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7.변신
“끄으윽······.”
유진광은 엎어진 채 양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입에는 게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아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준혁을 쳐다보았다.
“무리하셨나 보네요. 왠지 악수를 과하게 하시더니만···. 앞으로는 본인의 역량에 맞게 악수를 하십시오. 그럼 이만.”
이준혁은 그대로 몸을 돌리고 샵을 빠져나갔다. 아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빠아ㅡ!”
그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이준혁의 동생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저 사람 왜 저래?”
그녀는 오빠의 옆에 찰싹 붙어서 팔짱을 끼곤 그렇게 물었다.
“몰라. 어디 아픈가 보지.”
“또 마법 썼어?”
“얘가, 또 헛소리하네. 아주 이상한 소리 하는데 재미 들렸나?”
“키키키.”
아리는 멍한 표정에서 순간 번뜩하며, 눈을 크게 떴다.
‘마법?’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전 ‘마법’이라고 했다.
‘분명 이상했어······.’
원래대로라면 이준혁의 키가 아무리 커도, 덩치가 옆으로 더 벌어진 유진광의 힘이 객관적으로 더 세 보였다. 이준혁은 너무 말랐고, 유진광은 살집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완전 정반대였다.
‘힘으로 앞서다 못해, 완전히 압도했어······.’
체격의 차이를 떠나서, 같은 성인남성끼리 그렇게 압도하려면 최소한 운동선수 이상은 돼야 했다.
하지만, 아리는 이준혁의 몸에서 운동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통뼈 느낌은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로 마법을 쓴 건 아닐까?’
이건 분명 힘으로 떨쳐낸 게 아니다. 유진광은 어떤 충격에 갑작스럽게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그건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단,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인 것 같았다.
“끄으응······.”
아리가 상념에 빠져있던 그 시각.
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던 유진광이, 아직도 침을 질질 흘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이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세요. 그리고 대동그룹에 전화해서 빨리 차 가지고 와서 유진광씨를 데려가라고 하세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아리가 소리쳤다.
“네, 사장님.”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제야 유진광을 둘러싸고 질질 끌고 나갔다. 그동안 아리가 직접적으로 명령하기 전까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기하고 있던 그들이다.
“으으윽······.”
유진광은 엎어진 채로 경호원들에게 어깨가 붙잡혀 개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저벅저벅.
아리는 끌려나가는 유진광을 혐오스럽고 한심한 눈빛으로 일별한 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쾅!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라니. 나도 참,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아리는 사장실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준혁······.”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이상한 사람이다.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4억8천만 원짜리 금괴를 팔러온 것도 그렇고.
겉모습은 허술해 보였지만, 안에 들어찬 내면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아리는 최대한 그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만족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조건을 양보했다.
“아···, 아···. 모르겠다.”
아리는 자신이 왜 그렇게 이준혁에게 신경 쓰는지, 본인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얘기한 보물섬 이야기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다. 하지만, 이준혁이란 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 때문에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키는 멀대같이 컸지만, 그냥 평범한 얼굴이었다. 꾸미면 훈남 정도?
그녀의 주위에 이준혁보다 더 키 크고, 연예인처럼 잘생긴 사람은 수두룩 빽빽하게 많았다. 그런 남자들이 한 번만 사귀어달라고 퇴근할 때마다 매일 밖에 줄 서 있었다. 꽃까지 사 들고.
물론 얼굴도 못생겼고, 재벌도 아닌 졸부 2세 정도밖에 안 되는 유진광처럼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미치광이도 종종 있었다.
‘이상하네, 정말······.’
아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계속 서성거렸다. 이미 이준혁의 전화번호는 저장해놨다.
아니, 그는 지금 핸드폰이 없어서 여동생 전화번호를 대신 남겨주고 갔다.
카카오톡을 실행해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아까 전 동생으로 보였던 여자의 얼굴이 프로필에 걸려 있었다.
아리는 계속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이건 비즈니스 때문이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
유진광을 참교육시키고, 동생과 함께 밖으로 나오니···.
“타시죠.”
검은색 정장을 입은, 붉은색 와인 빛깔로 머리를 염색한 예쁜 여자가 차 문을 열어줬다.
“우와, 오빠 이거 BMW 520d 아니야?”
“···몰라, 그런 거.”
나는 혜은이의 대답을 얼버무린 후, 앞 좌석에 탑승했다. 돈가방은 혜은이가 탄 뒷좌석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게 그 유명한 BMW 차구나······.’
BMW, BMW. 귀로만 주야장천 들어왔던 유명 해외 자동차 브랜드. 게다가 난생처음으로 BMW 520d이란 중형 세단에 직접 탑승해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혜은이가 알려줘서 차 품명을 알았다. 그 전까진 520인지 250인지 전혀 몰랐다.
‘에스코트까지 해주다니, 참으로 별일이네······.’
물론 크게 오해할만한 일은 아니다.
불법적으로 큰돈이 오고 갔으니,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도 있는 거니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
‘아르젠······. 아니, 아리······.’
이제 아르젠은 없다. 아리만 있을 뿐이다.
뭔가 어색해도 적응을 해야 한다. 앞으로 그녀와 자주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마다 오늘처럼 놀라거나, 어색하게 굴어선 안 된다.
딱 봐도 촉이 좋은 여자다.
한 번은 그러려니 넘어가도, 두 번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의심을 하겠지.
‘휴······.’
다행히 한고비는 넘겼다. 백미러로 조심스럽게 뒷자석에 쌓인 돈가방을 쳐다보니, 마음속이 저절로 흐뭇해진다.
저 돈이 진짜 내 돈이라니?
가난했던 시절엔 평생 억 단위 돈은 만져보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이계에 끌려간 게 나에겐 전화위복이 된 건가?’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해서 평범한 직장에 취직했었다면, 저렇게 큰돈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리 같은 미인도 만나지 못했겠지······.’
아리와 아르젠이 동급이라 친다면, 이 세상에 아리보다 예쁜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장담한다.
아르젠 또한 미모로 데모스 행성에서 따라갈 자가 없었다.
‘앞으로가 중요하지.’
이렇게 살 떨리는 외줄 타기를 몇 번 더 거쳐야, 진짜 돈 걱정이 사라질 터였다.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어, 저기 근데 에트로 병원으로 네비 안 찍으셨나요?”
룰루랄라 BMW 차체 내부를 신기하게 구경하던 혜은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해사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백화점부터 들리시죠. 혹시 카톡 안 왔던가요?”
“네? 카톡이요?”
혜은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께서 무슨 언질이라도 하셨나요?”
“직접 읽어보시라고 하던데요.”
결국 혜은이가 스마트폰을 꺼내 카톡을 확인했다.
-최아리 : 준혁씨.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는데 옷이 그게 뭐예요. 병원 가기 전에 백화점에 들려서 옷이랑 환자에게 필요한 물품들 좀 사가지고 가세요.
“어, 음······.”
혜은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오빠. 아까 전에 이 여자랑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가더니 대체 무슨 얘기 했어?”
“어두침침하다니. 완전 하얀 방이었는데.”
“그러니까 그 방에서 뭐했냐고?”
혜은이는 요상한 눈빛으로 내 아래위를 훑으며 계속 추궁했다. 어디 립스틱 자국이 묻은 데 없나 샅샅이 훑어보는 표정이었다.
“걍 금괴 팔러 갔으니까, 금괴나 팔았지.”
“금괴만 팔았는데 이 여자가 우리 아버지 아픈 건 어떻게 알고 옷은 또 왜 사줘? 오빠, 솔직히 말해봐 이 여자랑 무슨 사이야?”
혜은이는 단단히 짚고 넘어가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씩씩거렸다. 마치 ‘나 몰래 감히 연애를 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흐흐······.”
운전석에 앉은 여자 기사는 혼자 킥킥거리며, 여유롭게 드라이빙을 했다. 운전 자주 해본 솜씨 같았다. 승차감이 아주 편안했다.
“나도 몰라. 고마우니까 선물해주는 모양이지.”
“아까 방에 들어가서 단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
“금괴 파는 얘기했다니까.”
“그거 말고는?”
“없어.”
“또또또, 것짓말 친다.”
혜은이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뭐가 있어야 얘기를 하지. 그 여자랑 나도 둘 다 거래 얘기 밖에 안 했는데, 무슨 나올 건덕지가 있나?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여서 더 억울했다.
그렇게 10분을 달려 군포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라떼백화점에 도착했다.
“우와······.”
주차장에서 내려 혜은이와 나는 양복을 입은 기사를 졸졸 따라갔다. 미리 예약을 해뒀던지, 정해진 루트대로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일단 양복매장부터 가시죠.”
“네.”
나는 얌전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동했다. 혜은이는 뭘 좀 구경한다고 잠시 찢어졌다. 백화점에 오니, 눈 돌아갈 데가 많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남성 정장 브랜드가 모여 있는 4층으로 이동했다.
“정장이랑 구두는 맨잇슈트로 하고, 넥타이는 닥스로 할까요?”
“네, 뭐 아무거나······.”
사실 33년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정장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이계로 끌려갔던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고, 거기서 100년을 구르고··· 그러니까 지구의 시간으로 15년 만에 돌아왔다.
복귀한 지 하루 밖에 안 됐으니,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예전부터 명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옷을 사도 옥션 같은 곳에서 보세로 오천 원, 만 원 하는 의류들을 인터넷으로 싸게 사서 입었다.
지금 입은 옷도 후드티는 17000원짜리고, 청바지는 만 원짜리였다.
“사이즈가 얼마세요?”
정장을 소개하러 온 점원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어··· 음······. M사이즈?”
“네???”
“죄송합니다.”
“아녜요. 괜찮아요.”
점원은 나 같은 손님을 많이 겪어봤던지, 싹싹하게 웃으며 치수를 재줬다. 멍청하게 대응했던 게 오히려 베스트 판단이었던지, 점원은 자신이 알아서 착착 치수를 재고 그에 맞는 옷을 가져왔다.
나는 그녀가 가져온 정장들을 드레스룸에서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리고 구두도 검은색 광택이 나는 심플하고 가벼운 걸로 골라서 바로 신었다.
“와아······. 정말 멋지시네요.”
점원이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인사치레를 했다. 근데 빈말로 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정말 표정이 뻑간 표정이다.
“고맙습니다.”
꾸벅.
나는 점원과 따라온 기사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정말 고마웠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나 신경 써 주다니······.
이계에서는 몰라도, 한국에선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었다.
“결제해주세요.”
같이 따라왔던 기사가 신용카드를 꺼내더니, 곧바로 계산을 시작했다. 아, 이거 옆에서 지켜보기 너무 뻘쭘한데······. 화장실이라도 갔다 올까······?
아직 그렇게 친근한 사이도 아니고, 친근한 사이라고 해도 이렇게 비싼 선물을 좋다고 덥석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까 전, 은근슬쩍 가격표를 봤었는데······. 제일 싼게 40몇만 원이었고, 비싼 건 100만 원도 훌쩍 넘어 보였다.
눈치 봐서 싼 걸 고르려고 하니, 기사가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랐다.
“자, 이제 병원으로 가시죠.”
기사는 내 아래위를 훑어보며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치켜올렸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러지? 괜히 쑥스럽게······.
마침 매장을 나오면서 구경을 마치고 온 혜은이와 마주쳤다.
“어, 누구세요?”
“미친, 너까지 장난하지마.”
“아니, 진짜 우리 오빠 맞아? 와아···. 역시 옷이 날개네. 날개야.”
“나중에 너도 하나 사줄게.”
“진짜지? 약속했다.”
“일단 빨리 나가자. 아버지 많이 기다리시겠다.”
“응.”
기사는 나와 혜은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후에, 혼자서 돈 가방을 가지고 직접 집에 옮겨준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차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이동했다.
100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려고 하니, 미친 듯이 가슴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