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64.암흑계 평정(2)
“오랜만이군.”
“너도.”
이승재와 첸니르, 가룬바 일행은 풍도(風島)로 가는 선착장에서 뜻밖의 인연과 조우하게 되었다.
“근데 너, 마탑 밑으로 들어갔단 소문이 사실이야?”
와인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 진서윤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이년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정신 나간 소리부터 하네······.”
진서윤의 말에 이승재는 버럭 화를 내며, 쌍심지를 돋우었다. 사실 그녀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긴 했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들키는 날엔 이 바닥에서 자신의 조폭 인생은 끝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미 끝나버린 지도 모르지······.’
이승재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뒤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그림자처럼 뒤 따라다니는 두 남자가 있었다.
진서윤은 사람들 틈에 묻혀 있는 그들 두 사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먼저 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블랙 엔터의 진서윤이라고 합니다.”
“첸니르라고 하오.”
“가룬바입니다.”
“두 분 다 되게 싸움 잘하시고 젠틀하게 생기셨네요. 여자들이 되게 좋아할 스타일이에요.”
“······.”
“···고맙습니다.”
첸니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입만 벌렸고, 뒤에서 빠르게 포커페이스를 찾은 가룬바가 겸양의 인사를 했다.
진서윤은 두 사람의 반응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묘한 미소를 짓고선 선착장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배가 왔네요.”
그녀의 말대로 어두컴컴한 바다를 가르며, 중선 규모의 배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상체 부분은 하얀색 바탕에 밑 부분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서해누리호’였다.
“이거 원래 밤에는 운행 안 하는 건데, 우리 대부가 직접 야간 운행하도록 잡아준 거예요.”
“그렇군요.”
“······.”
어느새 진서윤은 첸니르·가룬바와 친근하게 지내며 이것저것 자신이 아는 사실을 알려주곤 했다.
“서해누리호는 3등석까지 있는데, 저희는 모두 1등석을 타고 갈 예정이고 풍도까지는 여기서 2시간 정도 걸려요.”
“네.”
“······.”
첸니르와 가룬바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필요한 대답만 딱딱했다. 사실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는 이상, 말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은 바로 말을 안 하거나, 적게하는 것이었다.
‘쳇, 나를 경계하나···?’
진서윤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약간 아쉬워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저 두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챘다. 경찰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진서윤은 조직이 돌아가는 내부 사정과, 경찰에서 입수하는 외부 정보들까지 양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흑천회라는 조직 내에서 대부(大父)인 장천수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마탑에서 보낸 실력자들······.’
팔성파의 이승재와 저 두 사람이 얼마 전에 충돌했고, 두말할 것 없이 첸니르 일행이 완벽히 접수해버렸다.
팔성파가 접수될 정도면 엄청나게 큰 충돌인데, 의외로 새어 나오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충돌 당시의 증인들도 드물었고, 있어도 그 당시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상태였다.
‘무언가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 당시의 증인들이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해도, 조직 내의 정보를 완벽히 차단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팔성파가 경영하는 사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승재와 새로 유입된 첸니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승재가 저 두 사람한테 찍소리도 못한다지?’
겉으론 이승재의 부하인 척, 녀석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지만, 실상은 이승재가 저 두 사람의 부하였다.
‘아마 장천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우리를 싸잡아 부른 거고······.’
마약 거래를 하는데, 흑천회 전체가 모일 필요는 없었다.
이번엔 마약 거래뿐 아니라, 삼합회와 혈맹관계도 맺는다고 전부 소집한다지만, 진서윤이 느끼기엔 자신들을 사지(死地)로 부르고 있다고 느꼈다.
‘재수 없으면, 나도 여기서 죽는 건가······?’
짜바리 인생 10년.
처음 경찰대 수속을 밟던 도중, 우연히 경찰청 고위 간부의 눈에 띄어 조폭 조직으로 잠입하는 주요 임무를 부여받았다.
지금은 자신이 조폭인지, 아니면 경찰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체성의 혼동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나는 경찰이야······.’
경찰이 사건 해결을 눈앞에 두고, 죽을까 봐 무서워서 발을 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0년 넘게 겉으론 경찰 조직에서 떠나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그대로였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범죄 조직과 맞서 싸우는 게 나의 임무다.’
진서윤은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첸니르와 가룬바······. 이 두 사람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자신이 있으니까 이 배에 올라탄 거겠지.’
저들도 지금 가는 곳이 사지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판을 일부러 만들려고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선빵은 이쪽에서 먼저 쳤지만, 늘 그렇듯 마탑이 맞고만 있을 조직도 아니니까······.’
마탑은 언제나 그래왔다. 타 제약회사의 견제로 공장이 불탔을 때도 역으로 기회로 삼아 타 제약회사를 통째로 빼앗았다.
대동그룹도 어찌해서 이준혁의 손아귀로 넘어갔는지 모르지만, 어찌 됐든 그놈들도 이준혁을 건들다가 그룹 전체가 날아간 게 틀림없었다.
‘이 두 사람이 정녕 이준혁이 보낸 사람이라면, 확실히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
후······.
진서윤은 선박의 난간에 기대 입에 머금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저도 모르게 피식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그동안 아무런 일면식도 없다가,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눈 사람들에게 별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어쩌면 저 사람들 입장에선 자신조차 제거해야 될 상대일지도 몰랐다.
부우우웅ㅡ!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서해누리호가 안산에 포함된 섬 중 하나인 풍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엔 ‘야생화를 지키는 아름다운 섬 풍도’와 같은 플랜카드들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니아들 사이에선 알려질 만큼 알려진 곳이 바로 풍도였다.
‘이런 곳에서 마약 거래라니···. 그것도 삼합회 놈들하고 혈맹까지 맺고······.’
말이 혈맹이지, 거의 꼬봉으로 들어가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조직들의 위상에서 중국의 삼합회와 한국의 흑천회는 거의 태양 앞에 반딧불 만큼이나 차이가 났으니까.
인구 규모나 각종 스케일 면에서 비교가 안 됐다. 삼합회는 말 그대로 유럽의 마피아들처럼 세계적으로 노는 조직이었다.
“멀미는 안 하셨어요?”
“전혀.”
“······.”
진서윤은 마른 오징어와 맥주를 한 캔 씩 들고 오물거리고 있는 첸니르·가룬바를 향해 그렇게 말을 걸었다.
어느새 진서윤의 표정엔 그들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다. 말투로 상냥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느낌이 강했다.
첸니르·가룬바 두 사람은 오히려 그런 진서윤의 태도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겉으론 이승재의 부하로 있어서 진서윤에게 고분고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넌 뭔데 우리 애들한테 자꾸 친한 척을 하냐?”
되려 이승재가 나서서 진서윤에게 버럭했다.
“우리 애들이라니? 너의 형님들 아니냐?”
“···뭐!?”
이승재는 대놓고 검증하려 드는 진서윤의 말투에 당황해 어버버거렸고, 첸니르와 가룬바는 침묵했다.
“개소리 하지말고, 배고프면 너도 오징어나 하나 처먹어라.”
“오징어 같은 소리하고 있네.”
두 사람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고깃배들이 주로 정착하는 서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풍도 자체가 서해 뱃길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보니, 오고 가는 고깃배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늦은 야간이라서 오고 가는 고깃배는 없었다. 오늘 이곳으로 삼합회의 조직원들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단출하군······.’
오늘 각 조직의 주요 간부진과 수행 부하 말고는 출입 허가를 철저히 통제받았다.
그래서 진서윤 일행은 10명 안팎의 인원만 데리고 흑천회·삼합회 혈맹식에 참여하는 셈이었다.
“······.”
가장 먼저 앞장서 걷던 진서윤은 저 멀리서, 드문드문 보이는 흑천회 간부진들을 보며 살짝 얼굴을 굳혔다.
다들 자신과 이승재를 바라보는 표정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적대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역시나, 장천수의 막내아들인 장형락이 맨 먼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진서윤에게 다가왔다.
예전엔 약간 몰래몰래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대놓고 뱀의 혀처럼 햝짝거리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전신을 훑어봤다.
“그래. 너도 참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마탑 간판 연예인인 혜실버와 접촉하신다고 하던데···.”
“아, 그거? 아쉽게도 파투났어.”
“에이, 누님의 영업력이 얼만데 그게 미끄러지겠습니까? 아무튼 고년이 이준혁 동생이라고 하니 한번 찔러나 보세요. ex의 한열로도 안 된답니까?”
“응, 그래도 안 된다네.”
진서윤은 대충 그렇게 대답을 한 후, 빠르게 장형락을 스쳐 지나갔다. 장형락은 진서윤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곧 있을 사태를 생각하며 다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자신의 손아귀에 넘어올 여자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씨벌년, 튕기기는. 잠시 후 내 눈앞에 꿇어서 아양 떠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
평소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신임을 못 받는 장형락이기에, 이런 무시는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는 도화제가 됐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 그래. 우리 서윤이 왔군.”
장천수는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진서윤과 이승재 일행을 맞이했다.
평소 잘 보여주지 않았던 여유로운 웃음까지 보여주며.
장천수는 그렇게 사장단들과 인사한 후, 진서윤을 뒤따라 온 부하 김일곤과 이승재를 따라온 첸니르·가룬바들와도 인사를 나눴다.
“일곤이는 저번에 봤었고, 승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오늘 처음 보는군······.”
장천수의 물음에 이승재가 얼른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들인데, 주먹 꽤나 쓰는 녀석들입니다. 입도 무겁고, 일을 맡기기도 수월해서 데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거라면 참 다행이군.”
장천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첸니르·가룬바를 훑으며,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윤이하고 승재는 나 따라와라. 곧 삼합회에서 사람이 올 것이다.”
“예, 회장님.”
“알겠습니다.”
진서윤과 이승재가 장천수를 뒤따라 간 후, 첸니르·가룬바는 흑천회 간부의 안내를 받아 민박으로 이동했다.
민박은 밀무역을 하는 항구와 가까워서 흑천회에서 통째로 사버린 곳이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첸니르가 정면을 쳐다보며 걸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가룬바를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일단 삼합회에서 사람들이 다 넘어온 후, 그때부터 일을 시작한다.
첸니르의 물음에 가룬바는 앞으로 일어날 진행 상황을 결정지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