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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137)

36화.

잠시 기억을 되짚는 사이 이동훈과 안영아의 시선도 허공을 향했다. 새까만 마기 속에서도 붉은 마나는 선명히 보여, 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때마침 공간에 자리한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구슬이 담은 마기는 한정되어서 오래 공간을 장악하지 못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공간 속에서 링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발악했다. 어떻게든 자신들을 묶고 있는 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치다가, 기어이 사내 한 명이 마나 총을 사용했다. 사슬 사이로 가까스로 손을 움직인 것이다.

-촤르르륵! 마구잡이로 난사한 총탄 중 하나가 가준을 향했다. 하지만 팔이 묶여 조준이 엉망이었고, 스파크만 아슬하게 옷자락을 스쳤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백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쾅, 쾅, 쾅!

살벌한 굉음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백선우의 붉은 사슬이 상대를 결박하고, 사정없이 바닥과 벽으로 내려치면서 연구실이 박살 났다. 갈퀴로 공간을 마구 긁어내린 듯했다.

이동훈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겨우 해가준의 옷자락만 건드린 상황에 저 정도로 분노한 것도 당황스럽긴 하지만, 백선우가 저렇게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놀라웠다. 착하게만 보이던 인상이 이제는 한없이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표정하게 상대를 사슬로 묶고, 발버둥 치는 그들을 조롱하듯 이곳저곳 던졌다. 덩치 큰 사내가 이능력을 사용하려는지 손에 마나를 모았으나, 붉은 사슬이 곧바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공간을 멍멍하게 울렸다.

백선우의 반응은 단순히 친구가 위험할 뻔했다는 분노를 넘어선 듯했다. 기이한 강박에 휩싸인 사람처럼 상대를 떨어뜨리고, 제거하려 들었다.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가 서늘했다.

슬슬 이동훈은 소름이 돋았다. 잔인한 광경에 거리감마저 들 즈음.

“그만해, 백선우.”

해가준이 다가서서 백선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주위로 일렁이는 붉은 마나가 살벌해 접근하는 것조차 위험해 보였으나, 해가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가준의 손이 닿자마자 백선우가 반사적으로 기운을 갈무리했다. 짧은 탄식과 함께 서서히 얼굴에 표정이 깃들었다.

이동훈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역시 해가준이 보기에도 백선우의 행동이 도를 넘어 보여 제지하는…….

“너 코피 나. 그만해야 해.”

하지만 가준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백선우의 상태만 확인하고 있었다. 이동훈은 매우, 심히 혼란해졌다.

한쪽에서 이곳을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가준은 휴지로 백선우의 코피를 닦았다. 백선우가 당황하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했지만 가준의 손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짧게 씁, 숨을 들이켜며 똑바로 눈을 마주치자 금방 그가 얌전해졌다.

백선우는 능력을 과하게 쓰면 코피를 흘리거나 두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늘 그런 고통을 숨기고 멀쩡한 척했다. 가준도 처음엔 그의 후유증을 몰랐지만 이제는 너무나 잘 알았다.

이건 왜 이렇게 착해빠져 가지고. 가준은 울컥 화가 치솟았으나, 그럼에도 백선우의 코피를 닦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고개를 뒤로 젖히지 말라고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때, 백선우의 사슬에서 풀려난 링크 중 한 명이 실눈을 떴다. 콧노래를 불렀던 사내였다. 백선우의 공격은 해가준을 때리려 했던 덩치 큰 사내에게 집중되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그는 멀쩡했다. 물론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상황을 괜찮다 할 수는 없겠지만…….

사내가 슬금슬금 옆으로 기어갔다. 조금 전 있었던 난투에서 빠졌던 아이들, 그들이 바로 이 무리의 약점이라 판단했다. 안영아와 심도경 중, 사내는 거리가 가까운 안영아를 노리기로 했다. 앉아 있으니 붙잡기도 쉬울 테고 또한 가장 키가 작으니 인질로 삼기 적절했다.

기어이 확! 사내가 안영아의 팔을 낚아챘다.

“모두 가만히 있어! 그러지 않으면-!”

“으악, 까악, 아아악! 살려주세요!”

안영아가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새된 비명에 서 있던 세 명의 시선이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이 무리의 약점이 맞는 듯했다. 사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한편으론 당황했다. 붙잡힌 학생의 저항이 너무나 거세어 자꾸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얌, 얌전히 있어!”

“아아아악! 얌전히 있으면 죽잖아요!”

“협조하면 살려줄 테니 가만히…!”

“살려주긴 뭘 살려줘. 애들 협박하다가 다 쓰면 죽이겠지, 까아악!”

괴성을 지르며 안영아가 뒤로 기어갔다. 제 목숨을 잡아 봤자 협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인질을 잘못 골랐다며 허어엉 서러워하는 말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도망가려는 안영아와 붙잡으려는 사내의 대치가 이어지려는 때, 안영아가 진열장에 쿵 부딪쳤다. 등에 느껴진 통증보다도 퇴로가 막혔단 점에 절망하는 순간.

-쾅!

진열장에서 상자가 떨어지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석판이 사내의 머리를 내려쳐 버렸다. 사내는 단말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그대로 푹, 엎어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안영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흡사 ‘인생은… 셀프 구원!’이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일련의 소란을 경계하며 지켜본 이동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 놀라긴 했지만, 안영아가 발버둥 치며 틈이 생긴 순간 해가준과 시선을 나눴었다. 해가준이 총으로 협박하는 척할 테니, 대치가 일어나면 이동훈이 몰래 사내에게 접근해 기습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기껏 벽면으로 빨리 달려오기까지 했는데, 안영아의 운이 발휘되어 문제가 해결됐다. 심지어 매우 황당하게 처리돼서 헛웃음이 나오다 못해 긴장까지 풀렸다.

“안영아 까마귀인 줄…….”

“뭐래. 아, 그새 목쉬었어.”

안영아가 목을 감싼 채로 큼큼 헛기침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불안한 듯, 발로 툭툭 사내를 쳐보았다. 사내는 완전히 기절하여 미동조차 없었다.

링크 네 명을 모두 쓰러뜨렸다.

이건 모두 해가준과 백선우 덕분이었다. 해가준이 빈틈을 노렸고, 백선우가 마나 형상화로 적을 처리했다. 안영아의 운도 발휘되어 한 명을 처리했다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내가 제대로 힘쓰지 못할 만큼 부상을 입힌 건 백선우였다.

만약 저 둘이 캐비닛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안영아와 이동훈이 내심 안도하는 사이 심도경이 우물쭈물 사과했다.

“도,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얘들아…….”

이미 한바탕 울음을 터트렸던 그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심약한 그는 링크에게 들킨 순간부터 두려움에 질렸고, 안영아가 그를 달래어 중간엔 겨우 괜찮아졌지만 새까만 마기가 퍼지는 순간부터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해가준이 안영아에게 그를 진정시키라고 외쳤던 이유엔 분명 그의 이능력을 사용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 그것을 알기에 차마 먼저 심도경에게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흘끔흘끔 눈치만 볼 즈음, 가준이 말했다.

“다음엔 정신 제대로 붙잡아, 심도경.”

“으, 으응! 내가 다음엔 꼭 도움 되도록……!”

“꼭 도움이 되라는 소리가 아니야. 본인의 목숨은 부지할 정도로 정신을 붙잡고 있으란 소리지. 이번엔 안영아가 널 도와줄 수 있었다지만 다음에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 그때도 정신 못 차리면 너 죽어.”

담담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엔 질책의 기운이 없었다. 그저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주듯 더없이 차분했고, 그래서 더욱 무게감 있게 다가갔다.

“도움이 되면 좋기야 한데, 사실 나는 그것보다 피해가 안 되는 게 중요하거든. 네가 죽으면 다른 애들 사기가 떨어져.”

“……응.”

“두려워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해결 안 될 것 같은 상황이 닥쳐도 뭐라도 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떨다가 개죽음당하는 것보다 낫겠지.”

해가준의 말이 담는 내용은 다소 차갑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심도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스한 위로나 응원보다도 오히려 냉정하게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이내 심도경이 허리까지 푹 숙여 사과했다.

“……피해 끼쳐서 미안해.”

“내가 언제 피해 끼쳤다고 했냐. 안 죽었잖아.”

“으응……?”

순간 어리둥절하게 고개 드는 심도경을, 오히려 가준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앞서 말했는데 왜 사과하느냔 황당함이 담긴 시선이었다. 결국 가준이 짧게 한숨을 터트리며, 심도경의 어깨에 쌓인 먼지를 툭 털어줬다.

“살아. 살기만 하면 돼.”

그래야 백선우가 죄책감을 덜 느끼고, 위험한 상황에 고집을 덜 부릴 테니까.

가준은 백선우가 친구들의 죽음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타격을 입는지 보아 왔다.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준은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던 터라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학생들의 죽음에 무감했던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보면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준은 그런 충격으로부터 거리를 뒀으나, 백선우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해가준의 말은, 다른 셋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함께 다니면서 원하는 것이 오직 생존이라니. 한없이 냉정한 줄만 알았던 해가준의 다른 면모를 보는 듯했다. 원래 차가워 보이던 사람이 건넨 따뜻한 말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온다고, 저마다 감동하며 깊은 유대감까지 느꼈다.

한쪽에서 무럭무럭 오해가 쌓이거나 말거나, 가준은 쓰러진 링크 일당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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