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37)

25화.

사나운 비아냥거림에 남형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한 듯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주먹도 꽈악 말아 쥐어 주위의 애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남형욱의 이능력은 신체 강화로, 주먹을 강화한다면 단숨에 수박도 산산조각 낼 수 있다. 유지 시간은 짧아도 파괴력은 상당했다. 남형욱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한 부회장이 당황하며 나섰다.

“가, 가준아. 제물이라니. 우리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러면 순화해서, 너희 대신 희생해달라? 솔직하게 너희도 백선우가 또 각성할 가능성 없단 거 알 거잖아. 그런데 그 새끼들한테 가라는 소리는, 네가 가서 시간 좀 벌고 그사이에 우리는 도망칠 방법이나 알아보겠다… 이거 아닌가?”

“해가준. 말 너무 세게 하는 거 아니야?”

“세게 하는데, 그래서 뭐? 백선우한테 자진해서 뒤지러 가란 말은 부드럽고 착한 말인가? 내용만 따지면 너희가 훨씬 좆같은데?”

우르르 쏟아지는 말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다른 학생이 나섰지만 그의 화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준은 학생회의 이런 개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처음에는 상황이 심각하니까, 심적으로 몰리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또한 당시엔 백선우가 선두에 나서고 있었으니, 그의 능력을 직접 눈앞에서 보면 예언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씩 바뀌는 상황 속에서도 늘 학생회는, 특히 남형욱은 이런 식으로 굴었다. 이번 회차엔 백선우가 그들 앞에서 나선 적도 없고, 또 아직까지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가준이 별관 강당에서 첫 번째 사고를 예방했고, 불덩어리 몬스터를 쫓아내는 일도 도왔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들이 맞닥뜨린 진짜 위험은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반장에게 알려주었던 정보도 어느 정도 그들을 안전하게 했을 테고.

이렇게 기껏 평화로운 첫날을 만들었는데, 뭐? 가준에겐 눈이 돌아갈 소리였다.

자신을 비난하는 건 괜찮았다. 자신이 안전하려고 백선우를 독점한단 식으로 보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백선우를 죽으라고 사지로 내모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차라리 너희가, 아니, 남형욱 네가 각성한다는 가설이 그럴싸하지 않나? 신해고에서 백선우 다음으로 SPI 높은 사람이 너인데.”

“……야.”

“예언이 가리킨 인물이 SPI와 관계있다는 네 주장대로라면 2차 각성 확률이 0%인 백선우를 제외하면 너뿐이잖아. 애들을 지키기 위해 백선우한테 희생하라고 할 만큼 학생회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몹시 뛰어나 보이니까, 네가 그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신랄하게 이어지는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선 늘 조용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한 그 말의 기세는 사나울지언정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라서 더더욱.

“적당히 해라, 해가준.”

성큼, 남형욱이 다가왔다. 한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힌 남형욱의 동공은 위험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간신히 이성을 쥐고 있는 듯한 기세로 남형욱이 말했다.

“학교에선 가만히 있던 새끼가 왜 여기서 나대지? 너 이렇게 굴다 후회해.”

“무슨 후회?”

“학교로 돌아가면, 네 생활 괜찮을 것 같냐?”

“오, 살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학교 이야기.”

실소하며 고개를 까닥이는 가준의 행동에 기어이 남형욱이 손을 들었다. 어깨를 밀치려는 듯 내뻗어지는 손길이 사나웠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잘못될 수 있는-.”

“건드리지 마.”

그때, 지금껏 가만히 있던 백선우가 나섰다. 남형욱의 손목을 확 움켜쥐며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구긴 것도, 노려보는 눈빛도 아니었으나 그 고요함이 오히려 서늘하게 다가왔다. 온기 하나 없는 목소리.

이때까지 그를 희생시키자는 말에도 반응이 없더니, 해가준을 건드리려는 순간 눈빛이 확 달라졌다. 그저 눈을 마주했을 뿐이건만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마치 복종에라도 걸린 것처럼. 순간 남형욱이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그런 스스로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듯, 곧 확 팔을 틀었다. 백선우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속셈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힘을 주고 움직였는데도 전혀 그에게서 풀려날 수가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 이거 놔.”

“형욱아.”

“…….”

중간에 말을 더듬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으나, 백선우가 조용히 이름을 부른 순간엔 그대로 행동이 뚝 멎었다. 그저 담담한 부름일 뿐이건만 찰나 소름이 돋아 입조차 열지 못했다. 남형욱이 눈동자만 굴려 그를 보았다.

“내가, 규칙 지킬 수 있게 해줄래?”

H.N의 제1 규칙. 본 단체에 소속된 이능력자는 시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며, 사사로이 능력을 쓰지 않는다.

이능력자들 사이에서 H.N은 이상향과 같은 곳이기에 그곳의 첫 번째 규칙은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다. 하지만 지금, 남형욱은 그 규칙을 떠올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도 모르는 새 손이 덜덜덜 떨릴 즈음.

선생님이 다가왔다.

“얘, 얘들아. 왜 갑자기 서로 싸우고 그래.”

3반 담임이었다. 그는 박인후의 부상을 확인하다가 뒤늦게 이곳으로 왔는데, 험악한 분위기에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성정이 무른 편인 그는 쩔쩔매며 ‘이 상황에서 싸우면 안 되지….’ 하고 아이들을 달래려 했다.

백선우는 말없이 손을 놓았고, 남형욱도 조금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잠깐이지만 백선우의 앞에서 완전히 긴장해 버린 것이 자존심 상하는 듯 휙, 백선우를 보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가준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박인후도 절뚝대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 저 선생을 다치게 만들어 혹시나 학생들을 위험으로 이끌지 못하도록 했는데, 도와주지 말 걸 그랬단 후회가 들었다. 물론 개인적인 원한으로 불길을 그에게 분산시킨 것도 있지만…….

가준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후 백선우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가자, 백선우.”

그때까지도 가만히 남형욱을 바라보던 백선우가 곧바로 가준의 부름에 응했다. 말 잘 듣는 순진한 강아지 같아서 가준은 조금 더 화가 났다. 이런 애를 제물로 바치려 한다고?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가준은 그의 팔을 꽉 붙든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숙소, 304호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조금 전 해가준이 학생회와 크게 싸웠고, 또한 잠깐이나마 백선우가 화살받이 내지는 현 사태의 원인으로 몰릴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흘끔대며 둘을 바라보았다.

“와, 와아, 방 되게 넓다.”

“15명이 쓰는 방이니까……. 여자 방이랑 구조만 반대고 나머지는 똑같네.”

심도경과 안영아가 부자연스럽게 숙소에 대한 평을 내놓았다. 이동훈도 머쓱하게 문가를 서성이며 2반 남학생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냐 질문했고, 가준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안영아에게 확인하고 열어주라 말했다.

그런 건조한 태도는 아이들을 더 긴장시켰으나, 사실 가준은 이미 학생회와 싸운 일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 그것은 ‘싸웠다’고 표현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굉장한 헛소리를 지껄였고, 그것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았을 뿐이다.

그래서 가준은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304호, 원래 자신이 들어왔어야 했을 방만 신기하게 둘러보았다. 그러곤 혹시나 제 가방이 여기에 있지는 않을까 싶어 짐이 쌓인 곳을 뒤적거렸다. 버스에 덩그러니 남은 제 가방을 반장이나 다른 애가 가져다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준의 바람대로 금방 가방을 발견했다.

“하…….”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안에 든 것이라고 해 봤자 옷 두어 벌과 자잘한 물건들, 그리고 역시나 신호가 먹통인 핸드폰뿐이지만. 그래도 제 물건을 찾은 것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가준은 다른 가방까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행동에 시선이 자연스레 몰렸다.

“찾았다.”

가준은 짧게 탄식한 후 그것을 뒤에 있는 이동훈에게 휙, 던졌다.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일단 받아낸 그가 어리둥절하게 손에 쥐인 것을 확인했다.

“라이터……?”

“해가준 불량 학생이었어?”

“뭐래. 다른 가방에서 찾은 거야. 아무튼 손전등 쓰지 말고 그걸로 초 밝혀. 배터리 아껴야 하니까.”

장난스레 수상하단 시선을 던지는 안영아에게 가준이 싸늘하게 답했다. 관리실에서 양초를 챙겼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우연히 방에 들어갔을 때마다 누군가의 가방에선 최소 하나쯤 라이터가 나왔다. 그리고 가준은 기대하는 것이 더 있기에 마저 가방을 뒤졌다. 백선우도 불러서 협조시켰다.

“너도 가방 좀 뒤져 봐.”

“이래도 될까……?”

“괜찮아, 괜찮아.”

착해 빠진 백선우를 탈선시키는 연습이 필요했다. 머뭇거리는 백선우의 손을 덥석 붙잡아 당기자 그가 잠깐 놀라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함께 가방을 뒤졌다.

그렇게 그들이 찾아낸 것은…….

“와, 먹을 거다!”

“허…… 그러고 보니 오늘 계속 공복이었네.”

바로 간식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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