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11.갓의 분노
눈앞에 쌓여 있던 과제들을 모두 해치운 다음 날.
나는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데모스 행성에선 하루 3시간 정도 자면 많이 자는 거였다. 이미 인간의 육신을 초월했고, 항상 긴장된 상태로 살았다.
하지만, 지구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젯밤 즉석으로 뚝딱 만든 마법진이 24시간 집을 보호하고 있었고, 경고장치까지 만들어 놨다.
누군가 적의(敵意)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접근하면 자동반사적으로 그놈은 화를 입게 되어 있었다.
불(火), 번개(雷), 바람(風), 얼음(氷) 등등······.
아주 다양한 마법으로 조질 준비가 상시로 되어 있었다. 마치 프로그래머가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처럼, 나도 모든 마법 지식을 총망라해서 마법진을 촘촘히 섬세하게 구축했다.
“후······.”
일어나보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시간은 오전 10시.
혜은이는 아마 학교에 갔을 거고, 엄마와 아버지는 자식들의 권유에 일을 그만두시기로 했다. 아버지는 오늘 건강해진 모습으로 예전 직장에 한 번 놀러 간다고 룰루랄라 나가셨다.
내가 엄마와 아버지에게 각각 4900만원이 담긴 돈 가방을 한 개씩 안겨드렸다.
두 분은 처음엔 당황해하며 거절하셨다. 그렇게 큰돈을, 그것도 현금으로 안겨주니 부담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혜은이가 합세해서 정당함을 피력해서 할 수 없이 부모님이 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땐 역시 딸의 애교가 최고였다.
아무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부모님의 표정에서 돈 걱정에 대한 근심이 모두 사라져서 표정이 밝으셨다.
부모님의 표정이 밝으니, 나 또한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돈.
돈은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돈 자체가 행복은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그동안 돈에 너무 시달려왔고, 돈 때문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돈이 곧 ‘행복’으로 느껴졌다.
‘사실 돈이 다가 맞긴 하지. 수단, 수단 하지만 결국 돈 앞에서 성인군자처럼 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니깐.’
아무튼 우리 집안의 가장 우환거리였던 돈 문제와, 아버지의 건강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당장 급한 불을 모두 꺼서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이 남아 있었다.
병원비는 깔끔히 해결했지만, 아버지가 사업이 IMF때 부도가 나면서 갚지 못한 빚과 생활고로 낸 빚이 총 2억 원이나 밀려 있었다. 두 분께서 악착같이 아끼고, 덜 쓰고 하면서 조금씩 갚아나가서 2억이다.
원래는 4억이 넘었다고 들었다.
‘빚이야 뭐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은 안 된다만···.’
부모님께 드린 9천800만 원을 빼도, 아직 내 수중엔 391,761,500원이 남아 있었다.
즉 3억 9천.
2억의 빚을 제해도 1억 9천이 남는다.
어제 마트에서 장본 돈이 236,000원, 혜은이랑 지하철 탄 돈이 2,500원 그리고 집으로 올 때 택시비가 만 원이었다.
238,500원.
서민들의 입장에선 한 달 관리비 수준에 육박하는 금액을 하루 만에 다 써버렸다. 하지만,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앞으로는 가족들이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살 수 있도록 만들 거야······.’
더 이상 돈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슬퍼하지 않도록.
이계에서 100년 동안 고생한 게 헛되지 않도록, 정말 알차게 살 생각이었다.
내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 수많은 보석들.
금괴가 320개에, 아직 가치가 매겨지지 않은 보석들이 수백 개가 있었다.
크기가 크고, 세공이 아주 잘 된 다이아몬드는 소수였지만 어중간하고 짜잘한 보석들은 많았다.
‘일단 금괴를 시세 대로만 팔아도 1568억에, 보석까지 전부 팔면 4-5천억은 건지지 않을까······?’
5천억 원이면, 우리 가족이 평생 죽을 때까지 사치로 부려도 다 못 쓸 돈이었다.
도박 베팅을 한 번에 백억씩 하지 않는 이상.
먹고, 입고, 사고 싶은 명품들을 아무리 쓸어 담아도 다 못 쓸 게 분명했다.
‘물론 다 판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당장 큰돈이 필요할 일은 없으니, 금괴나 보석들은 차근차근 팔아도 된다. 게다가 값비싼 보석들은 하나만 제값 받고 팔아도, 세금까지 다 내고 수백억은 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작년에 세계 보석 경매에서 제일 비싼 값에 팔린 보석이 핑크스타였다.
핑크색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해 59.60캐럿(11.92g)짜리 아주 예쁜 다이아로 만든 게 바로 핑크스타였다.
‘7100만 달러(800억원)에 거래됐으니, 핑크스타와 비슷하거나 더 큰 보석을 팔면 그 이상은 받겠지.’
나는 다이아몬드를 색깔별로 컬렉션으로 가지고 있었다. 큰 것은 모두 60캐럿 이상에다가, 100캐럿이 넘는 보석들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전부 세공된 것들이다.
원석 자체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이계에 있을 때 장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원석에서 깎아 내야 할 부분이 많아서 그것들을 다치고 나면 1/3정도밖에 안 남는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희귀하다고 알려진 핑크, 블루, 레드, 그린, 오렌지 등은 모두 60캐럿 이상 크기로 한 개 이상 무조건 있고, 게다가······.’
나는 방 안에서 앉은 채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손을 뻗었다.
쑤욱.
그러자 허공에서 영롱한 일곱 빛깔 무지갯빛을 띠는 큼지막한 보석이 튀어나왔다.
‘레인보우도 있지.’
레인보우 다이아몬드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색을 인위적으로 첨가한 다이아몬드도 있지만, 그런 짭퉁들 중에서도 무지갯빛은 없다. 게다가 짭퉁은 색도 금방 바래서 별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아르젠···.’
나는 손에 든 무지갯빛 보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가진 보석들 중에 데모스 행성에서 안 가져온 게 몇 개나 되겠느냐만은, 이건 그중에서도 특별한 보석이었다.
내가 이계로 넘어간 후, 30년 차 됐을 때.
오크들을 지배하던 마왕, 오크킹 레가쉬르를 죽이고 얻은 값진 보석이었다.
레가쉬르를 죽일 때,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함께했고 개중엔 아르젠도 있었다.
나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
타당, 탕탕탕.
마왕 레이드에 성공한 후, 나는 성공적으로 데모스 행성에 융합돼 펠리노르에 정착했다.
그곳의 수도인 아르카첸성에서, 나는 황제에게 배정받은 개인 창고 안에서 부시럭거렸다.
저벅, 저벅.
그때 창고 밖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넌 무슨 재물을 그렇게 환장하면서 모으냐?”
보석을 미친 듯이 쟁기는 나를 보며, 펠리노르의 황태자 베네포르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응, 집에 갈때 가져갈 거야. 그러니까 신경꺼~”
“그놈의 집, 집. 맨날 노래를 부르네. 낄낄.”
우리 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전장을 함께 쏘다니며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최초에 이계에 끌려와서 10년간 이리저리 쫒겨다니며 방황할 때, 나를 구해준 건 아르젠이었고 베네포르와는 내 경지가 4서클이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교류했다.
“참으로 독하다, 독해.”
베네포르는 질린다는 듯 팔짱을 끼곤,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군들의 던전에서 얻은 아티팩트와 일반 보석들을 꾸준히 모아나갔다. 선별과 분류를 철저히 해서 아공간 포켓에 차곡차곡 담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나를 향해 베네포르가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떠나고 나면 아르젠은? 아르젠은 어떻게 하고?”
“······.”
보석들을 정리하던 내 동작이, 일순간 뚝 하고 멈춰버렸다.
“······아르젠은, 여기 남아야지. 그녀의 고향인데.”
“글세. 아르젠이 과연 용납할까?”
“나 말고 그녀를 챙겨 줄 사람이야 널렸지. 넌 아르젠을 어떻게 생각하냐?”
내가 말머리를 돌리자, 베네포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 나야 아르젠만 괜찮다면 당연히 땡큐지. 내가 너처럼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찰 놈으로 보이냐?”
녀석히 배를 잡고 낄낄 거리자,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르젠이랑 한 번 잘해봐.”
“너 진심이냐?”
창고 정리를 어느정도 끝마친 나는, 입구를 지나치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난 간다. 수고해라.”
*
“후······.”
나는 상념을 끝내고, 아파트 복도를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구에서보다 6배나 더 오랜 시간 살아왔던 곳이었기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생각이 났다.
‘아무튼 중요한 건 미래지, 과거가 아니잖아······.’
미련이 남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가 선택한 일에 오점은 있을지언정,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됐다.
나는 그렇게 되뇌이며 앞으로의 구상을 이어나갔다.
'일단 힘이 담겨 있지 않은, 일반적인 보석들을 팔고 나면, 그 다음엔 ‘진짜’를 팔자.'
아직 내 사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수천억을 땡기고, 졸부가 돼서 적당히 손을 털 것인가.
아니면, 아주 스케일을 키워서 진짜 재벌이 돼서 끝을 보던가.
둘 중 한 가지였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다각도로 많은 사업을 벌일 수 있지.’
마법이란 게 원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적이었다.
21세기에는 그것을 기술이나 과학의 힘으로 극복해보려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아직도 인대, 관절 관련된 제대로 된 치료약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수준을 알만했다.
어쭙잖은 상술로 닭발 가루나 팔고, 별 효과도 없는 식이 유황 같은 걸 비싸게 팔아먹는 게 현재의 의학 수준이었다.
내가 만든 의약들을 시중에 풀어서 시장 개척만 되면, 전 세계 수억 명의 인대 환자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구매할 거다. 추정 판매량만 연간 수십조가 넘어갈 거고.
나는 인류가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한 부분을 밝혀내서 충분히 오버 테크 놀로지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래, 앞으로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아무런 거리낄 게 없단 소리다.’
지금 당장은 금괴를 좀 더 팔아서 우선적으로 집을 사고 싶었다. 빨리 좁아터진 이 15평짜리 전셋집을 옮기고 싶었다.
‘서울로 이사 가자. 40평짜리 정도면 충분하겠지.’
청소도 부모님을 시키지 말고, 가정부를 둘 생각이다. 앞으로 그럴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리고 부모님들께 각자 차도 한 대씩 선물해드리고, 나도 하나 살 거다. 구질구질하게 뚜벅이로 살아갈 생각은 없다.
돈만 있으면 살기 편한 게 바로 대한민국이다.
‘빨리 신분 복구가 돼야 할 텐데······.’
나는 앞으로 펼쳐갈 대략적인 계획들을 설립한 후, 집으로 돌아와 거실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띠융!
마력으로 TV의 전원을 누르자 거실 21인치 브라운관 TV가 저절로 켜졌다.
슝!
리모컨 또한 자석처럼 내 손에 따라붙었다. 마력으로 채널과 음량을 조절해도 되지만, 역시 티비를 볼 때는 누워서 리모컨으로 까딱까딱하는 맛이 있어야 한다.
-뉴스 속보입니다.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서 2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군포시에서 활동하는 조직 폭력배 조직인 백석파 조직원들이었는데요. 구름도 없이 쨍쨍한 맑은 날에 아무런 징후도 없이 떨어진 벼락에 맞고 죽었습니다. 경찰은 이들이 자연재해로 인해 사망한 걸로······.
“음······.”
백 년 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예능이나 좀 보려고 틀었는데, 꽤나 불편한 소식이 브라운관을 통해 방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군포에서 두 가지 자연재해가 같은 날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게 굉장히 수상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같은 날 같은 동네인 군포시 금정동에서 갑작스러운 태풍이 생겨나 가게 1곳을 박살 내고 1명의 인명피해까지 냈었는데요. 가게 주인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낙뢰를 맞고 죽은 백석파 조직 두목이었다고 경찰 관계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놈들은 한 패였다.
‘그런데 메인 뉴스에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나운서가 꽤나 비장한 목소리로, 비중 있게 사고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자연재해로 꾸며놓긴 했는데, 너무 허술했나 보다.
‘그날 우연히, 그것도 동시에 벌인 일이니···. 게다가 일반인들이 보기엔 초자연적인 현상이니까 난리가 날 수도 있겠네.’
나는 어제 볼일을 보면서 혜은이 명의로 임시로 개통한 선불폰을 꺼내 들었다.
내 신분이 복구되면 그대로 쓸려고, 핸드폰도 150만 원 주고 최신 폰으로 샀다.
휘익, 휙.
잠금화면을 해제하고,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네이버 어플을 눌렀다.
그런데······.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순위
1위 군포 제우스.
2위 군포 가미카제
3위 백석파
4위 주한보석방
5위 갓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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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일이 내 생각보다 너무 커져 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