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86.Do or Die(4)
“지금 여기 싸우러 오신 겁니까?”
“······.”
정남룡 사장의 호통 소리에, 멱살잡이를 하던 최기민 회장과 김 부장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평소 온화하고 화 한번 낸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자 모두가 멘붕한 표정이었다.
‘후······.’
정남룡은 아까 전, 이준혁의 전화를 받고 통신 3사 회장들과 어떤 식으로 협상해야 될지 고민했다.
그래서, 마탑그룹의 회장인 유진광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이준혁의 최측근인 그에게 물어보면, 이준혁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
“유 회장님. 통신 3사 회장들이 저희 매직 통신망을 빌리기 위해 저에게 협상하러 온답니다.”
“뭐라고요?”
미소 띤 얼굴로 폭락 중인 SC텔레콤 호가창을 살펴보고 있던 유진광.
그는 조언을 구하러 온 정남룡 사장과 함께, 통신 3대장을 맞이할 대책회의를 했다.
“실장님은 뭐랍니까?”
유진광의 질문에 정남룡이 약간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 자루를 쥐여 줄 테니 저보고 알아서 하랍디다.”
“음······.”
정남룡의 대답에, 유진광은 깊게 고심하듯 침음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정 사장님은 어떤 선택을 하기로 결정하셨소?”
유진광은 일단 정남룡의 말을 들어보고 조언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일단 다른 알뜰 통신사들처럼, 대형 통신사에도 우리 망을 빌려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정남룡은 과거 3대 통신사들에게 많은 갑질과 횡포를 당했지만, 그건 개인적인 사정이었기 때문에, 사적인 일로 때문에 대의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가장 많이 쓰는 통신 3사를, 그것도 망 대여에서 제외시켜 버리면, 많은 국민들이 불편해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마탑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 같습니다.”
“글쎄요······.”
유진광은 정남룡의 말을 듣더니,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유진광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통신 3사들이 그동안 담합해서 35요금제니 75요금제니 하며, 데이터는 몇백 메가 단위로 찔끔찔끔 주면서, 국민들에겐 요금을 바가지로 씌웠지 않습니까?”
“그랬죠.”
“게다가, 이번 마탑폰 개통 때처럼, 자기들에게 판매장려금 같은 리베이트를 안 해주면 갑질을 하면서 스마트폰도 못 팔게 하고요.”
정남룡은 유진광의 말이 계속될수록,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통신사들의 갑질과, 비싼 요금 정책이 이제는 말도 안 되게 느껴진 것이다.
‘이게 다 마탑 덕분이지······.’
예전에 맥플폰이 처음 출시될 때처럼.
‘우리가 이제 맥플의 역할을 넘겨받은 거지.’
과거 우리나라 국민들은 맥플폰이 출시된 후에도 2년 넘게, 3년 가까이 X신 같은 조잡한 국내폰을 써야만 했다.
왜냐?
진성과 헬디 같은 핸드폰 제조사들이, 국내에 맥플폰이 들어오면 자기네들이 망한다는 걸 알고,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리베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플폰은 전 세계에 출시된 지 3년 가까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마탑이 과거 맥플 같은 일을 해내고 있으니까······.’
맥플이 기존에 없던 신개념 핸드폰으로 세상을 뒤바꿨다면.
마탑은 이제, 핸드폰뿐만 아니라 쥬얼리·제약·전자·통신 분야 등 거의 문어발식으로 전 산업을 통폐합하며 시장 질서를 주도해나가고 있었다.
과거 한국을 지배하던 재벌 기업들이 마탑을 견제하고, 공격했다가 무참히 짓밟히고, 지금은 무릎 꿇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이 그런 마탑의 행보와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면?
‘이대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유진광의 말처럼, 그동안 3대 통신사들은 국민들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제조사들에게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해먹다가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렸다.
반텍도 그렇게 버림받아서 망한 기업이었고.
‘옛일을 잊어서는 안 돼······.’
그들이 중소기업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정남룡은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머리를 숙이겠지만, 아마 망을 빌려주기 시작하면 다시 예전처럼 스마트폰 제조사들에게 갑질을 할 것이고······.’
정남룡은 잠시 고심하다가, 다시 유진광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제가 어떤 선택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전적으로 회장님의 뜻에 따르고 싶습니다.”
정남룡은 그룹 대표인 유진광이 ‘NO’라고 말한다면 통신 3사의 망 대여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한데.
“선택은 정 사장님이 하십시오. 저는 사실 전자나 통신 실무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
“하지만.”
유진광은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깍지끼고 몸을 책상 앞으로 납작 밀착시켰다.
그리고 은근한 눈길로 정남룡을 쳐다보며.
“부디 실장님을 실망시키는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김 부장은 내 옛 부하직원일 뿐이고, 협상은 저랑 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미, 미안하네 정 사장. 내가 너무 흥분했네.”
SC그룹 최기민 회장을 비롯한 다른 통신사 회장들은, 늘 자신의 발아래로 보던 반텍··· 아니, 마탑 전자 사장이 갑자기 강하게 나오자 말을 더듬거리며 당황했다.
“김 부장, 자네도 중간에서 참견하지 말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게.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닐세.”
“···예, 회장··· 아니, 사장님.”
결국 정남룡을 대신해 통신 회장들을 꾸짖던 김 부장도, 정남룡 사장의 호통에 깨갱해서 조용히 찌그러졌다.
“저희 마탑 통신의 매직 통신망을 빌려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정남룡은 아까 전, 온화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3대 통신사 회장들을 노려보았다.
“그··· 그렇네. 원하는 금액이 있으면 말만 하게.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네.”
통신 3사 중, 대표로 SC그룹 회장 최기민이 나섰다.
그는 다른 두 통신사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3대 통신사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지불이라······. 얼마 정도를 지불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정남룡은 일단 저들이 제시할 금액이 얼마나 될지 먼저 떠보기 시작했다.
“데이터 10MB당 1.2원으로, 음성통화는 분당 5.41원으로 하는 게 어떤가?”
최기민 회장의 제안에 정남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지금 우리가 알뜰폰 회사들에게 망을 대여해주는 비용과 동일한 비용 아닙니까···?”
“······.”
정남룡 사장의 지적에 최기민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김 부장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정남룡은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당신들은 아직도 자신이 갑인 줄 착각하고 계신가 보군요.”
그리곤, 평소엔 하지 않던 날선 목소리로 통신 3대장을 몰아붙였다.
“아직도 당신들이, 우월적 위치에서 통신 시장을 독점하던 그때인 줄 아십니까?”
“아니, 저 그게······.”
통신 3대장들은 정남룡의 꾸짖음에 무어라 항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예전 80·90년대 같으면 정경유착을 통해, 경쟁 통신사를 날려버리거나 아니면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 눌러버렸을 텐데······.
‘지금은 그것이 둘 다 안 되지······.’
결국 최기민 회장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대통령도 마탑 편이고, 기술력도 마탑에게 밀리니까······.’
생각해보니, 그들이 마탑을 이길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기존에 쌓아왔던 베이스로 어찌어찌 버텨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이제 틀렸다.
3대 통신사들의 주가는 폭락했고, 마탑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떡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100조 단위의 증거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돈으로 마탑이랑 경쟁할 수 있는 곳은 진성이나 흉대, 랏데그룹 정도뿐이었다.
‘진성도 이제 내리막길이고······.’
만약 마탑이 진성과 통신 3사를 짓누르고, 전자와 통신업계까지 제패한다면 올해 안에 재계 1순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최 회장님. 그리고 다른 통신사 회장님들.”
그렇게 미래의 마탑까지 예상하며 골머리를 앓는 최기민 회장을 향해.
“당신들은 다른 알뜰폰 사업자들과 똑같이 망 도매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알뜰폰 사업자들이 이동통신사들의 통신망을 빌려 쓰면서 지불하는 ‘망 도매대가’
그동안 이통사들에게 망 대여료를 지불해가며, 적자만 겨우 면해왔던 알뜰폰 사업자들이었다.
게다가 알뜰폰의 가입자당 전파사용료까지 따로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겨우 적자만 면하는 알뜰폰 사업자들이 점유율을 늘려나가는 게 배가 아파서, 직접 자회사를 만들어서 알뜰폰 사업에 개입했죠?”
“······.”
정남룡의 말처럼, 이통사들은 소비자들이 값싼 알뜰폰으로 번호이동을 시작하자, 곧바로 자회사를 만들어서 알뜰폰 시장에 침투했다.
-SC텔레콤, 자회사 SC K모바일로 알뜰폰 사업 진출! SC텔레콤 망을 쓰는 알뜰폰들을 매장에서 모두 만나는 게 가능!
저렇게 홍보해놓고 정작.
-SC 텔레콤, 알뜰폰 사업자에게 공문을 보내 “직영매장에서 판로를 열어 주겠다”며 지원자를 받아놓고, 결국 SC K모바일을 밀어주고, 다른 SC 알뜰폰 통신사들은 들러리행···.
-이통사들의 알뜰폰은 자회사들만의 특혜? 이통사의 공공 와이파이 무료로 사용, 저렴한 요금제로 다른 알뜰폰사들을 치킨게임으로 죽이기······.
이통사들은 자회사를 만들어서, 다른 알뜰폰 사업자들을 죽여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재벌들은 자기네들끼리 다 해 먹는 걸 원했지, 중소기업이 함부로 끼어들어서 숟가락을 얹는 걸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로만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설쳐대면서, 망도 빌려주곤 했지만 결국 자본력과 권력으로 치킨게임에서 가볍게 중소기업들을 압살했다.
정남룡은 이통 3사 회장들을 궁지로 몰아붙이며, 문득 유진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쪼록 실장님을 실망시키는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이준혁과 유진광 둘 다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겠다고 했지만···.
‘아마 두 사람도 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거겠지···.’
정남룡은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회장님들이 해주신 제안은 저희가 내부적으로 잘 검토해서, 결과를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저··· 정 사장! 아니 정 회장! 우리 한 번만 살려주게. 마탑이 망을 대여해주지 않으면, 우린 정말 끝장이란 말일세.”
정남룡 사장이 회의를 파하고 먼저 일어서려고 하자, 다른 회장들이 들고 일어나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검토해보고 연락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하지만 정남룡은 단호했다.
그는 이통 3사 회장들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과거 구차하고 비굴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최 회장님. 저희 회사 저력 있습니다. 반텍 시크릿 포트와 라이언2가 지금 얼리어 답터들 사이에서 엄청난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아, 저리 비키라니까 그러네.
-최 회장님··· 제발 한 번만······.
정남룡이 SC텔레콤 회장 최기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했을 때 최기민은.
-자네 회사는 어차피 가망이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고, 빨리 파산 신청이나 하라고. 빚이 더 쌓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하하하하ㅡ!
최기민 회장은 그렇게 비웃음을 날리곤, 정남룡의 손길을 뿌리치고 떠났다.
“후······.”
정남룡은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저리 비키라니까 그러네.
“최 회장님. 이거 놓으십시오.”
“······.”
휙!
“······!”
정남룡은 다리를 휘저어 애걸복걸하는 최기민을 떨쳐내곤 조용히 뇌까렸다.
-자네 회사는 어차피 가망이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고, 빨리 파산 신청이나 하라고. 빚이 더 쌓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하하하하ㅡ!
“당신네들 회사는 어차피 가망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고, 지분을 정리하던가 파산 신청이나 하십시오. 빚이 더 쌓이고 싶지 않으면 말입니다.”
정남룡 사장은 1년 전 자신이 들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며, 통신 3사 회장들을 모두 쫓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