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21.본격적인 뼈대 구축
“식사 나왔습니다.”
아리와 나는 크레스티 경매를 끝마친 후, 일주일 동안 한방에서 지냈다. 뉴욕 맨허튼 거리를 함께 거닐기도 하며, 식사도 매 끼니 함께했다. 그러면서 우리 두 사람은 사업 파트너 이상으로 점점 더 가까워졌다.
“피자, 스파게티, 치킨, 샐러드······. 와, 정말 많이도 왔네요.”
아리는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우리는 점심까지 늦장을 부리다가 주방장이 가져오는 음식들을 보고선, 얼른 이불을 집어치웠다.
탁, 탁.
주방장은 식탁 쪽으로 이동식 테이블을 밀고 오더니, 가져온 음식 쟁반들을 차곡차곡 늘어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피자, 금방 삶아온 싱싱한 면발의 스파게티, 오븐에 갓 구운 훈제 양념치킨, 신선한 채소가 듬뿍 버무려진 샐러드까지.
우리 두 사람은 얼른 포크와 숟가락을 들고, 그것들을 양껏 퍼먹었다. 한방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아리 또한 내숭 같은 건 전혀 없어지고 마치 가족 앞에서 먹는 것처럼 편하게 먹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치킨은 언제나 옳아요.”
“인정.”
아리는 분홍색 3색 줄무늬가 새겨진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차림새로 연신 치킨을 찬양했다. 물론 피자도 맛있었고, 호텔 음식은 다 맛있었다.
“이제 블랙마켓에 입성할 일만 남았네요.”
아리는 일주일 동안 구름 위를 떠다니는 심정으로, 늘 ‘레인보우, 레인보우~’ 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어째 나보다 더 좋아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역대 치러진 세계 보석 경매 중, 신기록을 갱신한 건 확실했다. 비록 매매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역대급은 역대급이었다.
작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800억원에 팔린 59.6캐럿짜리 핑크다이아몬드를 6배 가까이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아마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고, 아리는 자신의 일처럼 뿌듯해했다.
“준혁 씨, 무슨 생각 해요?”
“음···. 집에 갈 생각?”
“이미 머릿속엔 떼돈 벌어서 금의환향할 생각으로 김칫국 오졌죠~?”
“하하하.”
아리가 포크로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그렇게 나를 놀려댔다. 우리 두 사람은 일주일간 지내면서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연인처럼, 친구처럼 농담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지냈다.
밥도 같이 먹고, tv도 같이 보고, 책도 같이 읽었지만 잠자리는 늘 따로 했다. 아직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가 조심하는 상황.
나는 나 대로 처음으로 해외에 나와서 많이 들떠 있었고, 이곳에서 맛보는 다양하고 색다른 음식과 거리의 풍경에 매우 만족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구로 귀환해,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아리와 오랜 시간 가까이 붙어 있어서 설레고 야릇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하지만, 비즈니스 관계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기보단,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돈이 생기고, 자신의 기반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그때 정식으로 고백할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이계에 나두고 온 아르젠도 아직까진 눈에 밟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리, 아르젠······.’
이젠 아르젠의 이름보다 아리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게 이런 뜻일까?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아리와 아르젠을 머릿속으로 비교하며, 나는 멀뚱히 아리를 쳐다보았다.
아리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미국 예능 프로그램을 쳐다보면서, 스마트폰도 가끔 힐끔거렸다.
끼익.
우리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식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여, 회장님. 사모님~”
“어~?”
식기들을 들고 현관으로 나가려던 아리가 마주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임스 박?”
“잘 지냈어요? 미스 최!”
제임스 박은 바바리코트에 둥그런 챙모자를 쓴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챙모자를 벗어, 아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영국 신사 같았다.
“미국에 있다더니 용케도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왔군요.”
“하하하. 연인들의 달콤한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이거 참 미안하군요.”
“흥~”
아리는 제임스 박의 놀리는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어서 들어오세요, 제임스 박.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현관으로 들어오는 제임스 박을 향해 손을 들어서 반갑게 인사했다.
제임스 박은 현재 나를 위해 세계 곳곳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미국 델라웨이에 조세 회피 컴퍼니를 설립하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 계좌까지 뚫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임스 박을 위해 우리가 배고픔을 참아가며 남겨둔 음식들이에요.”
아리는 큰 접시에 피자, 치킨, 스파게티, 샐러드 등을 모아 놓고 제임스 박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미스 최 밖에 없군요. 잘 먹겠습니다.”
시장했는데 잘 됐다는 표정으로, 별다른 사양 없이 제임스 박이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침도 거르고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얼굴이 반쪽인 게 배가 많이 고파 보였다.
나와 아리는 그가 편하게 식사하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호텔 앞에 조성된 공원을 빙빙 돌았다.
“제임스 박이 준혁 씨를 위해 큰일을 했네요.”
“네, 정말요.”
나는 아리의 말에 긍정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초인적인 마법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런 전문적인 부분에 있어선 많이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이것은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오랜 경험과 인맥이 있어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제임스 박이 쌓아온 오랜 세월과 노력을 돈으로 산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보석이 순조롭게 팔려서 정말 6천억 이상 손에 쥐게 되면, 제임스 박에게 투자 회사를 맡길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제임스 박은 자신의 돈으로 투자하면 망하는 안타까운 징크스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 조언을 할 땐 냉정하게 사리 분별을 해서 수백 배 이상으로 성공적인 투자 결실을 맺어 줬다.
아마, 이준혁의 돈으로 투자 회사가 설립되면 그 적임자로서 아주 알맞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리 씨가 부탁한 일도 전력으로 도와줄게요.”
“부탁요?”
그녀의 표정엔 ‘무슨 부탁?’이라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아리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입술을 긁적거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을 도와달라고 하셨잖아요.”
“아···.”
아리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 도와줄 건데요?”
궁금해 죽겠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밀.”
“치~”
아리는 토라진 듯 내 팔을 툭, 치며 고개를 돌렸다. ‘나 삐쳤어!’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문득 심장이 아파와서 가슴을 감싸 쥐고 싶었다.
‘아마 정치적으로 엮이게 되면 국회의원들과도 한판 붙을 수도 있겠구나······.’
그동안 아리와 많이 친해지면서, 우리는 각자의 가정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집안은 한국의 일반 서민 가정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므로 얘깃거리가 없었지만, 아리는 달랐다.
그녀의 집안은 아버지는 대통령, 어머니는 보석 회사의 사장이었다.
아리의 아버지인 최종환 대통령은, 3년 전 새로 설립된 신당인 선진중립당 소속의 출마자였다. 본래 한국의 정치계는 대한당, 한누리당, 새천년당의 3파전이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한쪽으로만 너무 치우치거나 아니면 애매한 포메이션에 있는 정치인들에게 많은 회의감을 느꼈다.
정치 외면, 정치 절식.
대한민국 국민들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새롭고 혁신적인 인물이 등장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아리의 아버지 최종환 후보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착실히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교사였기 때문에, 학교 공부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수석코스를 밟아 최고 명문인 한국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 후, 19살의 나이로 최연소 사법고시를 패스했다. 남들보다 1살 일찍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최연소 기록도 남들보다 1년 이상 더 빨랐다. 그 전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자는 박근애 정부 시절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운였다.
아무튼 그 이후 최종환의 최연소 기록 갱신은 계속됐다.
최연소 사법연수원 수석, 최연소 부장 판사, 최연소 대법관 자리를 거치면서 무수한 전적과 기록을 남겼다.
서민의 판사, 정의의 판사란 소리를 들으며 재벌, 정치인 가릴 것 없이 법 앞에서 공정하게 판정하며 전 국민을 들썩이게 했다.
그는 항상 돈 없고 불쌍한 서민의 편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많은 부동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아래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것은 곧 하나의 당으로 뭉쳤다.
선진중립당.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어느 한 곳에 치우침 없이, 양쪽의 장점을 끌어모아 대한민국을 혁신한다! 라는 새로운 구호 아래 보라색 깃발이 펄럭였다.
보수의 파랑색, 진보의 빨강색이 합쳐져 생겨난 보라색이었다.
대선 당일날 광화문 광장은 보랏빛 물결로 물들었고, 파랑색과 빨강색을 압도했다.
-대한민국이 이제 새로운 분기점에 접어들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中道)를 지키는 최초의 대통령 탄생!
-무너져내린 경제를 살릴 최초의 중립 대통령!
아무런 지지기반 없이 시작되었던 보라색 혁명이 화려하게 성공했을 때, 정치적 외압을 받고 이상한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들이 일제히 태세를 전환했다.
그리고 임기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애초에 경제와 안보, 복지와 민생.
4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많은 내각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무소속 의원들, 단체로 선진중립당의 정책에 반대!
-대한당 일제히 국회 보이콧!
-한누리당, 오늘 광화문 광장 앞에서 대통령 탄핵 시위!
-새천년당, 한누리당과 연합해 대통령 탄핵 시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선진중립당. 당내 공천을 놓고 이중구 당대표, 옥새를 들고 나르샤!
대통령을 받쳐줘야 할 정당이 친대통령파와, 당대표파로 나뉘어져 피 튀기는 집안싸움을 벌였다.
결국 국민들은 서서히 선진중립당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게다가, 국외적으로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갑질과 일본과 미국의 대외 압박이 이어졌다. 북한의 핵 위협도 계속됐다. 약소국인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나라엔 일자리가 점점 사라져갔다.
‘과연 내가 나선다고 이 문제들이 해결될까?’
나는 잠시 복잡한 정치 상황을 떠올리다가, 곧 고개를 휘젓고 아리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이만 들어갈까요? 제임스 박도 식사를 끝마쳤을 거 같은데.”
“그래요!”
아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이 없는 표정. 왠지 나만 철썩같이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
*
“보석 경매 금액은 준혁 님의 명의로 된 해외 컴퍼니 계좌에 입금하기로 하고, 출금은 이준혁 명의의 컴퍼니와 연동되는 스위스 비밀 계좌의 마스터 카드를 사용하기로 합시다.”
식사를 끝마친 제임스 박이, 깔끔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 서류 가방을 꺼내놓으며 먼저 운을 뗐다.
“마스터 카드는 신용카드처럼 선불로 사용하고 다음달에 다시 갚는 방식인가요?”
“아니요, 체크 카드처럼 준혁 님의 컴퍼니 법인 계좌에서 쓰는 족족 빠져나갈 겁니다. 뭐, 수백억씩 도박 베팅을 하지 않는 이상 6천억이면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이죠.”
제임스 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밀 경매에서 매매한 보석 매매금을 받을 계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후,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그리고 마스터 카드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한국에 설립할 투자 회사는 성장성이 있는 블루칩 회사들을 우선적으로 투자하기로 하고, 투자금액은 500억에서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박하게 연간 10% 수익 목표로.”
제임스 박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제안하려고 했는데, 그가 알아서 선수를 친 셈이다. 표정으로 봐선 내심 100% 이상 수익을 낼 자신이 있어 보였지만, 혹시 몰라서 안정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투자 회사 외에 야심차게, 뚝심 있게 밀어붙이고 있는 제약 회사 설립 문제도 도마 위에 올렸다.
“저번에 제가 말한 대로 마탑 컴퍼니 아래에 투자 회사, 그리고 제약회사도 같이 설립하는 거 아시죠?”
“흐음. 역시 밀어붙이시는군요.”
제임스 박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전처럼 의욕 있게 나를 제지하진 못했다.
제약회사를 설립하려는 나의 강력한 의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럼 정식으로 프로젝트롤 논의해볼까요? 일단 제약회사가 돌아가려면 일정 이상의 연구 인원과 연구실을 대여해야겠지요?”
제임스 박은 그동안 많은 투자 경력을 통해, 여태껏 봐왔던 제약회사의 구조에 대해 설명한 후 A4용지에 마탑 제약회사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자본금은 300억 정도로 시작합시다. 어차피 준혁 님이 기술을 쥐고 설립하는 것이니, 원톱 체제로 주변 연구원들은 보조하는 식으로 진행해보는 거지요.”
“오케이!”
나 또한 바라던 바였기에 바로 오케이 했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업 체계의 뼈대가 서서히 구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