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62.첸니르와 가룬바(3)
“10서클? 글쎄······.”
아리는 검지로 입술을 긁적거리며, 북한으로 떠나기 전 이준혁이 보여준 마법을 떠올렸다.
“그게 한 10서클 되나······?”
“어머머, 준혁 오빠가··· 아니, 이 실장님이 언니한테 마법 쓴 거 보여줬어요?”
“응. 손으로 막 불도 만들어내고, 바다를 향해 태풍도 막 쏘고 그랬어!”
“헉, 말도 안 돼······.”
“흐흐흐. 그렇지?”
아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혀를 쏙 내밀었다. 마치 ‘부러워 죽겠지?’라며 친구를 놀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지연은 셈이 난다기 보단,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해서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도 실장님이 돌아오시면 마법 한 번 보여달라고 졸라봐야겠어요.”
“글쎄···. 보여줄까?”
“안 보여주면, 일거리 잔뜩 던져주고 야근시켜 버리죠 뭐.”
“네가 마탑 그룹 왕이구나.”
“저는 그냥 보조하는 비서죠 뭐. 아무튼 언니 진짜 복 받았네요. 부러워요.”
“부럽긴 뭘.”
“실프도 너무 귀엽고요.”
“그건 인정.”
“나도 그런 딸 하나 낳고 싶다······.”
“얘, 말도 마라. 의외로 엄청 손 많이 간다. 나 그거 때문에 요새 디자인 업무도 많이 못 해. 밑에 사람들이 거의 다 하지.”
“아, 그러고 보니······.”
실프가 마법 아이템에서 태어났긴 했지만, 엄연히 유아기 상태였다. 인성이 세워지는데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 그래서 유아기 때의 인성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실프가 요정이긴 했어도, 사람들 틈 사이에서 자라나다 보니 어느새 주변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을 많이 따라 하곤 했다.
“워낙 똑똑해서 기저귀나 이런 건 필요가 없는데, 자꾸 놀아달라고 그래서······.”
“가끔 저희 사무실 데리고 오면 제가 놀아 드릴게요.”
“정말?”
“네. 삼촌들도 실프 은근히 귀여워하더라고요.”
“호호호, 정말 다행이다.”
아리는 실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은근 많은 거 같아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자신의 아이라는 걸 남들 앞에서 당당히 밝히는 게 참으로 어렵고 꺼려졌었는데, 이제 모든 걸 오픈하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후련하고 상쾌하고 좋았다.
*
흔히 '서면'이라 불리는 부산광역시 부전동.
이곳은 최근 마탑 건설이 수주를 맡아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었다.
본래 TI건설이 맡아서 건설하던 아파트인데, 최근 건설 경기 한파로 임금 체불과 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TI건설이 부도가 나고 말았다.
마탑 건설은 경매로 나온 TI건설의 지분을 모두 사들이면서 경영권을 확보했고, TI건설이 추진하던 아파트 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지만, TI건설이 외적으로 드러난 부도는 임금 체불과 자재 수급 불안정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이, 씨발. 너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삽질을 하고 있어? 어? 여기가 누구 땅인지 알아?”
“예? 누구 땅인데요?”
“모르면 씨발아!”
퍼억!
“으악!”
꽃무늬 남색 셔츠를 입은 선글라스의 중년인이 깜빡이도 없이 마탑 건설 소장을 향해 발길질을 갈겼다.
구둣발 그대로 가슴뼈를 얻어맞은 소장은 그대로 뒤로 고꾸라진 채 일어서질 못했다.
“씨발, 마탑 새끼들. 요새 서울에서 좀 잘 나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여기가 누구 나와바리인지도 모르고.”
“맞습니다요, 형님.”
“형님. 확 다 쓸어부까요?”
“조져!”
“예, 형님!”
꽃무늬 남방을 따라온 검은 양복의 부하들이 허리를 90도로 접더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들고 온 쇠파이프를 가지고 공사가 한창인 인부들을 향해 붕붕 휘둘렀다.
“야이 씹새들아! 여긴 너네 같은 서울 촌놈들이 건물 짓겠다고 얼씬거리는 그런 곳이 아니야!”
“우리 나와바리라고 이 씹새들아!”
휙, 휙!
“으어어어! 살려주십시오, 형님들······.”
“저희는 그냥 임금만 받고 일하러 왔을 뿐···.”
퍼억!
“으악!”
“아가리 닥치고, 꺼지라면 싸게싸게 꺼져!”
조폭들은 몽둥이로 위협해도 안 들어먹을시, 그냥 온몸을 사정없이 후드려 패며 인부들을 현장에서 내쫓았다.
그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다른 건설 회사의 현장 일을 방해하며, 일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놨다.
아무리 경찰서에 신고해도, 갑자기 등장해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바람에 잡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보복이 무시무시했다.
팔성파.
부산 전 지역을 꽉 쥐고 있는 팔성파는, 흑천회가 들어서기 전부터 전국적으로 제일 끝발 날리던 폭력 조직이었다.
과거엔 일본 야쿠자와 혈맹관계를 맺기도 했었고, 70·80년대부터 각종 사건 사고 및 이권 개입에 그들이 끼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유흥, 마약, 건설, 엔터 등등······.
본래 팔성파가 꽉 틀어쥐고 있는 이곳은, 흑천회 본진에서도 한수 접어줘야 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도··· 도망쳐!!!”
“돈이고 뭐고 일단 살고 보자!”
인부들은 제각기 들고 있던 삽과 망치들을 내다 버린 채 우르르 현장 밖으로 도망쳤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경찰도 팔성파 도박장에서 맨날 도박하고 가는 놈들인데, 민중의 지팡이고 뭐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통할 리 만무했다.
경찰이 신고자의 신변을 보호해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정보를 팔성파에게 팔아 넘겨서 보복을 당하게 했다.
팔성파를 경찰에 꼰지른 부산 시민은 대부분 공구리쳐져서 부산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아니면 어디 지하 밀실에 갇혀서 잔인하게 얻어맞다가 산속에 산채로 생매장되기도 했다.
“흐흐흐, 좃밥 새끼들······.”
후······.
부산 팔성파를 이끄는 두목 이승재가 입에 문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뿜으며 소장이 쓰던 의자에 턱, 걸터앉았다.
현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잔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이승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광대가 인상적인 그는 전국구 조직인 흑천회의 부산지부를 맡고 있는 두목이자, K블랙 소속 포스 건설을 이끄는 사장이기도 했다.
포스 건설은 일부의 기술자들과 조직 폭력배들이 우글거리는 어둠의 건설기업이었다.
그들은 타 건설사들과의 입찰경쟁에서 패배하면, 이렇게 뒤에서 조직원들을 사주해 타 건설사의 공사를 망하게 했다.
그래서 다들 포스 건설과 입찰하면 입찰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입찰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TI건설 사장은 외국에서 살다 온 교포 출신으로, 해외의 정당한 방식으로만 승승장구해오다가 한국의 이런 주먹구구식 막가파에 밀려 쪽도 써보지 못하고 회사가 망해버렸다.
안 그래도 건설 경기가 안 좋은데, 거기다 막나가는 조직 폭력배들 또한 기승을 부리니 부산 내에서 건설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가능한 자들은 모두 포스 건설 내의 계열사뿐이었다.
나머지 건설사들은 감히 발을 붙일 수가 없거나, 아니면 포스 건설 뒤에 있는 팔성파에 막대한 뇌물을 안겨주고 건설을 시작해야 했다.
안 그럼 포스 건설의 뒤에 있는 팔성파에서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아무튼 말이지, 마탑 거기에 마법사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있다는데 어디 이번에도 한 번 날고 기는 재주가 있는지 한번 보자.”
이승재는 마법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하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라는 놈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흑천회의 살아 있는 전설이 부하들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한단 말인가?
‘이렇게 한 번 깽판 지겨 놨으니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겠지······.’
혹시나 치졸하게 경찰에 신고한다던가, 아니면 변호사로 조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탑에 숨어 있는 마법사 녀석 또한 그러한 방식의 일처리를 좋아하는 듯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장천수의 견제에도 신고 한 번 안 한 것을 보면.
‘기어 나와라, 마법사. 아니, 이준혁······.’
드르륵.
이승재는 다 피운 담배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며,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가자.”
“예, 형님.”
그들은 처음 왔을 때처럼, 다시 우르르 몰려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바람처럼 왔다 간 자리에는 어지럽게 널브러진 공사 장비들과 무너진 모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
탕!
“큰일 났습니다, 첸 사장님. 가 사장님.”
“응? 무슨 일이야?”
서울에 있는 마탑 건설 본사.
그곳의 사장실에서 실프와 함께 유치한 놀이를 하고 있던 첸니르, 가룬바가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부하 때문에 깜짝 놀라 짐짓 근엄한 척을 했다.
“부산 서면 건설 현장에서 팔성회 놈들이 쳐들어와서······.”
“뭐? 팔성회?”
한 손에 실프를 안아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첸니르는 ‘팔성회’라는 이름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고하러 온 부하 석창익은 숨을 헐떡이면서 보고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인수한 TI건설 있지 않습니까? TI가 먼저 입찰받아서 수주하고 있던 아파트 공사를 우리가 이어받아서 건설하고 있었는데, 그만 팔성회 놈들이 난입해서······.”
“음······.”
첸니르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며, 까끌까글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가룬바처럼, 약간 인상이 날카로운 샐러리맨으로 폴리모프한 첸니르.
성인 남성처럼 보이려고 수염도 일부러 자라게 해서 매일매일 면도기로 깎아주고 있었다.
그는 영화에서 봤던 배우들의 근엄한 자세를 따라하며 중얼거렸다.
“팔성파면 흑천회 소속의 조직인가?”
“예, 맞습니다.”
석창익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본래 군포에서 치타대부를 운영하며, 돈놀이나 하던 석창익.
그는 이준혁··· 정확히는 이준혁의 아버지인 이강수와 척을 지다가 이준혁에게 혼나 그의 수하가 되어버린 케이스였다.
이준혁이 지구로 귀환한 후, 강제로 권속시킨 부하들 중 박태진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이제는 이준혁의 뜻대로 대부업을 모조리 접어버리고, 마탑으로 흡수합병된 건설회사에서 첸니르·가룬바의 부하 역할을 하며 일하는 중이었다.
“음······. 팔성회라···. 팔성회······.”
첸니르는 한국 조폭 영화에서 봤던 ‘팔성회’에 대해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화 ‘친구 아이가’의 주인공도 팔성화 중간보스 역할이었고, 기타 여러 영화에서 팔성회는 주요 단골메뉴로 자주자주 언급되곤 했다.
‘한 번 조져야겠군······.’
비록 첸니르가 마탑 엔터를 이끄는 사장이었고, 마탑 건설은 가룬바가 맡고 있었지만 어찌됐든 같은 마탑 식구의 일이었다.
게다가, 마탑 그룹 내에서 어둡고 더러운 일 처리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러라고 이준혁이 그 지긋지긋한 아공간에서 꺼내준 것일 테니까.
“알았다. 내가 한 번 가보지.”
“알겠습니다, 두목.”
“삼춘, 두목이 뭐야?”
첸니르의 품속에 안겨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실프. 첸니르는 그런 실프를 내려다보며, 금세 심각한 얼굴을 풀었다.
“응, 두목이란 건 말이다······.”
첸니르는 두목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될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무리를 책임지는 사람을 말하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