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31.더러운 인연(2)
“오랜만이야, 재영 엄마.”
최문희 여사가 거의 20년 만에 보는, 옛 이웃을 발견하곤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준혁의 엄마인 전미희 여사도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과거 군포에 이웃해 살던 동갑내기 이웃이었다.
그런데, 최문희 여사의 시댁이 서울에 물려받은 땅이 있어서, 그것이 신도시 개발이 나면서 대박이 터졌다.
본래 전미희 여사와 살갑게 잘 지내던 관계가, 돈 때문에 확 틀어졌다.
본래 전미희 여사의 남편인 이강수가 사업이 잘 돼서 최문희 여사가 빌붙다시피 하면서 반찬도 가져가고, 남편도 이강수 밑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이강수 집안은 망하고 전미희 여사네는 땅 개발로 대박이 나면서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최문희 여사는 그때부터 이강수네 집을 개무시하며, 옛정을 생각해서 잠시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에도 돈을 빌려주기는커녕 ‘그러니까 사업이 망했지’라며 악담을 퍼부으며 고소해 했다.
과거 최문희 여사 집이 군포의 허름한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할 때 대출금도 빌려줬었는데, 그때 차용증을 제대로 안 써서, 빚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그녀의 집안은 서울 땅이 개발되자마자, 고대로 서울로 날아갔고 잠적했다.
이강수네 집은 분함을 씹으며, 악착같이 일을 해서 빚을 갚아나갔다. 자식인 이준혁과 이혜연은 모르는 사연이었다.
그때 imf 당시 이준혁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 일도 잊혀졌다. 아니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외나무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다니?
최문희 여사는 그때의 일은 새카맣게 잊어버렸는지 뻔뻔스러운 얼굴로 전미희 여사를 아래위로 훑었다.
“어머, 진짜 웬일이래? 자기가 이런데 올 클라스였어? 아직 빚에 허덕이고 있는 거 아냐?”
“······.”
빚 얘기가 나오자, 전미희 여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최문희 여사가 입은 검은색 원피스를 한 번 주시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받아쳤다.
“옷 스타일 보니 예전 그대로네. 빚 갚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건 왜 물어봐? 어떻게 예전하고 똑같이 그렇게 뻔뻔하니?”
전미희 여사도 만만치가 않았다. 자식들 앞에선 늘 착한 엄마, 그리고 외부 사람들에게도 늘 선한 여자로 인식되던 그녀였다.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처음 순진무구했던 양 같았던 그녀의 마음도 어느새 강인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혜은이가 보는 앞에서 남부끄럽지 않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덧붙였다.
“쇼핑하러 왔으면, 쇼핑이나 하고 가.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
“이이익······!”
최문희 여사는 너무나도 열이 받았는지, 얼굴이 시뻘게지며 콧김을 씩씩 내뱉었다.
“어디 백화점 시식코너에서 한 끼 때우려고 기웃거리고 있나 본데, 여기 그런데 아니야. 그러니까 마트 같은 데 가서······.”
“우리 쇼핑하러 왔는데?”
최문희 여사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전미희 여사가 반박했다. 그녀가 혜은이를 돌아보자.
“음, G.보티첼리, 제이비, 꼼데가르송, 띠어리, 라베르샤, 랄프로렌, 레니본, 로사케이, 마인······. 이거 다 저희가 산 거예요. 그쵸, 점장님?”
혜은이가 양손 가득 든 쇼핑 가방을 들어 보이며, 점장을 돌아보자 그녀가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오늘 다 결제한 거예요.”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저 거지 같은 여자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런 비싼 옷들을 다 사요?”
최문희 여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악다구니를 썼다.
“로또라도 걸렸어? 한 10억? 세금 떼면 7억도 안 되겠네. 이 여자야, 아껴 써야지. 6억 금방이야~”
최문희 여사는 당황한 얼굴로 정신승리를 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미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였다.
“어이, 아줌마!”
그때, 저 멀리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한 청년이 최문희 여사를 불렀다.
*
“아줌마 대체 누구예요?”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곧바로 엄마의 맞은 편에 있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아줌마에게로 다가갔다.
갈색 파마머리에, 짙은 화장, 그리고 반짝이가 달린 검정색 원피스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얼굴은 그저 그런 일반적인 50대 아줌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너 뭐야? 갑자기 왜 끼어들어?”
그녀는 구띠 핸드백으로 팔짱을 끼며, 콧김을 씩씩거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엄마에게 말하는 모양새가 정말 싸가지가 없어었다.
“장 보러 왔으면 장이나 보고 나가지, 왜 가만있는 사람 붙잡고 시비예요, 시비가?”
“뭐? 시비?”
“옷은 그게 도대체 뭡니까? 어디 노래방 보도 뛰러 가는 것도 아니고······.”
“뭐? 보도?”
“엄마. 옷 그거 다 산 거예요? 더 필요한 거 없어요?”
나는 보도 아줌마를 철저히 무시한 채, 엄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응. 다 샀어. 더 필요한 건 없는 거 같애.”
“백도 하나 있어야죠. 저기, 점장님. 우리 엄마에게 잘 어울리는 백 하나만 추천해주세요. 가격은 몇억 해도 상관없으니까, 제일 비싼 거로요.”
“아, 네 손님. 그럼 에르메스 백으로 추천해드릴까요?”
“얼만데요?”
“2천만원 이상부터, 3억을 호가하는 것도 있습니다.”
“3억짜리로 주세요. 결제는 이걸로 바로 해주시고요.”
“아, 네. 고객님.”
나는 보도 아줌마 앞에서 곧바로 3억을 결제하고, 엄마에게 분홍색 악어 가방을 선물했다. 점원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홍콩 경매에 나왔던 버킨백인데, 우리 백화점에 입점한 지 일주일도 안 되셨습니다. 원래 예약 구매인데, 오늘은 특별히.”
점원은 이리저리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립서비스를 했다. 보도 아줌마는 자신이 찬 1-2백만 원으로 보이는 백을 찬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엄마. 이만 가요. 오늘 일진이 별로 안 좋네요.”
“고마워, 아들~”
엄마는 내게 팔짱을 끼며 몸을 밀착시켰다. 비싼 가방을 사줘서 고마운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해 이렇게 나서주는 게 고마워서 저러는 것 같았다.
“흥~”
혜은이는 보도 아줌마를 향해 코웃음을 크게 친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
최문희 여사는 멀어져 가는 전미희 여사를 멍하니 쳐다보며 서 있었다. 화낼 기력도 생기지 않았다.
자신은 서울 땅 개발로 30억을 쥐고, 일산 10억짜리 아파트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는데, 그게 다 초라해 보였다.
오늘 백화점에 온 것도,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비싼 물건을 뒤적거리며 위세를 떨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직원들의 태도를 트집 잡으면서 갑질도 하고 여러모로 기분 내러 나왔는데, 제대로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이런 씨발······.’
오랜만에 만난 그 가난했던 여자가, 지금은 에르메스 백을 그 자리에서 결제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더 화가 나는 건 아들이 결제해주고 나간 것이다.
“······.”
최문희 여사는 옆에 따라온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펑퍼짐한 회색 츄리닝 차림에, 뚱뚱한 외모. 직장조차 없어서 집에 빌붙어 사는 백수가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다.
아까 전에 엄마를 위해 비싼 물건들을 그 자리에서 결제했던, 전미희 여사의 아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격차가 심했다.
“꺄아아아악ㅡ!”
철퍽!
그녀는 들고 있던 옷을 바닥에 내팽개친 채, 괴성을 내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결제도 안 한 것들이라, 그 자리에서 내던져도 ‘직원이 알아서 하겠지’란 심보였다.
“저기 손님······!”
그녀의 옷 봐주기를 거들어주던 점원은, 표정을 확 구기며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이미 멀리 가버리고 없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매번 올 때마다 옷은 안 사고, 옷만 주야장천 꺼내놓고 드레스룸에서 비닐코팅을 다 까버린 후 하나둘씩 입어보다가 사지도 않고 그냥 나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 경우가 너무 심했다.
입어보기만 하고, 안 산 것도 문제인데 이번엔 아예 옷을 땅바닥에 패대기쳐서 옷을 아주 못 쓰게 만들어놨다.
“저기 점장님. 여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 웬 진상 손님이 옷을 패대기쳐서, 매장에 있던 새 옷이 못 쓰게 되었습니다. 네, 아직 결제도 안 한 옷이에요. 그 고객 성함이요? 잠시만요······.”
직원은 이 일을 그대로 넘어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여자는 법적으로 한 번 제대로 혼나봐야, 이런 짓을 함부로 못한다. 솔직히 법으로 해결하는 것도 짜증나고 귀찮은 일.
‘내게 마법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과연 이렇게 건의를 해도, 본사에서 받아들일지 미지수였다.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건 아닐지······.
그런 점원이 염원이, 파문을 일으켜 한 남자에게로 전해졌다.
*
“엄마,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나는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탑승해서 조수석에 앉은 엄마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만난 사람.”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가워하진 못할망정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엄마를 무시해요?”
“글쎄다. 저런 사람이 있으면 이런 사람도 있지 않겠니?”
엄마가 대답을 회피하려 하자, 나는 몰래 엄마의 마음을 읽었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아까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음······. 이름은 최문희. 24년 전에 우리 가족의 돈을 떼먹고 서울로 나른 년이구나. 게다가 서울 땅이 개발돼서 알부자가 됐고······.’
나는 엄마의 기억 속에서 그년의 만행을 읽어나가며 분통이 터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몰염치한 년이 밝은 대낮을 활보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도 무심하시지.
‘신은 없어······.’
방관자 신.
신은 언제나 방관한다. 현세에 간섭하지 않는다. 아니, 간섭하지만 그건 시간이 흐른 후다. 그땐 이미 피해자는 상처 입을 대로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진다. 가해자도 벌을 받긴 하지만, 그 처벌이 너무 늦게 떨어진다. 24년이나 지났는데, 저것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걸 보면 사이즈가 나온다.
‘오냐, 이년.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다니는구나. 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렸다······.’
나는 마력을 분사해, 그녀에 대한 원망이 섞인 사념들을 차곡차곡 모아나갔다.
그래, 이 정도면.
이 정도라면 응징해도 아무런 인과가 없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년이고, 생존해 있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민폐인 년이었다.
나는 조용히 검지를 펴서, 마법을 시전했다.
*
“씨발, 씨발, 씨발!”
“엄마가 참아. 그런 쫌팽이 녀석들을 신경 써서 뭐해?”
최문희 여사를 졸졸 따라온 그녀의 아들이 엄마의 팔을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둘 다 아까 전 상황으로 분노해 있었다.
“이거 놔!!!”
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뿌리쳤다. 아무리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나를 무시해?’
그녀는 전미희 여사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과, 그녀의 아들에게 무시받은 것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걸곤,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타고 온 세단이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네, 거기 대성 흥신소죠? 네, 알아볼 사람이 있는데요. 조사하면서 조선족 몇 명도 같이 구해주세요. 그리고······.”
“어, 엄마···. 갑자기 차 엔진이 이상해!”
아들은 백화점에서 사 온 팝콘을 뜯어서 주워 먹다가, 유리창 너머 엔진에서 검은색 연기가 솟아오르자 당황해서 외쳤다.
“네, 조선족 3명 정도로. 사람 담근 경력 있는 자들로요. 보수는 인당 5천이면 되죠?”
“어 엄마!!! 지금 차가 이상하다니까!!!”
“얘, 좀 조용히 해봐. 엄마 전화하고 있잖······!”
콰아아앙ㅡ!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도로로 나가려던 세단이 갑자기 엔진부분부터 폭발하며, 화마가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