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생존자-32화 (32/50)
  • 2장. 아슬란을 만나다.

    거창한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니었 다. 검은색의 얇은 갑옷을 입고 얼 굴이 보이지 않게 투구를 쓰는 것으 로 끝이었다.

    준비는 자투란이 다 해 놨다.

    “아저씨 이 방을 나가는 순간부터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

    “그리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세요.”

    “누가 시비를 걸어?”

    “가끔 있어요. 제가 항상 옆에 있 을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큰 문제없다고 한 것치고 문제없었 던 적은 없었다. 켈빈은 이성진의 외형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 날이 50cm 정도 되는 짧은 검 2자루를 줬다.

    “브리더는 쌍검을 사용해요.”

    2자루의 검을 받았다. 그리고 검이 가볍다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에 차 기 전에 검을 뽑았다. 푸른빛이 나 는 검이었다.

    “오호. 무게를 줄이는 마법에 더 날카롭게 하는 마법까지 걸린 마법 도구네.”

    “네. 강철도 베어 버릴 정도로 강 하고 날카로워요.”

    이 정도 마법 도구면 마나를 실었 을 때는 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카 반 왕국 기사가 사용하는 마법 방패 도 쉽게 자를 것 같았다.

    “갑옷도 보통 갑옷이 아닌 것 같은 데?”

    쇠로 만든 갑옷이 천으로 만든 옷 을 입은 것처럼 가볍다. 그리고 유 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켈빈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주려고 제가 만든 겁니 다.”

    “나 주려고? 브리더 것이 아니고?”

    “네. 사실 그 검도 브리더 것이 아 니에요.”

    켈빈이 마법술사가 되려고 마음먹 은 가장 큰 이유는 이성진이었다. 마법술사가 되어 이성진을 위한 마 법 도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했다. 마법 술사가 되었을 때는 이성진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성진을 추억하며 갑옷과 검을 만들었다.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만 든 갑옷이에요.”

    켈빈이 그냥 자신이 가진 모든 능 력을 동원해 만든 갑옷이라고 말하 자 옆에 있던 자투란이 고개를 흔들

    며 말했다.

    “그 갑옷 만드느라 스승님이 가진 재산 대부분을 사용했습니다.”

    “자투란!”

    켈빈이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자투란은 멈추지 않았다.

    “엘 파나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알 려진 아크리움 금속에 마나석 가루 를 입힌 다음 그 위에 다시 강철로 씌운 겁니다.”

    아크리움 금속이라는 말에 놀랐다. 아크리움 금속은 그냥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마나를 흡수하는 특성도 가졌다.

    마법은 마나로 만드는 것이다. 아 크리움 금속을 섞어 마법 방어구를 만든다.

    아크리움 금속이 섞인 양에 따라 방어할 수 있는 마법도 다르다.

    “재산 대부분을 사용했다면 이 갑 옷 전체가 아크리움인 거야?”

    켈빈은 이성진의 말에 머리를 긁적 였다.

    “얇게 펴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아 직 완성된 것은 아니에요.”

    얇게 펴서 만들었다 해도 갑옷 전 체가 아크리움이다. 왕족도 입기 힘 든 옷이었다. 아크리움 금속은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

    니다.

    “이번에는 그냥 입으시고 제가 완 성한 다음 드릴게요.”

    “아크리움 금속으로 만든 갑옷에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냐?”

    마나를 흡수하고 강철보다 더 단단 하다. 갑옷이 아닌 옷을 입은 듯 만 든 것도 대단했다.

    이성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기 만 하는 켈빈 대신 자투란이 또 말 했다.

    “그 비싼 마나석을 가루 내어 아크 리움에 입힌 이유가 있습니다. 마나 를 저장해 마르지 않는 마나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연구의 막바지 단계

    만 남았습니다.”

    켈빈은 한숨을 쉬며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자투란을 쳐다봤다. 그 러자 자투란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 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10년 가까이 준비한 것을 드리는 건데 그 정도는 생색내셔도 됩니다.”

    “자투란! 내가 아저씨에게 칭찬받 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야!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 지!”

    급기야 화를 냈다. 켈빈이 화를 내 자 자투란은 이성진 뒤로 급하게 피 했다. 진짜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쪽으로 나와!”

    자투란은 켈빈이 이성진을 위해 노 력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 음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성진도 자 투란의 마음을 알았다.

    그리고 켈빈이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도 알았다. 어린아이였을 때 도 아닌 척했던 적이 많았다.

    이성진은 켈빈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 팔을 들어 켈빈의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머리 함부로 만지지 말라니까요!” 이성진은 켈빈의 말과 다른 모습에 웃으며 계속 머리를 만졌다. 켈빈은

    지금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이성진 의 손을 쳐 내지 않고 있었다.

    “고맙다. 나를 위해 10년이나 넘게 준비했다니……. 이거 감동인데?”

    켈빈은 이성진의 말에 더 기분 좋 은 얼굴을 했다. 칭찬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진에게 칭 찬받는 것은 좋았다.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쭈욱 이성진에게 도움을 주고 칭찬을 받고 싶었을지도 몰랐 다.

    이성진에게 칭찬받자 알 수 있었 다.

    “이러다가 늦겠어요. 자투란은 이 곳에 있어.”

    “네? 저도 가겠습니다.”

    자투란은 무조건 따라간다는 말투 였다.

    “지하 연구실에 크롤링 연구 정리 해 놨어? 마나석을 연결해 다중 마 법진을 가동하는 연구는? 마법 등의 마나 효율 개선 연구……

    “안 갑니다. 안 가요!”

    자투란은 일을 더 시킬 것 같은 켈빈의 말을 끊으며 두 손을 들었 다.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어. 갔다 올게.”

    켈빈은 자투란에게 말하고는 이성 진과 함께 방을 나갔다. 자투란은

    같이 못 가서 안타깝지만 그래도 저 택 입구까지는 따라 나갔다.

    저택 입구에는 이성진이 어제 타고 온 마차가 아닌 다른 마차가 준비되 어 있었다.

    켈빈은 시종이 마차 문을 열어 주 자 먼저 탔다. 이성진은 지금 개인 경호 기사인 브리더이기 때문에 나 중에 탔다.

    곧 마차는 출발해 내성으로 향했 다. 그러자 켈빈이 입을 열었다.

    “이 마차 역시 안에서 하는 말은 밖에서 들을 수 없어요.”

    내성까지 10분 정도 걸린다. 그동 안 이성진이 심심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말했다.

    “켈빈 네가 인정받는 마법술사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네.”

    켈빈이 갑옷과 검을 준비해 준 것 보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 때문이었 다. 이 마차는 카반 왕국에서도 고 위 관료들이나 타는 마차였다.

    장관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 아저씨 덕분이죠.”

    켈빈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투구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슨 말만 하면 다 내 덕분이라고 하냐? 켈빈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런 결과를 얻은 건데.”

    “물론 제가 노력한 것도 있어요. 하지만 아저씨를 만나고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 다면 마법술사 켈빈도 없었어요. 저 는 한 번도 아저씨를 잊어 본 적이 없었어요.”

    얼굴이 안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 기를 잘한 것 같았다. 주위에 아무 도 없고 누구도 들을 수 없어서 그 런지 켈빈은 자신의 마음을 더 표현 하고 있었다. 감격까지는 아니어도 감동은 받았다.

    “어쨌든 모든 것이 잘되었으면 좋 겠다.”

    진심이었다. 켈빈이 마법술사가 되 어 지구까지 온 것은 엘 파나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 다. 신분제를 깨고 누구나 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어떻게 보면 대견했다. 고위 귀족 이 되었어도 어려운 과거를 잊지 않 았다. 대부분 켈빈같이 성공하면 그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는 데.

    “아저씨가 오셨으니까 잘될 겁니 다.”

    “또 나냐?”

    켈빈은 믿는다는 편안한 미소를 지 었다.

    “한 가지 약속 빼고는 다 지키셨으 니까요. 아니 지금이라도 만났으니 약속은 지켜진 건가요?”

    켈빈은 다시 보자는 이성진의 말을 믿고 기다렸었다. 길어도 몇 개월이 면 되겠지 하고 기다렸었다.

    켈빈의 마지막 말에 이성진도 무슨 약속인지 알았다.

    “많이 기다렸냐?”

    “네. 아주 많이요.”

    “30살 넘은 놈이 아직 애같냐.”

    “아저씨 앞에서는 30살이 아니라

    50살이 되어도 엘 파나에서 만났던 꼬맹이 케빈이 된 것 같은 기분일 것 같아요.”

    켈빈은 엘 파나에서의 기억을 상상 하는지 눈이 아련해졌다. 그리고 행 복한 미소를 지었다. 켈빈에게 있어 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라면 부모님 이외에 이성진을 만났던 순 간이었다.

    하지만 켈빈은 곧 카반 왕국의 마 법술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시종이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개인 경호 기사인 이 성진이 먼저 내렸다. 지금부터는 완

    전히 켈빈 마법술사를 경호하는 기 사로 행동해야 했다.

    먼저 내려 주변을 스윽 살피며 켈 빈이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

    마차에서 나온 켈빈의 눈빛과 표정 에는 마차 안에서 보이던 정겨움은 없었다. 안경 뒤로 날카로운 눈빛과 ‘나 깐깐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굳은 표정이었다.

    “가자!”

    켈빈이 이성진에게 말하며 앞장섰 다. 경호는 원래 대각선 방향 한 발 자국 정도 떨어져서 한다.

    켈빈이 앞장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켈빈 뒤를 따라가며 눈만 움직여

    내성의 모습을 머리에 담았다. 켈빈 의 지위 때문인지 아무 검문검색 없 이 내성으로 들어온 것이 아쉬웠다.

    입구부터 잘 봐 뒀어야 했다. 나갈 때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켈빈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나 내성에서 일하는 시종 들이 켈빈을 보면 모두 머리를 숙이 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곳의 모든 마법 도구를 책임지는 켈빈 마법술사의 지위는 아슬란 공 왕 다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장과 장군들의 지위가 더 높 아도 켈빈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켈빈에게 밉보이면 필요한 마법 도

    구를 제때에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 길까 우려해서였다.

    켈빈은 일부러 평소보다 천천히 걸 으며 내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평소에도 내성에 설치된 마법 도구 와 마법진을 살펴보기 때문에 켈빈 이 이성진과 함께 내성을 돌아다녀 도 괜찮았다.

    병사나 시종들이 없는 곳에서는 켈 빈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와 여기 경보를 울리는 마법 도구가 설치되어 있어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성진은 알 수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마나를 이

    용해 마법 도구가 설치된 곳을 알아 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야 해서 듣고만 있었다.

    “이곳은 아슬란 공왕이 휴식하러 오는 정원입니다. 꽤 많은 마법 도 구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요.”

    켈빈은 이성진을 내성 깊숙한 곳으 로 데리고 갔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비를 서 는 기사나 하다못해 병사라도 있어 야 했다.

    이성진의 궁금함을 아는지 켈빈이 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 슬란 공왕과 저뿐이에요. 그래서 경

    비를 할 필요가 없어요.”

    정원의 모든 마법 도구와 마법진을 켈빈이 만들어 설치했다. 유지 보수 를 위해서도 켈빈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성진을 이곳을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다.

    “아슬란 공왕이 이곳에 휴식하러 오면 최소 2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어요.”

    마법 도구와 마법진을 믿고 혼자 휴식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암살 당하면 최소 2시간 동안은 그 누구 도 모른다는 이야기와 같다.

    켈빈이 입구에 설치된 마법 인식

    장치에 손을 댔다.

    이성진과 함께 들어가려면 보안을 해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켈빈은 보안을 해제할 수 없었다. 이성진이 팔을 잡았기 때문 이었다.

    “왜 그러세요?”

    이성진은 켈빈의 팔을 놓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켈빈은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이성진은 손가락 하나를 폈 다가 접은 다음 정원 안을 가리켰 다. 그러자 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 파나에서 이성진에게 배운 수신 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원 안에 누군가 있다는 신호였 다. 아슬란 공왕만 사용하는 정원 안에 누군가 있다. 그렇다면 한 명 뿐이다.

    켈빈은 조용히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성진 이 켈빈 앞을 막아섰다.

    저 앞에서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 3명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켈빈 마법술사, 여기 있었군요. 그 렇지 않아도 내성에 들어왔다는 소 리를 듣고 찾았는데.”

    기사 3명 중 가운데 있는 기사가 말했다.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기사 였다. 이성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마이크 단장이 저를 왜 찾으셨습 니까?”

    마이크 드 타란 백작이자 아슬란 공왕의 친위 기사단장이었다.

    “왜긴요. 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켈빈 마법술사뿐이니.”

    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아 슬란 공왕에게 전할 말이 있는 경우 켈빈을 찾아와 부탁했다.

    “아슬란 공왕 전하께 전할 말이라 도 있으신 겁니까?”

    “전할 말이 있다기보다는 2시간이 넘으셨는데 안 나오셔서요.”

    “가끔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가끔 있는 일이어도 제가 지켜야

    할 분이시니 조금만 이상해도 불안 해서요.”

    이성진은 정원 안에서 아슬란이 나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아 슬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안에서까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네. 마이크!”

    이성진은 살짝 켈빈의 뒤로 빠지며 힐끗 아슬란을 쳐다봤다. 엘 파나에 서 봤던 것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하긴 15년 전만 해도 아슬란은 43 살이었다. 지금은 58살이다.

    그래도 꾸준히 단련했는지 몸은 좋 아 보였다.

    “아슬란 공왕 전하를 뵙습니다.”

    “켈빈! 매일 보면서 이런 인사는 할 필요가 없다니까!”

    아슬란 공왕은 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슬란 공왕처럼 좋은 주군은 없다. 자기 사람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해 준다.

    부하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슬란 공왕이 정해 놓은 선 을 넘어갈 때는 피도 눈물도 없었 다.

    “그렇지 않아도 마이크하고 켈빈에 게 따로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왔어. 켈빈! 잠시 마이크를 정원에 들어가 게 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아슬란의 부탁 같은 명령에 켈빈은 정원 입구로 갔다. 마이크 기사단장 은 켈빈 옆으로 가서 켈빈이 시키는 대로 손을 마법 보안 장치에 댔다.

    “됐습니다.”

    “그래. 마이크! 켈빈 따라 들어와.” 켈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성진 때문이었다. 개인 경호 기사를 정원 안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

    “켈빈! 뭐 하나!”

    “네. 공왕 전하!”

    켈빈은 이성진에게 조금만 기다리 는 눈빛을 보내고 아슬란을 따라 정 원으로 들어갔다.

    켈빈과 아슬란 공왕 그리고 마이크 기사단장이 정원 안으로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성진 앞에 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

    마이크 기사단장과 함께 온 기사들 이었다.

    “어이! 말 못 하는 반쪽 기사!”

    그리고 익숙하게 팔을 들어 이성진 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성진의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어느새 한 발자국 뒤로 가 있었다.

    “뭐야! 너 이 병신 움직이는 거 봤 어?”

    이성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기

    사는 옆의 동료에게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안 움직였어.”

    잠시 한눈판 사이에 이성진이 소리 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못 봤다. 그 리고 그들은 켈빈의 개인 경호 기사 인 브리더의 실력을 인정 안 했다.

    “너 요즘 훈련 열심히 안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분명 내 손을 피했어. 네 가 잡아 봐.”

    다른 기사는 피식 웃으며 이성진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어?”

    “어?”

    다른 기사가 손을 올리는 동시에 다른 한 명도 이성진의 어깨를 잡으 려 했다. 원래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 다. 그런데 두 명 다 이성진의 어깨 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이 새끼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마나까지 사용 해 이성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성진 은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덤비는 기사들이 한심했다.

    아슬란 공왕 밑에 이런 친위 기사 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엘 파나에서는 이런 놈들이 없었

    다. 아마도 지구에 오기 위해 기사 의 숫자만 채우느라 급급했던 것 같 았다.

    “어딜 피해!”

    마나까지 사용해 덤비는 놈들을 상 대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피했다. 계속 못 잡으면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텐데 포기하지 않았다.

    바보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 성진의 생각이었다.

    평소 브리더는 켈빈이 없을 때는 친위 기사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가만 히 있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 았다.

    문제를 일으켜 켈빈을 곤란하게 만

    들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친위 기사들 사이에 브리더 는 호구였다. 켈빈도 그 사실을 알 고 가만히 있지 말라고 했다. 하지 만 브리더는 켈빈을 보호하는 경우 에만 검을 뽑겠다고 했다.

    “무슨 생각으로 오늘은 저항하나 모르겠는데 그러다가 검을 뽑으면 다친다!”

    협박하는 모양새가 완전히 기사가 아닌 양아치였다. 그리고 정원 안쪽 에서 아슬란 공왕과 켈빈 그리고 마 이크 기사단장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협박하고 있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행

    동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겉으로는 켈 빈을 대우해도 속으로는 무시하는 짓이었다. 아슬란도 말릴 생각이 없 어 보였다. 아슬란이 말릴 생각이 없으니 마이크 기사단장도 가만히 있었다.

    스윽!

    친위 기사가 검을 뽑기 전에 먼저 뽑았다.

    “하! 이 병신이 검을 뽑아? 죽을 수 있다!”

    친위 기사 두 명도 검을 뽑았다. 정원 안에 있는 켈빈은 무표정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속으로 웃었다. 감

    히 지금 누구에게 덤비려고 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으로 생각했다.

    아슬란은 켈빈이 가만히 있자 의외 라고 생각했다.

    실력이 뛰어난 경호 기사라 해도 마나를 사용하고 마법 도구로 무장 한 친위 기사 2명을 상대하기는 힘 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호 기사라 해 봤자 경호 대상이 도망가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존재 이상은 아니라는 인식도 강했다.

    친위 기사 두 명은 익숙하게 좌우 로 흩어져 이성진을 포위했다. 그리 고 바로 이성진을 향해 움직였다.

    오른쪽은 다리를 노리고 왼쪽은 팔

    을 노렸다. 친위 기사도 이성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단지 겁만 줘서 버릇만 고쳐 줄 생각이었다.

    모든 마법 도구를 책임지는 켈빈의 경호 기사를 죽였다가는 뒷감당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까강

    “윽!”

    “으윽!”

    친위 기사 두 명은 자신의 검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 뒤로 튕겨 나가 는 것을 느꼈다. 이성진이 정확하게 검의 중심점을 쳐냈다는 것을 알았 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충격을 받을 수 없었다.

    “마법 도구냐?”

    친위 기사는 이성진이 마법검의 도 움을 받아 빠르게 쳐낼 수 있었다고 오해했다.

    “그 갑옷도 마법 도구겠구나. 어쩐

    지 잘 피한다 싶었다!”

    급기야는 마법 도구인 갑옷 때문에 이성진이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 다.

    그런 생각을 하는 친위 기사를 보 면서 아슬란은 마이크 기사단장을 짜증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이크 기사단장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마법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 은 것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얕본다면 기사가 아 니다.

    상대방을 경시했기 때문에 더 빨리

    죽는다. 혼자만 죽으면 다행이다. 옆 의 동료까지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 이 높았다.

    마이크 기사단장은 이 싸움의 결과 가 어떻게 나오든 두 명의 친위 기 사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두 명이 친위 기사는 다시 움직였 다. 이번에는 이성진의 앞뒤로 포위 했다. 이성진의 앞에 선 기사가 먼 저 움직였다.

    검을 찌르면서 한쪽 팔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팔에 찬 마법 방패를 이용하려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있 다가 마나를 집어넣는 순간 반투명

    한 방패가 나타난다.

    아니나 다를까 검을 찌르는 것은 속임수였다. 마법 방패를 만들어 이 성진을 뒤로 밀치려 했다. 뒤에 있 던 친위 기사는 이성진 근처까지 접 근해 있었다.

    피하려면 옆으로 피하는 수밖에 없 다. 하지만 옆으로 피하는 것은 친 위 기사가 원하는 것이다.

    켈빈이 만들어 준 갑옷의 방어력을 믿고 버텨도 된다. 그러면 이놈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 의 실력이 낮다는 것을.

    이성진이 빙그르르 돌면서 검을 휘 둘렀다.

    빛이 번쩍했다.

    “커헉!”

    “큭!”

    뒤에서 공격하던 친위 기사의 검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땅에 떨어 졌다. 동시에 마나 충격을 받아 피 를 토하고 주저앉았다.

    앞에서 공격하던 친위 기사는 마법 방패가 깨지는 충격 때문에 뒤로 밀 려났다.

    두 명의 친위 기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검을 날 리고 마법 방패를 깰 수는 없었다.

    이성진이 마나의 운용을 잘하는 동

    시에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지 않 고서는 말이 안 된다.

    이성진이 더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검을 놓친 친위 기사는 반 대편에 있는 친위 기사에게 눈짓했 다. 눈짓을 본 앞에 있는 친위 기사 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진을 진짜 죽일 생각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절대 피 할 수 없는 공격이 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 도망갈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친위 기사의 갑옷 역시 마법 도구 다. 갑옷을 원하는 방향으로 폭발시 킬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조각으

    로 나누어져 날아간다.

    그냥 갑옷 조각이 아니다. 마법 도 구인 갑옷에 박은 마나석의 마나와 친위 기사의 마나를 더한 갑옷 조각 이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폭발해 날아오 는 무수히 많은 갑옷 조각을 이성진 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고 어지간한 마법 도구 갑옷으로 막 을 수 없다.

    하지만 두 명의 친위 기사는 갑옷 을 폭발시킬 수 없었다.

    “그만!”

    두 명의 친위 기사가 갑옷을 폭발 시키려 하는 것을 눈치챈 마이크 기

    사단장이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실력이 모자 란 것을 인정하지도 않은 것도 모자 라 같은 편에게 최후의 수단을 사용 하려 하다니!”

    “단장님!”

    친위 기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마이크 기사단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멍청한 것들이 아슬란 공왕 전하 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었느 냐!”

    마이크 기사단장의 말에 두 명의 친위 기사는 그제야 실수한 것을 알 았다.

    “쯧! 이래서 귀족 가문의 망나니를 친위 기사에 넣지 않으려고 한 거 야! 마이크!”

    “죄송합니다. 공왕 전하!”

    “죄송해야지. 친위 기사단 내부 문 제는 마이크 자네가 잘 알아서 할 거라고 믿고 맡겼는데……

    마이크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이고 두 명의 친위 기사에게 이를 갈았 다. 엘 파나에서 친한 귀족의 아들 들이다. 어차피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서 아슬란을 따라 지구에 왔 다. 그래도 친한 귀족의 아들들이라 아슬란 공왕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

    게 해 주려고 신경 썼다.

    그런데 결과는 아슬란 공왕의 꾸중 이었다.

    “저놈들 데리고 가게나. 그리고 최 전방 기사로 좌천시키고.”

    “알겠습니다. 공왕 전하!”

    마이크 기사단장은 아슬란 공왕에 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네놈들은 따라와라.”

    두 명의 친위 기사는 얼굴이 하얗 게 질려서 마이크 기사단장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아슬란 공왕이 있는 곳에서 너무하다고 항명했다가 는 최전방 기사로 좌천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명의 친위 기사는 마이크 기사 단장을 따라가면서 나중에 꼭 복수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최전방 기사로 있다가 다시 친위 기사로 올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 기사단장이 끝까지 자신들 을 챙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가져다준 돈이 얼마인데.

    마이크 기사단장과 두 명의 친위 기사가 떠나자 아슬란은 켈빈이 아 닌 이성진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이거 미안하네.”

    이성진은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그러자 켈빈이 당황하며 변명했다.

    “브리더는 말을 못 합니다.”

    “하하. 알고 있네. 몇 년이나 봤는 데 그것을 모를까! 켈빈 오늘 좀 이 상한데?”

    아슬란은 기분 좋게 웃은 다음 이 성진에게 말했다.

    “브리더 자네 혹시 내 친위 기사가 될 생각 없나?”

    켈빈은 아슬란의 말에 깜짝 놀랐 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슬란 공왕 전하! 브리더는 제 개인 경호 기사입니다.”

    “하하! 알고 있네. 하지만 오늘 보 니까 개인 경호 기사로 두기에는 아 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내가 기사 욕심이 많지 않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브리더만 한 실력자는 많이 있지 않으십니 까!”

    아슬란 공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여태까지 왜 실력을 숨겼는지 모 르겠지만, 브리더의 실력은 친위 기 사단 안에서도 보기 드문 실력이야.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몸놀 림인데.”

    이성진은 아슬란 역시 15년 동안 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친위 기사의 공격을 피하는 몸놀림 을 알아봤다.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알아볼 줄은 몰랐다.

    “이런 인재라면 친위 기사단의 부 단장 자리를 줘도 아깝지 않지!”

    “부단장 자리를 말이십니까?”

    켈빈은 500명의 친위 기사를 부하 로 둘 수 있는 부단장 자리를 준다 고 할 줄은 몰랐다.

    “남작의 지위도 내려야겠지.”

    정말 이성진이 탐나는지 귀족 작위 까지 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성진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어깨를 살 짝 들썩였다.

    “켈빈. 부럽네.”

    “무슨 말씀이신지!”

    “친위 기사단 부단장 자리에 남작 지위까지 내린다고 했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군……. 이런 충직 한 경호 기사를 가진 켈빈 자네가 부러워! 하하!”

    아슬란이 켈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 고 크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공왕 전하! 공왕 전하께서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을 데리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또한, 저 역시 데리고 있으시니 저의 힘 역시 공왕 전하의 힘입니다.”

    “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 지. 브리더가 적이 된다면 왠지 골 치 아플 것 같거든.”

    켈빈은 아슬란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아 식은땀이 났다.

    “바로 세뇌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갈 건가?”

    “그렇습니다. 공왕 전하!”

    “그렇다면 같이 가지.”

    켈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정원 안에서 오르쿠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들을 의논했었다. 세뇌 마법진이 있는 곳이 아닌 집무 실로 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내가 브리더를 한 번 더 설득해 보려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닙니다. 공왕 전하!”

    켈빈은 다급하게 대답하고 먼저 걸 음을 옮기는 아슬란의 뒤를 따라갔

    다. 이성진 역시 켈빈의 오른쪽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갔다.

    아슬란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른 다. 하지만 아슬란과 함께 움직이니 좋은 점은 있었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나 가는 모든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었 다. 아슬란을 본 기사나 병사 그리 고 시종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으니 까.

    내성이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심부의 탑이 있는 곳 까지 갔다. 위로 올라가면 성녀 석 상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세뇌 마법진은 밑에 있었

    다. 세뇌 마법진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아슬란을 보고 고개를 숙 이며 인사했다.

    “브리더는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세뇌 마법진이 있는 곳에는 아슬란 과 켈빈밖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 서 켈빈은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 만 아슬란이 몸을 돌리며 씨익 웃었 다.

    “오늘은 브리더도 함께 들어가도록 하지.”

    켈빈은 아슬란의 말에 얼굴이 하얗 게 변했다.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 다.

    “저기 공왕 전하! 브리더를 왜 함

    께 들어가자고 하시는지.”

    켈빈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아슬 란은 웃었다.

    “당연히 브리더에게 나의 힘을 보 여 주기 위해서이지.”

    “하지만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가 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제 개인 경 호 기사 브리더라 하더라도요.”

    아슬란은 켈빈이 극구 말려도 상관 없다는 둣 말했다.

    “켈빈! 무엇을 염려하는지 안다. 내 약속하지. 브리더에게는 세뇌 마 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켈빈이 이성진을 세뇌 마법진이 있 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

    각한 이유였다. 아슬란이 마음만 먹 으면 세뇌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성진은 절대 세뇌당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마법 도구를 넣지 않았다. 만약 아슬란 공왕이 이성진 을 세뇌하려 시도하고 이성진이 세 뇌당하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일어 날 일은 안 봐도 빤히 보였다.

    “그래도 불안한가?”

    “아닙니다. 공왕 전하!”

    세뇌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성진과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브리더도 안에 들어갈 수 있 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공왕 전하!”

    켈빈은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그 리고 이성진에게 줬다.

    “브리더! 한 번만 사용 가능한 것 이다. 목에 걸어라.”

    이성진은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 다.

    “그럼 들어가지.”

    켈빈이 바로 움직여 세뇌 마법진이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 슬란 공왕이 먼저 들어갔다. 이성진 은 켈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설치된 마법 도구와 마법진에서 빛이 나와 세 사 람을 비췄다.

    아슬란 공왕과 켈빈은 한 번만 비 추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성진 은 여러 번 비추면서 꽤 오래 걸렸 다.

    “역시 켈빈이 설치한 마법 도구와 마법진은 믿을 만해! 인식 마법 도 구가 있어도 처음 들어오는 사람을 꼼꼼하게 살피는군.”

    아슬란 공왕과 켈빈을 제외하고 처 음 들어오는 사람이라 마법 도구와 마법진이 꼼꼼하게 이성진을 살피는 것은 당연했다.

    침입자가 아니라고 등록하는 중이 었으니까.

    그리고 안에 들어온 이성진은 무언

    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세뇌 마법진 이 있는 곳치고는 너무 허술했다. 마법 도구와 마법진 수십 개만 설치 해 놓을 아슬란이 아니다.

    “자! 이제 진짜를 보러 가자고.”

    아니나 다를까 아슬란 공왕이 벽을 향해 움직였다. 아슬란 공왕이 벽 앞에 서자 벽이 스르르하고 위로 올 라갔다.

    “내려가지.”

    벽 뒤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계단을 밝히 는 마나 수정이 보였다.

    거제도 기지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 다. 이제 생각해 보니 거제도 기지 에 설치된 마나 수정은 카반 왕국의 마법 도구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 중간 중간에도 침입자가 있으면 공격하는

    마법 도구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진은 항상 마나를 이용해 주변 을 파악하고 살피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그 문 역시 그냥 통 과할 수 없었다.

    아슬란 공왕을 인식하자 문이 열렸 다.

    문 안쪽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 다. 축구장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그 중심에는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 이 있다.

    마법진 중앙에 마나석이 박힌 마법 도구 수백 개가 꽂혀 있었다.

    중간 중간에도 있었다. 하긴 저렇 게 거대한 마법진을 가동하기 위해 서는 마나석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 다.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켈빈 자 네가 설명하는 것이 낫겠군.”

    아슬란은 마법술사가 아니었다. 기 사였다. 기본 개념은 알아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몸으로 하라면 몰라도.

    “브리더. 이 거대한 마법진은 마나 막과 반응해 마나막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메시지는 아슬란 공왕 전하에게 충

    성하라는 것이다.”

    아슬란은 켈빈의 설명이 마음에 들 지 않았는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것뿐만 아니지. 나는 마르지 않 는 마나를 가지고 있게 되었지.”

    “공왕 전하!”

    켈빈은 일부러 놀란 척 소리쳤다. 나중에 이성진에게 말해 주려고 한 것 중 하나였다. 어제는 15년 만에 만나 반가워서 어렸을 때 추억을 나 누느라 아슬란 공왕에 대한 이야기 를 많이 못 했다.

    “하하! 내가 이래서 켈빈을 좋아한 다니까. 개인 경호 기사에게까지 나 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지켰다니.”

    사실 브리더는 알고 있었다. 이성 진의 역할을 브리더가 하기로 했었 다. 당연히 아슬란 공왕에 대한 모 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마나막을 유지하기 위한 마법진을 이용해 세뇌하는 것은 물론, 나에게 마나를 계속 공급하지. 어떤가? 브 리더 자네도 이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켈빈은 아슬란 공왕이 자신의 비밀 을 밝혀 가면서까지 왜 이성진을 끌 어들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 다. 그리고 아슬란 공왕이 지닌 힘 을 나누어주겠다고 한다.

    “공왕 전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그리고 브리더는 일개 기사 일 뿐입니다.”

    아슬란 공왕은 켈빈이 섭섭해한다 고 생각했다.

    “켈빈! 너에게도 주지 않는 것을 일개 개인 경호 기사에게 준다고 하 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감히 제가 어찌 공왕 전하의 말을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말할 수 있겠 습니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 다. 이상하게 브리더에게 끌린단 말 이야.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야. 같은 편이 된다면 든든할 것 같거든. 이런 예감이 들

    었을 때 그 사람을 손에 넣었을 때 후회는 없었어.

    오래된 친구처럼 느끼는 것은 당연 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슬란은 언젠 가 엘 파나의 검은 사신 으를 상대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이성진의 정보 를 모았다.

    멀리서 마법 도구로 찍은 영상 수 백 개를 보며 연구했다.

    이성진이 사라지고 나서도 언제 나 타날지 몰라 계속 영상을 봤다. 그 러면서 이성진이 자신의 부하가 된 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도 이성진의 모습을 보다 보니

    친구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 아슬란 공왕은 지금 본능적으로 이성진을 잡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켈빈 자네가 그랬고 마이크가 그 랬지. 둘 다 나에게는 든든한 기둥 이야. 하지만 정말 날카로운 검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 늘 브리더의 다른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지.”

    아슬란은 강렬한 눈빛으로 브리더 를 쳐다봤다.

    “브리더라면 나의 검이 되어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것이라고!”

    아슬란의 말은 맞다. 하지만 브리 더가 아닌 엘 파나의 검은 사신 S

    이성진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성진은 아슬란 공왕을 위한 검이 될 생각은 없었다. 거꾸로 아 슬란 공왕을 찌르는 검이 될지언정.

    “어떤가! 더 강한 힘을 얻고 싶지 않은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마 르지 않는 마나는 물론 돈과 명예도 가지게 해 주겠다! 또한 지구를 손 에 넣고 엘 파나까지 손에 넣게 되 는 날 브리더 너만의 왕국을 세워 주지!”

    파격적이어도 너무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아슬란 공왕은 엘 파나까지 손에 넣는다고 했다.

    그리고 아슬란 공왕이 왜 이성진을

    원하는지 진짜 이유를 말했다.

    “브리더 너라면 엘 파나의 검은 사 신 으를 상대할 수 있다.”

    “공왕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켈빈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슬란 공왕이 지구에 와서 엘 파나의 검은 사신 드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슬란은 이제 켈빈에게까지 숨겼

    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켈빈! 너는 내가 엘 파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로 왔다고 생각 하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큰 꿈을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공왕이 아 닌 왕이 되기 위해서라고……

    “왕이 되기 위해서가 맞다. 하지만 지구에서 영토를 얻고 왕이 되려는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다! 엘 파나 에서도 왕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 다.”

    켈빈은 물론 카반 왕국의 귀족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슬란 공왕이 굳이 지구까지 갈 필요가 없 었다.

    “나는 지구에 온 모든 종족을 내 발밑에 무릎 꿇린 다음 엘 파나로 돌아가 황제가 될 것이다!”

    아슬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켈빈

    은 그런 아슬란의 모습을 보며 터무 니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슬란의 다음 말을 들이니 터무니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엘 파나의 검은 사신 으가 가지고 간 파나 신의 성물을 얻는다면 나는 신과 같은 능력을 얻을 것이다. 이 마법진에 중앙에 파나 신의 성물을 놓는다면 말이야!”

    세뇌 마법진은 아슬란 공왕에게 마 르지 않는 마나를 공급한다. 파나 신의 성물을 놓는다면 마르지 않는 신성력을 공급할 것이다. 그리고 불 사의 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 다.

    “하지만 공왕 전하! 엘 파나의 검 은 사신 으가 파나 신의 성물을 가 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바로 옆에 이성진을 두고 어디 있 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 슬란 공왕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순진한 성녀 엘리스는 엘 파나의 모든 종족이 파나 신의 성전과 영토 를 얻기 위해 지구에 온 것인 줄 안다. 하지만 모든 종족의 지도자들 은 알고 있다. 그들 역시 파나 신의 성물을 얻기 위해 왔다.”

    켈빈은 이성진에게 진짜 파나 신의 성물을 가지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슬란 때문에 그럴 수 없었 다.

    “모두 지구 영토를 점령하는 준비 보다 엘 파나의 검은 사신 으를 잡 는 준비를 더 했지.”

    아슬란 공왕은 각 종족에 스파이를 심어 놨다. 다른 종족 역시 스파이 를 심어 놓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월동주라고 일단 같은 배를 타고 지구에 온 것이다.

    이성진에게서 파나 신의 심장을 빼 앗아 신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파나 신의 능력만 얻게 된다면 엘 파나의 실질적인 주인인 용족이 다 스리는 케르빌 제국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지구의 커다란 대륙을 놔 두고 이곳에 왔는지도 궁금해했지.”

    이성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켈빈도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성진을 만나 고 아슬란 공왕의 말을 들은 지금은 알고 있다.

    “오르쿠가 알려줬어. 이곳에 오면 엘 파나의 검은 사신 드를 만날 수 있다고.”

    켈빈은 그럴 리 없다는 듯 아슬란 에게 물었다.

    “오르쿠가요? 오르쿠는 배신 안 하 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 를 쉽게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시

    지 않습니까! 오르쿠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영리하다는 것을요.”

    “큭. 물론이지. 하지만 오르쿠가 절 대 배신 안 한다고 믿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확답할 수가 없었다.

    “멍청한 주술사 놈이 나에게 알려 주고 죽었지.”

    이성진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오르쿠 배신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 었다.

    “그놈을 죽이지 않았다면 오르쿠와 전쟁을 했을 거야.”

    “아! 그럼 그때 그 사건이.”

    켈빈은 지구에 오기 전 엘 파나에 서 오르쿠 주술사 한 명이 죽은 사 건을 기억해 냈다.

    “맞네. 오르쿠의 배신자였지. 위대 한 하늘의 검과 하늘의 딸이 끝까지 찾아내 죽이려 한……. 그래서 나는 오르쿠가 떨어지는 지역 옆에 온 거 야.”

    켈빈은 슬쩍 이성진을 쳐다봤다. 아슬란은 켈빈도 자신의 생각에 동 의한다고 생각했다. 켈빈이 이성진 에게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르쿠를 공격하는 진짜 이

    유를 말했다.

    “성녀 엘리스가 마나막이 사라지는 대로 오르쿠를 공격하라고 했지. 또 한 마나막을 넘어 다니는 인간이 있 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인간 중 에 그런 능력 가진 인간이 누가 있 을까!”

    켈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엘 파나의 검은 사신 S!”

    “맞아! 으는 오르쿠 지역에 있어! 분명해!”

    이건 아슬란이 오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성진이 오르 쿠를 장악했다. 그리고 오르쿠를 이 용해 다른 종족을 공격할 확률이 높

    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오르쿠와 전면전을 하면 피해가 크니 기습을 하면서 천천히 병력을 깎아 먹으려고 했지. 하지만 브리더 너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아슬란의 눈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켈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슬란 공왕이 세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세뇌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말 하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죽이 지 않는다는 약속은 안 했다.

    아슬란의 성격상 이성진을 죽이려 고 할지도 몰랐다.

    “브리더! 투구를 벗어라! 그리고 나를 똑바로 봐라!”

    켈빈은 아슬란이 이성진의 투구를 벗으라고 말할 줄 몰랐다. 이걸 어 떻게 거부하게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성 진이 손을 올려 투구를 벗었기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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