아니면 들고 다니면서 쓴다거나.”

“둘 다 가능한데, 들고 다니면서 쓰면 마나 손실이 높아서 기존에 소모되는 양의 몇 배가 사용될 거야.”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이었지만 가준은 고개만 끄덕였다. 몬스터에게 숨을 때도 요긴하게 사용될 테고, 또 어쩌면 지하 수색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야 하고, 크게 행동해선 안 된다고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도움이 될 장치였다.

이 아티팩트 하나로 무척 든든해졌다.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백선우에게 잘했다고 말하려다, 마침 재킷 주머니에 넣어놓은 것을 떠올렸다.

“고생했으니까 이거 먹어.”

그건 바로 요구르트였다. 한두 시간 전, 잠깐 안영아와 함께 소강당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김주완에게서 받았다. 반장인 그가 같은 반인 둘에게만 ‘딱 2개 남았으니까 너희 먹어.’ 하고 몰래 건네준 것이다.

그리고 가준은 당연히 그것을 백선우에게 주려고 챙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구르트에 ‘뼈 튼튼 칼슘 요구르트!’라고 쓰여 있으니, 이 음식의 주인은 백선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머니에 넣었다가 깜빡해서 지금까지 들어 있었다.

갑작스레 내밀어진 음식에 백선우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는 놀란 듯 한참 동안 가준의 손만 내려다보다, 가까스로 질문했다.

“……내가 꺼림칙하지 않아?”

“음? 갑자기 뭔 소리지?”

“조금 전에 내가 어떻게 능력을 썼는지, 또 진 이능에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말했잖아.”

“……그런데?”

“…….”

“……뭐, 왜? 어쩌라고……?”

가준이 당황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끝나지 않았나? 갑자기 왜 그걸 다시 이야기하지? 빠르게 당시 상황을 되짚다가, 백선우가 그것을 말한 시점부터 조용해졌단 걸 깨달았다. 마침 그땐 가준도 생각에 잠겼던 터라 그대로 대화가 뚝 끊겼었다.

어쩐지, 아티팩트의 사용 방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낮은 것 같더니. 이제야 진실을 깨달은 해가준이 황당하단 눈으로 백선우를 보았다.

왜 그렇게 눈치를 보냐고, 나는 차라리 네가 남을 망설임 없이 죽이고 살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준은 한 단계 필터링을 거치기로 했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순두부인 듯하니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신경 안 써. 네가 사람을 죽이든 말든, 진 이능이 누군가의 목숨을 이용하든 말든 아무런 생각도 안 드니까….”

“왜?”

“왜긴 왜야, 그렇다 해서 네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

“아무튼 이거나 먹어. 너 약하니까 뼈 튼튼해져야 해.”

백선우가 약간, 아니, 많이 혼란한 눈으로 해가준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준은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고, 백선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조금 이따가 먹을게.”

제 손에 올라온 요구르트를 말아 쥐는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더없이 귀한 물건을 아끼는 사람처럼 소중히 주머니에 넣기에, 가준이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요구르트를 좋아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안영아를 설득해서 하나 더 받아낼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다. 걘 받자마자 먹었지만…….

아무튼 벌써 이곳에서 시간을 꽤 썼다. 가준은 손바닥 크기만 한 아티팩트를 재킷 안에 챙기며, 새삼 백선우 덕에 좋은 수확을 얻었단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또 동시에 의아해졌다.

분명히 아티팩트를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을 텐데 백선우가 해냈다. H.N에서도 우수 학생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원래도 백선우는 각성하기 전부터 신해고 전교 1등이었다.

“넌 대체 왜 계속 신해고에 있지?”

16살에 이뤄지는 SPI 검사에서 S급이 나오면 아예 학교를 가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곧바로 길드로 스카우트되어 훈련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이문 사태에 나서는 것이 효율적이며 명예롭다 보았다.

간혹 기초 교육 과정까진 끝내고 싶다고 학교를 다니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보통 SPI가 높은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로 갔다. 실제로 백선우가 각성한 후 온갖 상위 클래스 고등학교에서 그에게 연락했고, 또 H.N은 학교를 그만두고 단체에서 본격적으로 훈련받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백선우는 그 모든 제안을 거절하여 현재 H.N의 예비 소속 상태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이름이 오르기야 하겠지만…….

신해고 측에서 백선우를 붙잡으려고 온갖 혜택을 내어준 것은 알고 있다. 학교에서 뛰어난 이능력자가 나왔다는 건 분명한 성과니까. 삼촌 집에 얹혀살던 백선우가 독립하여 살게 된 배경에도 신해고의 지원이 있었다. 학교 인근의 가장 좋은 오피스텔을 구해주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혜택이 쏟아졌다.

그렇다 한들 백선우는 다른 고등학교로 가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아니면 아예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였고. 둘 중 무엇이든 신해고를 떠나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이런 수학여행에 올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려고 했어.”

“뭐? 그런데 대체 왜 안 했는데?”

잔잔하게 나온 백선우의 답변에 당장 가준이 되물었다. 그러나 다급한 가준의 기분과 달리 백선우는 오래 침묵했고, 정적이 길어질수록 가준은 약간 힘이 빠졌다. 이제 와선 의미 없는 질문이다 싶었다.

게다가 어쩌면 백선우도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도 수련원을 벗어나고 싶을 텐데. 이곳을 진작 나갔더라면 학생회에게서 제물이 되란 개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 가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그냥 말하지 않아도-.”

“예전에, 네가 급식에서 나온 요구르트를 나한테 준 적이 있었잖아.”

“……?”

당연하게도 가준은 기억나지 않았다가, 백선우의 차분한 얼굴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그때를 떠올렸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도서관 자습실에서 백선우와 마주치고, 그가 한 끼도 못 먹은 것 같기에 급식에서 챙긴 요구르트를 그에게 주었다.

아마도 그날이, 백선우가 각성한 다음 날이었던가?

“그걸 받고서, 신해고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게 정말 맛있고…….”

제 손에 쥔 요구르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던 백선우가, 곧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해가준과 눈을 맞췄다. 옅은 갈색 눈동자에 어리는 감정은 잔잔한 듯했으나 순식간에 가득 차올라서.

“좋아서.”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준은 멍하니 들었다.

요구르트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그는 약간, 아니, 꽤 많이 혼란해졌다. 요구르트가 맛있어서 신해고에 남았다고? 혹시 제가 줬던 요구르트의 라벨이 떨어져 있어서 어느 브랜드의 제품인지 몰랐나? 하지만 그날 급식 메뉴였으니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데?

……혹시 요구르트에 정신을 흐리는 성분이 들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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