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22.블랙마켓
“그럼 저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루 동안 나와 아리, 제임스 박은 대략적인 앞으로의 플랜 구상을 끝마쳤다.
그리고 옷걸이에서 옷을 챙겨 입은 제임스 박이, 챙모자를 앞으로 내밀며 작별 인사를 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잘 가세요~”
나와 아리는 호텔 앞까지 그를 마중했고, 제임스 박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해외 컴퍼니 설립을 끝마친 제임스 박은, 나의 대리 서명을 얻고 한국에 투자 법인을 설립하러 출국한 것이다.
한국에 설립할 법인은 간접적인 투자 중개회사였다. 실투자자는 내 명의의 해외 컴퍼니에서 자금이 나가고, 지분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할까요?”
분홍색의 3색 줄무늬가 있는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꾸미지 않은 그 모습이 더 아찔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번 안아보고 싶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들어가서 준비하죠. 출국 준비.”
나는 그녀를 안는 대신,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호텔 안으로 돌아갔다. 체크인을 했으니, 이젠 체크 아웃을 할 차례였다.
*
레이바에게서 날아온 블랙 마켓의 이번 경매지점은 영국 런던이었다. 매년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 랜덤의 장소에서 열리며, 위치는 경매 7일 전에 참석자들에게 통보됐다.
1년에 단 1번 열리는 블랙 마켓 초호화 경매.
유럽과 미국, 중동, 동남아 등등, 포브스에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대부호들이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모두 모이는 날이다.
그들은 중개수수료 10%를 기꺼이 지급하고,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컬렉션에 수백억, 수천억 원 이상의 돈을 쉽게 지불했다.
심지어 조 단위 경매 금액이 심심찮게 거래되는 곳이 바로 블랙 마켓 경매였다.
그곳의 모든 거래는 부호들의 비밀계좌로 이루어지며, 블랙 마켓은 중개자로서 거래가 별 탈 없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중개수수료만 받는 것이 아닌, 직접 거액의 돈을 받아 놨다가 매매가 성사되면 판매자에게 중개 받은 돈을 대신 전해준다.
아이템베이에서 게임 아이템을 사고파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됐다.
“후······.”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와 짐들을 챙긴 후, 호텔 체크 아웃을 끝마쳤다.
약 8일 동안 머무는 가격이 무려 280만 원이었다.
하루 숙박료가 2000만 원에 달하는 스위트룸에 비하면 싼 가격이었지만, 우리는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뉴욕에서~ 이젠 런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 후.
아리가 신난 목소리로 예약한 비즈니스석 표를 받았다. 많이 들뜬 모습이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뉴욕 버진 아틀란틱 공항에서 대기했다.
‘일할 땐 완전 깐깐한 비즈니스걸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 푼수네···.’
자신 앞에서만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본 모습이 저런 것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했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리와 나는 2시간을 기다려 비행기 좌석에 착석했다. 이번에도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저번에 말한 대로, 저 또한 블랙 마켓 경매는 진짜 처음이에요.”
아리는 나와 함께 일주일 넘게 호텔에서 지내면서, 이것저것 자신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가르쳐줬다.
물론 신체 사이즈 이런 건 말고, 가족 사항이나 자신의 사업에 관한 전반적인 이력 등을 소상히 가르쳐줬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이번 블랙 마켓 경매에 처음 참가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바 하곤 많이 친해 보이던데요? 레이바는 어떻게 알았죠?”
“그야, 해외 보석 경매에 참가하게 되면서 조금씩 안면을 트게 됐죠.”
“레이바가 먼저 아리 씨에게 찝적댔죠?”
“네. ···뭐, 헤헤헤······.”
아리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갈색으로 염색한 단아하고 풍성한 긴 생머리가,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이런 미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딜 가든 날파리들이 많이 꼬이겠지.’
게다가 혼혈미인이다.
이건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서구적인 외모와 몸매, 그리고 혼혈이라는 또 다른 메리트.
동양 남자와, 서양 남자 모두 탐낼만한 그녀였다.
지켜보고만 있어도 욕심나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말 걸고 싶고, 안아보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물론 나도 그런 욕구를 못 느낀 건 아니다.
거의 1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방에 지내면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으니까. 만약 신(神)에 준하는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남자 망신 다 시킬 뻔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마치 팽팽한 고무줄처럼, 긴장감 넘치는 이런 사이도 괜찮았다. 스릴 있고, 짜릿하고, 재미있고.
그녀는 창밖을 쳐다보며 재잘재잘 떠들다가, 곧 분홍색 토끼 모양의 안대를 쓰고 숙면에 빠져들었다.
이지적인 이미지의 검은색 라쏠베이스 정장에, 가지런한 포니테일 머리. 그리고 옅은 화장이 토끼 안대와 매치가 잘 안 됐다.
나는 피식 웃으며, 좌석을 등받이를 젖혀서 남은 7시간 동안 아리와 함께 숙면하도록 했다.
*
“하암~ 졸려~”
나는 눈꺼풀이 감긴 아리를 공주처럼 등에 업고, 런던 스텐테드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법으로 여행용 가방을 양쪽으로 끌고 다녔지만, 광외곡 마법을 펼쳐서 아무도 못 보게 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서야 나는 마법을 풀었다.
“어이, 레이바!”
저쪽에서 아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미스터 리~ 오랜만입니다.”
나와 레이바는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나눴다. 아직 등에 업혀 늦장을 부리고 있던 아리도 부스스 감긴 눈을 떴다.
“어, 레이바!”
“미스 최, 조는 모습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
레이바는 내 등에 업혀 있는 아리를 음흉하게 쳐다보며 실소를 내지었다.
나는 아리를 땅에 내려다 준 후, 레이바를 쳐다봤다.
“레이바, 그 차는 뭐예요?”
아니, 레이바가 아닌 그가 끌고 온 차를 쳐다보며 물어봤다.
“오늘 두 분을 픽업할 차량입니다.”
“헐~”
아리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바의 뒤에는, 가물치처럼 길쭉하고 하얀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비밀 경매에 참가한다고, 이런 대우까지 해주시는군요.”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의 손을 이끌고 차로 이동했다.
“두 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레이바는 나와 아리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스킨쉽을 하자, 몹시 부러운 눈길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눈길을 오히려 즐기면서, 아리의 손을 풀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뭐,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
레이바는 내 도발에 살짝 눈썹을 꿈틀했지만, 비즈니스맨답게 금세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다.
“타시죠.”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주며 레이바가 우렁차게 말했다.
쾅!
문을 닫을 때 세게 닫는 걸 보면, 방금 전 내 행동 때문에 앙금이 조금 덜 풀린 듯 보였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부우웅!
기사가 운전을 하고, 레이바는 조수석에 앉았고, 나와 아리는 뒷좌석에 꼭 붙어 탔다. 뒷좌석이 넉넉히 여유가 있었지만, 공항 시차 때문에 피곤한 아리가 차 문에 부딪힐까 봐, 내가 옆에서 안고 탔다.
“······.”
연신 백미러로 그 모습을 확인하며 레이바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일부러 아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끙······.”
아리가 조는 와중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원래 단둘이 있을 땐 끌어안기는커녕, 손도 잘 안 잡았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윈저성(Windsor Castle)이요.”
레이바는 단단히 삐친 건지, 아니면 장난으로 삐친 척하는 건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먼가요?”
“1시간 정도 걸립니다.”
기다란 리무진 실내엔, 아주 푹신푹신한 좌석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간단한 간식거리와 음료, 그리고 잡지나 책 등도 꽂혀 있었다.
tv는 기본이었다.
“이번 경매엔 많은 부자들이 참가하겠네요?”
나는 아리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며, 다소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레이바도 언제 그랬다는 냥,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유럽의 부호 가문들부터 시작해, 실리콘벨리의 IT재벌, 중국의 화교, 중동의 산유국 왕족들 등등. 그밖에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진짜배기 부자들도 많이 참가합니다.”
“오, 진짜배기라. 많이 기대가 되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바의 말에 맞장구쳐줬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블랙 마켓에 대해 꽤나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10억짜리 차를 타는 걸 보면, 연봉도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받겠지.’
10억짜리 차를 타고 다닌다면, 연간 10억 이상은 벌지 않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러했다. 물론 리스하거나 렌트하면 가격이 많이 내려가겠지만, 그래도 부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슈퍼카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설마 회사 차는 아니겠지···?’
나는 그런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여유롭게 떼웠다. 어차피 레이바가 월 얼마를 받든,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이번 블랙마켓 경매에서 제값 받고 레인보우 다이아를 팔고 귀국하면 그만이었다.
블랙마켓이 어떤식으로 돌아가는지는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하지만, 직접 경매에 참여하게 됐으니 조금은 알아 둘 필요는 있었다.
그렇게 1시간쯤 흘렀을까?
우리는 레이바가 말한 대로, 윈저시에 위치한 윈저성에 도착했다.
“아리 씨. 도착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입을 갖다 대곤 조용히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와 귓볼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들어갔다.
“앗, 깜짝이야!”
아리는 새촘하게 눈을 흘기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톡톡, 쳤다. 아프진 않고 간질간질했다. 레이바는 아리와 알콩달콩 장난을 치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두 분께선 내리시기 전에 먼저 이걸 써 주십시오.”
뭔가 하고 받아보니, 귀여운 토끼 가면과 흉악하게 생긴 악마 가면이었다.
“······?”
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레이바가 호탕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블랙마켓은 비밀 경매답게, 참가하는 모든 회원들에게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해드립니다. 이건 그 일환이고요.”
원적외선에도 안 걸리는 가면이라고 연신 칭찬을 늘어놓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설마 악마 가면을 저보고 쓰라는 건 아니죠?”
“그럼 설마 이런 아리따운 숙녀분에게 악마 가면을 씌우겠습니까?”
레이바는 ‘한 방 먹었지?’ 하는 통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검은색 악마 가면을 건네주었다.
“잘 어울리실 겁니다. 뭔가 분위기가 닮았어요. 쓰시면 포스가 있을 것 같네요.”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를 얘기를 들으며 나와 아리는 가면을 썼다. 아리는 분홍색 토끼 가면, 나는 검정색의 흉악한 악마 가면을.
“자, 이제 내리시죠.”
이번에도 레이바가 먼저 내려서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줬다.
‘예전에 많이 봤던 양식인 거 같은데······.’
나는 대충 악마 가면을 쓰고선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초원 너머로 펼쳐진 윈저성을 쳐다보니,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저렇게 손수 돌과 흙으로 쌓은 커다란 성채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한 달?
체감상 한 일 년은 넘은 거 같았다.
지구에 돌아온 지 한 달 밖에 안 되었지만, 원래 살던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게 적응했다. 이젠 현대의 문물과 이기가 익숙했다.
그래서 윈저성을 보며, 갑작스럽게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레이바입니다.”
성의 입구에서 우리 세 사람은 신원을 조회 받고, 우리는 성안으로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