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37)

52화.

일단 가준은 백선우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됐어. 그냥 화장실 다녀오려는 거니까.”

“어, 어어…… 뭐, 그래…….”

이동훈이 얼떨떨하게 답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화장실은 1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그곳을 같이 간다는 게 의아하지만…… 대충 해가준의 과보호가 다시금 심하게 발동했다고 여기기로 했다.

곧 회의실을 나서 관리실로 향했다.

5분쯤 걸어서 도착한 장소였고, 다행히 복도에서 몬스터와 맞닥뜨리는 일은 없었다. 어제 다녀간 장소기에 숨겨진 문도 금방 찾았다.

본관 관리실 내부는 창문이 없어서 어두웠다. 가준은 앞이 잘 보이지만 손전등을 켜서 선반에 올려두었고, 백선우가 고맙다며 작게 웃는 모습까지 본 후에야 질문했다.

“이곳에서 뭘 하려고?”

“아, 그게…….”

조심히 백선우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조금 전, 김시형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낸 물건은 반구형 덮개처럼 보였다. 둥근 쪽이 살짝 일그러진 모양새긴 하나 아래는 확실하게 밀폐될 수 있도록 꼼꼼하게 다듬어졌다. 아마 백선우가 몇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한 부분이 저것일 듯했다.

모양만으론 어디에 쓰려는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가준의 의아한 시선에 백선우가 차분히 설명했다.

“이 벽에 붙은 아티팩트를 뜯어낼 거야.”

“뭐? 그게 가능해?”

“H.N에서 교육받았긴 한데…… 될 거라고 확신은 못 하겠어. 그래도 시도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서.”

한 번 사용한, 특히나 어떤 공간에 붙은 아티팩트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세간에 알려진 지식이다. 하지만 H.N에선 비상시를 위해 임의로 아티팩트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위험을 제거하는 목적과 또 고립되었을 때 주위의 아티팩트를 활용하란 목적에 따른 훈련이었다.

무엇이든 가준은 새삼 H.N의 교육이 고마워졌다. 책임감을 얼마나 강조했으면 그렇게 백선우가 위험 속으로 뛰어드나 싶어 원망했었던 곳인데.

“순도 높은 마나는 다른 마나를 밀어낼 수 있어서, 이걸로 아티팩트를 덮고 내 마나를 쏟아 볼 거야. 이론상으론 아티팩트의 마나가 내 마나와 충돌하면서 벽에서 떨어질 텐데…….”

조금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이어진 설명이었다. 덮개로 밀폐해 두어야 떨어지는 과정에서 아티팩트 안의 마나가 상대적으로 덜 새고, 또한 투명한 덮개여야 마나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지켜볼 수 있다 했다.

물론 이게 가능하려면 아티팩트에 담긴 마나보다 시전자의 마나 순도가 더 높아야 하는데, 백선우는 잠재력 S급의 마나이니 문제없었다. 다만 그는 이론적으로 설명만 들었을 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일단 한번 해 볼게.”

백선우가 분리 작업을 시작했다. 긴장한 얼굴이지만 마나를 쏟아내는 일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투명한 붉은빛 마나가 유리 아래로 쏟아졌다.

“오…….”

해가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새삼 백선우가 대견해 보였다. 아티팩트를 억지로 떼어내면 기존 효율의 절반밖에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아티팩트는 사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했다. 상대의 인식을 저해하여 존재감을 흐리게 하는, 즉 은신 아티팩트.

가준은 노력하는 백선우의 뒤통수가 참 예뻐 보인다는, 다소 이상한 감상을 가지며 칭찬했다.

“일부러 이곳에 와서 알려주려고 한 거야?”

“응. 네가 기가 선생님 경계하라고 했잖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네가 한 말이니까. 그리고 나한테만 해줬으니, 너랑 나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조금 어색하게 백선우가 중얼거렸다. 그때 가준이 보였던 신뢰에 부응하고픈 기운이 묻어남과 동시에 둘만이 나눈 비밀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느낌마저 있었다. 그 비밀이 상대를 의심하란 주의이긴 하지만…….

가준이 놀란 눈으로 백선우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연미정을 향한 의심을 줄이고 다른 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백선우가 계속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물건을 숨긴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테다.

침묵에 민망한 듯 백선우가 덧붙였다.

“내가 너무 유난이었지……?”

“아니, 아냐. 잘했어.”

해가준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갑작스레 들어찬 기분이 이상하여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

백선우가 말을 잘 듣는 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원래도 순한 녀석이란 걸 알았지만 이번 회차에 와서는 더더욱 자신의 말을 잘 따라줬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 이상의 만족감을 주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백선우가 보이는 무조건적인 신뢰가 마치 복종의 형태 같다고, 정상적인 것 같진 않다 여겼으면서 그게 흡족했다.

몇 번이고 제 손을 벗어나 죽은 녀석이라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완전히 자신만을 따르는 행동에 안심하는 건가. 하지만 단순한 안도감이라곤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누군가를 이렇게 통제하는 걸 좋아하면 안 될 텐데. 스스로가 조금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한 만족감을 떨쳐낼 겸 가준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선생님한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음, 정확하겐 모르겠는데…….”

고민하던 백선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확신하지는 못하겠다는 듯 긴가민가한 어조로 이어지는 말이었다.

“몇 시간 전에 복도에서 몬스터랑 마주쳤을 때, 분명 거리가 꽤 있는데 어떻게 쫓아왔는가 싶었어. 우리를 본 것도 아니고, 갈림길도 많았는데 몬스터의 그림자가 곧바로 영아를 붙잡았으니까.”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라도 보통 그 정도 거리가 있으면 인식하지 못해?”

“응. 게다가 소리도 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석판의 마나에 반응했나 싶기도 해. 선생님이 그것에 담긴 원념이 강렬하다고 했으니까…….”

가준이 의심했던 부분과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콕 집어서 말할 만한 부분이 없는지 백선우가 ‘음, 음…….’ 소리만 반복했다. 질문에 유의미한 답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초조한 기색이었다.

결국 가준이 실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착한 녀석이 아직 연미정을 경계하고 있단 것만으로도 놀랍고 대견했다. 연미정의 호의와 친절에 이미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있으니까.

“됐어. 더 말 안 해도 되니까. 그리고 그 일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냐? 조용히 있을-.”

“아니, 괜찮아, 정말로.”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쏟아진 말에 가준이 눈을 깜빡였다. 꼭 계속 대화하고 싶다고 붙잡는 느낌이라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무래도 방해될 것 같은데…….

“긴장되니까 계속 대화하는 게 나아.”

“……긴장되면 조용히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

“으음, 몇 분 내내 조용히 집중해야 할 정도로 까다로운 일은 아닌데.”

과하다 싶은 부정에 약간 어색한 기운이 담겼다.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놓치기 싫은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가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결국 성향 차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지금 고생하는 건 백선우니까, 그가 대화를 필요로 한다면 맞춰주는 게 낫겠단 판단이 섰다.

잠깐 고민한 후 가준이 말했다.

“H.N에선 어떤 것들 배우는데? 아니지, 이건 이번 새벽에 말했던가.”

“……응?”

“아냐, 잠깐 헷갈려서. 그러면 마나 형상화도 혹시 H.N에서 배웠어?”

가준은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백선우를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그에게 온갖 질문을 했었다. 꽤 당황스러울 법한 질문들도 많았는데 백선우는 언제나 기꺼이 답해줬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았고, 뒤죽박죽 기억이 섞였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질문한 가준을 흘끔, 의아히 바라본 백선우가 답했다.

“응. 마나 형상화는 H.N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내용이거든.”

“처음부터 그 어려운 걸 가르친다고?”

“H.N에선 많이 해내는 일이니까……. 아무래도 단체를 상징하는 능력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마나 형상화를 해내는 이능력자의 80% 이상이 H.N 소속이다. 정예 중의 정예만 모인 이능력자 단체. 그곳이 마나 형상화를 첫 번째 교육으로 내세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했다.

“마나 형상화의 이론은 뭔데?”

“마나의 흐름을 의식하여 내 뜻대로 제어하고, 그것에 의지를 실어 무기로 만들어 내는 것.”

정의를 외웠는지 곧바로 문장이 쏟아졌다. 가준은 잠시 스스로의 발언이 H.N의 교수 같았는지 고민했다. 신입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자네, 이것의 정의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일이 분명 있었을 것 같아서 떨떠름해지기까지 했다.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가준이 솔직한 감상을 뱉었다.

“이론이 굉장히 추상적이지 않나…….”

“그렇지? 나도 처음엔,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H.N에선 감을 잡을 때까지 훈련시켜. 명상도 하고, 시뮬레이션도 돌리고.”

줄줄 이어지는 훈련의 경험담에 가준이 잠깐 질린 눈을 했다. 그 H.N도 마나 형상화는 정석적으로 접근하는 것 외의 다른 방향은 없는 건가.

“그것 외의 별다른 지도 방향은 없어? 그냥 무작정 부딪혀서 감 잡는 것밖에 없나?”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세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도 해. 능력이 기초하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방향을 잡아주는데…….”

“너도 방향 잡아줬어?”

“으응. 내 힘은 타인을 복종시키는 힘이니까…….”

뜻밖에 백선우가 머뭇머뭇 말꼬리를 흐렸다. 호기심이 생긴 가준이 ‘그래서?’ 하고 캐묻자 그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가까스로 답했다.

“나를 위해,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쓰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아, 상대가 죽어도 개의치 않겠단 마음가짐인가.”

“……맞아.”

곧바로 가준이 알아채자 백선우가 어색하게 답했다. 작아진 목소리가 그의 위축된 기분을 드러내는 듯해서 가준이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대체 왜 저렇게 눈치를 보지?

곰곰이 고민한 후에야 가준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오늘 아침, 백선우는 링크를 대상으로 마나 형상화를 해냈다. 즉 그 순간 백선우는 링크 일당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 된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살의. 일순간의 분노를 훨씬 넘어선 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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