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37)

27화.

“……별로. 너 먼저 자.”

“나도 별로 안 피곤해. 오늘 가장 고생한 건 넌데…….”

백선우의 말대로 오늘 해가준은 몬스터를 약 세 번이나 상대했다. 강당에서 한 번, 본관의 복도에서 두 번. 하지만 가준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 해서 잠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도면 보는 거야?”

곧 백선우가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행동에 은은한 비누 향이 훅 다가왔다. 방금 막 세수를 하고 왔는지 앞머리 끝에서 물이 뚝, 떨어졌다. 잠시 가준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에 백선우가 잠시 숨을 참았다. 안경을 벗은 가준과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한 적이 없어 긴장할 즈음.

“감기 걸리면 안 돼.”

돌연 가준이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직접 머리칼을 털어주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상황에 백선우는 당황해서 그 손을 막지도 못했다.

겨우 머리칼 끝이 조금 젖었을 뿐인데, 가준은 꼭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을 닦아내는 것처럼 수건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손길은 조심스러워 백선우는 더더욱 혼란해졌다. 순두부를 건드리는 것 같은 손길이다.

“내, 내가 할게.”

결국 백선우가 수건을 덥석, 붙잡으며 행동을 막았다. 그 과정에서 찰나 가준의 손가락과 얽히자 더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 가준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끝까지 물기를 제대로 털어내는 게 맞는지 확인하는 시선이기도 했다.

감시 아래 완전히 물기를 닦아낸 백선우는 한결 뽀송해졌다. 가준이 흡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백선우가 민망하단 듯 말했다.

“너는 엄청…… 걱정이 많은 것 같아.”

굉장히 과보호한다는 것을 우회한 표현이었다.

사실 백선우가 아는 해가준의 이미지는, 아마 이동훈이 그에게 가지고 있는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는 가준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서 조금, 아니, 굉장히 많이 놀라웠다. 워낙 심각한 상황이고, 또 특수한 경우니 태도가 바뀔 수 있긴 하지만…….

“그러니까 애들도 모두 지키려는 거겠지? 몬스터가 나타날 위치도 예측하고, 공략할 방안도 알려주고.”

조금 전, 해가준은 건물 구도를 그리면서 미리 몬스터에 대한 정보도 일부 알렸다. 누나에게 들었다고 설명하며, 만약 내일 수색하는 길에 다른 학생들을 만나면 이 정보를 공유해줘도 된다고 했다.

백선우가 그 점을 짚으며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하자 가준이 실소했다.

“다 너 때문이잖아.”

한탄 같은 작은 읊조림이었다.

현재 시점에서 가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백선우뿐이다. 과거에는 본인이었다면 이제는 백선우에게로 초점이 옮겨갔다. 그리고 겨우 그 하나의 변화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준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몇 번의 회귀를 거치며 여러 지식을 얻었다 한들, 그것으로 모두를 구하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선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굳이 애들을 돕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분석하자면, 일단 ‘가림막’으로써의 의의였다. 인원이 줄어들수록 제가 수색하려는 움직임이 티가 날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학생들을 많이 살려서 링크 일당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그리고…….

“……나 때문이라고? 왜?”

“너 착하니까. 애들 위험한 꼴 보면 뛰어나갈까 봐.”

그래서 또 죽어 버릴까 봐.

가준은 뒷말을 자연스럽게 삼켰다. 소리를 입지도 않은 문장이 마음속에서 가장 무겁게 떨어지고, 크게 울리고, 넓게 퍼졌다. 그는 백선우를 빤히 바라보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바로 앞에서 죽는 모습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가끔씩, 백선우의 얼굴 위로 피범벅이 된 모습이 겹쳤다.

덥석, 백선우가 손을 붙잡아 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가준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제야 자신이 손을 떨고 있었단 걸 알아차렸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며 손을 거두려는 때, 백선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갑자기 뛰어나가는 일은 없어. 네가 옆에 있으라 했으니까 꼭 지킬 거고.”

“…….”

“그리고 나 생각만큼 착하지 않아, 가준아.”

“내 생각보다 더 착하던데.”

순간 욱해서 비꼬듯 답해 버렸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백선우를 보며 가준은 고민했다. 그냥 이 기세를 몰아서 제발 그만 착하게 행동하라고, 이기적으로 굴라고 다그쳐 볼까. 아니면 애원이라도 해 볼까.

그때, 백선우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속삭이듯 물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네가 나한테 해줬던 말, 기억나?”

“……도서관?”

“응. 1학년 때, 밤늦게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 했던 말.”

백선우의 말에 가준의 눈동자가 느리게 양옆으로 왕복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꽤 중요한 대화였던 것 같은데…….

서서히 아쉬움으로 물드는 백선우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초조해지기까지 해서, 가준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다 마침내 탄사를 터트렸다.

“아! 나 도서관에서 잤던 때!”

저도 모르게 안도해서 소리가 높아졌다. 가준이 당황하며 흘끔 애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다들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는지 반응 하나 없었다.

1학년 때, 늦은 밤, 도서관. 세 가지 단서로 가까스로 그때를 떠올렸다. 가준은 예전부터 도서관을 자주 갔는데, 그곳이 조용해서 잠자기 편했기 때문이다. 담당 선생님은 외출이 잦은 편이라 더더욱 휴식에 간섭이 없었다.

그러다가 밤 9시쯤까지 자고 일어난 적이 있는데, 그때 백선우를 만났었다. 당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가준은 대충 떠오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억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백선우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그때, 내가 친구 대신 책 정리해주다가 늦었는데…….”

“뭐? 그냥 일 떠넘기고 튄 거 아니야, 그 새끼? 그게 친구냐?”

“그때도 딱 이렇게 말했는데, 정말 기억하는구나.”

얼떨결에 정답을 맞힌 가준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 척, 그때의 분노가 여전한 척 표정 관리를 했다.

백선우가 눈매를 가늘게 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자신이 해준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는데, 다시금 무슨 말을 했을지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팽팽 굴렸다.

1학년 1학기 시절의 백선우는 전교생이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잘생기고 착한 친구. 그리고 한편으론 그를 만만히 여겨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괜한 시기심도 있었을 테다.

그러니 아마…… 상황상 위로를 해줬으려나? 오래 기억에 남았다는 걸 보면, 좋은 응원이라도 건넸겠지?

“나한테 참 피곤하게 산다고 했잖아.”

“…….”

……해가준은 자신의 인성을 조금 돌아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그 상황에서 너무나도 자신이 할 법한 말이었다.

“그렇게 다 들어주면 지치지도 않냐면서.”

“내가, 잠에서 갓 깨면, 좀, 예민해져서.”

단어의 조각조각 어색함이 묻었다. 해가준은 지난날의 제 발언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 내용 자체는 여전히 동감하나, 이 물렁한 순두부에게 너무 날것의 발언을 했다. 심지어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사실 그때 내가 도서관 부탁을 들어줬던 건, 집에 늦게 들어가고 싶어서였어.”

“그, 그래? 오지랖 제대로 부렸네. 그때 발언은 취소할….”

“아냐,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니야.”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백선우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나는 당시에 삼촌 집에 얹혀살았거든. 부모님이 어릴 적에 이문 사태로 돌아가시고, 친척들 집을 전전하면서 지내다 보니 눈치가 많이 보였어. 집에 들어가면 조용히 있어야만 하는 게 답답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백선우가 각성한 후에 따로 살게 됐다는 소식은 우연히 학교에서 접했지만, 이런 가정사는 전혀 몰랐다. 심지어 몇 번이나 회귀하면서도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가준은 순간 놀랄 뻔한 반응을 숨기고 최대한 차분히 경청했다.

그러한 가준의 태도에 백선우의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이렇게 반응하리란 걸 예상했다는 듯 한층 더 즐거움이 담겼다.

“그래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어. 사실 그때 친구 부탁을 받을 땐 몰랐는데, 네 말을 듣고서야 내가 그런 이유로 행동했단 걸 깨달았지. 그리고…….”

“…….”

“내가 피곤하고 지쳤단 것도.”

네 덕에 알게 됐다는 듯 백선우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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