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고성
거대한 연회장에 화려한 장식이 보 였다. 수많은 사람이 연회장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눈에 익었다. 하지 만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아도 될 한 사 람이 나타났다.
모두 무릎을 굽히며 그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다가온다.
“놀라셨어요? 내가 성녀라?”
성녀 엘리스였다. 그런데 하고 싶 지 않은 행동을 했다. 정중하게 한
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성녀 엘리스 가 내미는 손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 뗐다.
“아닙니다. 시나 사비르 엘리스 성 녀님!”
풀 네임을 익숙하게 말했다. 그뿐 이 아니었다.
“성녀님 덕분에 제가 신성 파나 제 국에 다 와 보게 되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제가 더 감사해요. 설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진짜 오셨잖아 요.”
“당연히 와야죠. 평화 회담이 열릴 기회인데요.”
성녀 엘리스가 활짝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웅성거리 기 시작했다. 성녀 엘리스가 남자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지 구 인간의 손을.
“가요. 이런 곳에 있어 봤자 평화 회담에는 도움이 안 돼요.”
성녀 엘리스의 손에 이끌려 갔다. 뿌리칠 수 있는데도 뿌리치지 않았 다. 성녀 엘리스의 손에 잡혀서 간 곳은 이상한 곳이었다.
공기가 포근하면서도 무거웠다.
마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곳이라면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성녀 엘리스가 더 활짝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쁜 아저씨!”
“하하. 저 그렇게 나쁜 짓은 안 한 것 같은데요? 위험하실 때 구해 준 것밖에는……
“제가 성녀란 것을 알았어도 구해 주셨을 건가요?”
성녀 엘리스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 여자와 아이는 보호받아야 하 니까요. 그때 성녀님께서는 성녀가 아닌 연약한 여자아이였을 뿐입니 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으시나 요?”
슬픈 눈을 하고 묻고 있었다. 대답 하려는 순간 성녀 엘리스가 몸을 돌 리더니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 다.
“저것 보이세요?”
성녀 엘리스의 말에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하지 만 성녀 엘리스가 장난친다고 생각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본다는 아저씨도 저 건 못 보시나 보네요.”
“제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신이 아닌 이상이란 말에 성녀 엘 리스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저씨 말이 맞네요. 신의 심장을 볼 수 있다면 신이겠죠.”
신의 심장이란 말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억!”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냐고 묻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 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어요. 말 못해요?”
“아니요. 그런데 지금……. 여기
가……
기억이 난다. 거제도에서 마법진에 올라가 광역 세뇌 마법을 시행하던 중이었다. 성공한 건가 궁금했다. 그 런데 이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어딘지 몰라요? 머리를 다쳤 나? 고성이잖아요.”
고성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자 남자는 우스갯소리로 다시 말했다.
“강원도 고성이 아닙니다. 경남 고 성이에요.”
남자의 말처럼 강원도 고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제도를 벗어 난 것 때문에 놀란 것이다.
툭 하고 말이 나왔다.
“거제도가 아니고요?”
“거제도요? 에이. 밖에 있는 막 때 문에 거제도는 갈 수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거제도는 어떻게 되었 는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되다니요?”
“몰라요? 해일이 두 번이나 왔는데 거기 사람들 무사할까요?”
남자와 대화하다 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편하 게 말했다. 이곳은 피해를 안 입은 것같이.
엘 파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는 어땠나요?”
남자가 진짜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 다.
“여기도 해일이 왔죠. 그때 난리도 아니었어요. 사람들도 많이 죽었 고……
“그럼 하늘에서 무언가 안 떨어졌 나요?”
“뭐가 떨어져요?”
이곳은 엘 파나의 성이 안 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 었다.
“왜……. 거대한 알 같은 것이요.”
“아! 오르쿠 성이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오르쿠 성이라 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남자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세뇌당했다. 세뇌당했다는 것은 고 성 지역이 엘 파나 침공군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그런데 진짜 기억에 이상 있는 거 아니에요?”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고성이 오르쿠에게 점령당 했다면 위험하다. 지금 몸이 정상이 아니다.
“머리를 다친 것 같긴 해요. 제가 어디 쓰러져 있었나요?”
“도로 옆 구덩이에 거꾸로 박혀 있 으시더라고요. 제가 마침 근처를 지
나갔길 망정이지 사람들이 자주 안 지나다니는 길이거든요.”
남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부웅 하고 나팔 부는 소리가 들렸 다. 그러자 남자는 근처에 놔둔 바 구니 하나를 가지고 왔다.
“저 일 나가야 하니까 이거 드시고 쉬세요.”
찐 감자 3개가 있었다.
“일을 나가요?”
일을 나가냐고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이 아저씨 큰일이네. 며칠 정도는 괜찮지만 계속 쉬면 저도 힘들어요. 일해야 감자 10알이라도 받을 수
있어요.”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환자에게 일하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쉬고 있어요.”
남자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남자 가 나가고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냥 평범한 주택 같았다. 창문 위 치로 봐서는 2층이나 3층이었다. 빌 라나 아파트일지도 모른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힘이 거의 들어 가지 않았다. 마법진이 몸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그래도 간신히 일어 나 창문으로 갔다.
창문 밖을 보니 이곳이 빌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양날 도끼나
못 같은 쇠가 삐쭉 튀어나온 몽둥이 를 들고 다니는 근육질 오르쿠들도 보였다.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오르쿠들과 이야기하고 인사하면서 어디론가 가 고 있었다.
저 돼지 코만 아니면 근육 인간이 라고 할 정도로 인간과 똑같이 생겼 다. 더 가까이 보려고 눈에 힘을 줬 다.
하지만 가까이 볼 수 없었다.
몸에만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 다. 초인과도 같은 능력도 사라졌다. 귀를 기울여 무슨 대화를 하나 들어 보려 해도 들리지 않았다.
오르쿠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 다. 그냥 친한 동네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어 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러자 오르쿠의 인상이 변했 다. 조금 전까지는 웃고 있었다. 지 금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리고 빌 라를 향해 달려왔다.
무엇을 잘못했나 싶었다. 손을 흔 들어서 흔들어 준 것뿐이다.
곧 문을 부숴 버릴 것 같은 소리 가 들렸다.
“인간! 문 열어라!”
꽝꽝 소리가 나도록 계속 치고 있
었다. 힘겹게 손으로 벽을 지탱하며 문으로 가는 순간 문이 오르쿠의 힘 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쿵쿵 소리를 내며 덩치 큰 오르쿠 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코가 정말 컸다. 코 가 크니 콧구멍 역시 컸다.
“푸흥! 인간 너 왜 일 안 하냐?” 화가 나서 그런지 콧바람이 강하게 나왔다. 얼굴에 그대로 맞았다.
“몸이 안 좋아서……
“몸이 안 좋은데 손을 흔들 수 있 나?”
오르쿠는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르쿠는 나 건강하게 잘
산다는 표시로 손을 흔든다. 거꾸로 건강하게 잘 사냐는 인사를 할 때도 손을 혼든다.
“이게 뭐야?”
현관이 부서진 것을 보며 들어오는 사람은 일 나간다고 나갔던 남자였 다. 남자는 오르쿠를 보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어쩌다 낳은 세 번째 아들 님! 왜 남의 집 문을 부숴요!”
오르쿠는 다시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했다.
“이 인간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왜 일 안 하냐고 물어보러 온 거 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 아픈 것 맞아요. 그리고 머리를 다쳤어요.”
“머리를?”
오르쿠는 이성진을 쳐다보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친 건가? 하기는 미친놈이 아니고서는 일 안 하는데 손을 흔들 리가 없지.”
오르쿠는 크홍 하는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인간. 문 부순 것 미안하다. 감자 20알 가져다준다.”
남자가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자 오 르쿠는 멋쩍은 듯이 다시 말했다.
“달걀 5개도 준다.”
“10개요.”
“7개밖에 없다.”
“알았어요. 오늘 일 못 나가겠네.”
오르쿠는 또 크훙 하면서 콧바람을 내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 다.
“문 고쳐라. 나 어쩌다 낳은 세 번 째 아들이 책임진다.”
“고마워요!”
“크홍……. 그리고 인간 너 빨리 나아라. 안 아프면서 놀면 죽는다.”
죽는다는 농담이 아니었다.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집주인 남자 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안 아프면 당연히 일합니다. 해 요!”
“크흥. 나는 착한 인간 말 믿고 간 다.”
“거 참 착한 인간이 아니라 장재웅 이라니까요.”
“이름 너무 짧아서 어렵다. 그냥 착한 인간 해라.”
어이가 없는 말을 하고는 오르쿠는 나가 버렸다.
“급하게 나가느라 장갑 두고 나가 서 다시 돌아오길 잘했네요.”
“그렇네요.”
“저 아니었으면 아저씨 저 오르쿠 에게 맞아 죽거나 농장으로 끌려갔
어요.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오르쿠 에게 손을 흔든 거예요?”
“손을 흔들면 안 되나요?”
장재웅은 이성진이 머리를 다쳤다 는 것이 기억났다. 알려 줘야 할 것 이 많을 것 같다는 것도 알았다.
“어차피 2일치 식량은 얻었으니까 쉬면서 알려 줘야죠.”
“ 뭐를요?”
“아저씨가 잊어버린 것들을요. 그 런데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것은 아 니겠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이름을 제대 로 말해도 될까? 하는 것 때문이었
다.
성녀상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도 마음에 걸렸다.
“아! 머리가……
일부러 머리가 아픈 척 손을 올렸 다. 잠시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장재웅은 진짜 아픈 것으로 알았다.
“이런……. 누워요.”
장재웅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던 곳에 다시 누웠다.
“조금 쉬고 있어요. 문 부순 오르 크 만나서 식량도 받아 와야 하니까 요.”
“네.”
아픈 척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사 실 아프기는 아팠다. 머리가 아니라 온몸이 멍이 든 것처럼 아프다. 하 지만 이 정도 고통은 참을 수 있었 다.
장재웅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조용히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이상 하게 고성으로 오긴 했다. 하지만 원래 거제도를 떠나려고 했었다. 원 치 않게 거제도를 떠나 육지로 온 것이긴 하지만 본래의 목적에는 맞 다.
그렇다면 몸을 회복하고 오르쿠가 점령한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가 중요하다.
정보가 필요했다. 이 집 주인인 장 재웅이란 사람도 믿을 수 없었다. 착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하지 만 그뿐이다.
오르쿠와도 친해 보였다.
이곳에서 우선해야 할 목표를 세웠
다. 그 무엇보다도 몸의 회복이 중 요했다. 초인적인 능력이 없어도 상 관없었다.
있으면 좋다. 하지만 그것을 의지 해서 살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 내려는 의지를 다지고 살아왔 지.
“이거 기억 잃은 아저씨 덕분에 감 자를 더 얻었네요.”
부서진 현관으로 들어오며 장재웅 이 말했다. 장재웅이 현관으로 들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10개나 더 주더라고 요.”
주방 쪽으로 가면서 말하고 있었
다. 아픈 사람이 크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곧 장재웅이 주방에서 왔 다.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플 텐데 감자라도 먹어요.”
일하러 나가면서 줬던 감자 바구니 를 밀었다.
“네. 조금 있다가요.”
장재웅의 말을 들으니 또 이상한 것이 있었다. 배가 하나도 안 고팠 다. 허기가 안 진다. 최소 하루 정 도는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텐데.
“그럼 조금 시끄러워도 참아요. 문 좀 고치게요.”
“네.”
장재웅은 바로 일어나서 현관으로 갔다. 그리고 부서진 문을 밖에다 버리고 어디선가 문을 들고 와서 다 시 달기 시작했다.
한참을 혼자서 낑낑거리면서 달더 니 문이 제대로 달렸는지 몇 번 시 험해 보고는 만족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왔다.
지저분한 것까지 다 치운 다음 다 시 이성진에게 갔다.
“아직도 많이 아파요? 그래도 뭐 좀 먹어야죠. 일어나 봐요.”
몸을 잡고 앉히려 했다. 장재웅에 게 몸을 그대로 맡겼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에 장재웅이 멋쩍게 웃 었다. 좋은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지나가다가 사람이 구덩이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해 데리고 와 서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오르쿠에게 점령당한 곳 에서.
또한, 장재웅이 한 말을 들어봤을 때 하루 일해서 받는 감자가 10알 이다. 그중 3알이나 주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더 돌봐 줄 것같이 말했 다.
“고마운 줄 알면 빨리 일어나요. 그리고 기억도 되찾고요. 자! 억지
로라도 한 개 먹어 봐요. 사람이 먹 어야 힘도 나고 빨리 나을 수 있어 요.”
장재웅이 주는 감자를 거절할 수 없었다. 다 식은 감자지만 맛있었다.
“천천히 먹어요. 여기 물.”
“그런데 제 옷은 어디 있나요?” 창문으로 밖을 살피기 위해 일어났 을 때 알게 된 것이다. 옷이 바뀌어 있었다.
“옷이요? 다 찢어져서 거의 넝마 수준이라 버렸어요. 중요한 것 있었 나요? 벌써 태웠을 텐데……
장재웅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태웠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검은 색 특수부대 옷을 누군가 알아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장재웅의 표정 과 말투를 봐서는 특수부대 옷이라 고는 생각 안 하는 것이 분명했다.
“감자 먹으면서 들어요. 이곳에서 지낼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를 알 려 줄게요.”
“네.”
알려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오르쿠가 손을 들어 인사하면 그 냥 고개만 숙이세요. 괜히 손들었다 가 오르쿠하고 팔씨름할 수도 있어 요.”
“팔씨름이요?”
“네. 오르쿠들은 손을 들어 인사하 는 것은 건강하다! 또는 힘에 자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아요. 오르쿠에게 건강은 곧 힘이에요.”
“팔씨름해서 지면 어떻게 되나요?”
“팔을 부러뜨려요.”
팔씨름해서 지면 팔을 부러뜨린다 니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싶었다.
“그리고 일은 안 해도 상관없는데 5일 이상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다 걸리면 강제로 농장에 끌려가요.”
“강제로요?”
“네. 오르쿠들은 대식가라 먹을 것 에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농장을 중요하게 여겨요.”
“농장이라면 어떤 농장인지…… 장재웅은 이성진의 얼굴을 쳐다보 더니 농장에 대해 말해 줬다.
“종류가 많아요. 감자, 옥수수, 고 구마 등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심은 농장이 있고요. 돼지나 닭 같 은 가축을 기르는 농장도 있어요.”
종류가 많다고 하길래 엄청 많은 줄 알았다.
“그곳에 가서 일해야 감자 10알을 줘요. 그리고 또……. 뭐가 있을 까……. 아! 팔에 파란색 완장을 차 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 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마 요.”
“무슨 짓을 하든이요?”
“네. 누굴 때리든 죽이든 못 본 척 하고 지나가요.”
장재웅은 이성진이 이해하지 못하 는 것 같자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오르쿠와 똑같은 지위와 대접을 받아요. 쉽게 말해서 그 사 람들이 하는 일은 오르쿠가 하는 일 이에요. 반항하거나 끼어들면 죽을 수 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쨌든 절대 상관해서는 안 돼 요!”
“네.”
“나머지는 눈치껏 행동하면 돼요.”
장재웅도 더 알려 주기는 힘들었 다. 직접 눈으로 봐야 아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더라도 절대 사고 치지 마요. 나까지 죽어요.”
장재웅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 일어났다. 마치 사고 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장재웅은 무언가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재웅이 무언가 안다고 해 서 지금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냥 주의 깊게 경계만 할 수 있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2일 동안 장재웅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이성진을 돌봤다.
3일째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에 통증이 사라졌다. 하지만 몸의 통증 만 사라진 것이지 다른 능력들은 안 돌아왔다.
“회복이 빠르네요.”
“다 장재웅 씨 덕분이죠.”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제가 고맙 죠. 그런데 아직도 이름이 기억 안 나요?”
“네.”
장재웅은 고민하더니 곧 말을 했 다.
“어쩔 수 없죠.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이름이 필요한데……. 대충 지어요.”
“그럴까요?”
“그래야죠. 농장에 가서도 이름을 등록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면 안 되잖아요.”
“그렇군요.”
장재웅을 따라 농장에 가 일하면서 정보를 모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건 강한 것을 알면 오르쿠가 가만히 놔 두지 않는다.
이름을 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 다. 단순하게 짓기로 했다. 이름을 거꾸로 해서.
“진성으로 할게요.”
“진성이요? 성은요?”
“흔한 이 씨로 하면 어떨까요?”
“그거 괜찮네요. 이진성이라……. 앞으로는 진성 씨라고 부를게요. 딱 봐도 제가 형처럼 보이니까. 진성이 라고 불러도 될까요?”
“몇 살이신데요?”
“38살이요.”
38살이면 7살이나 차이 난다.
“제가 몇 살처럼 보이는데요?”
“으음……. 아무리 많이 쳐줘도 29 살? 30대는 아닐 것 같고요.”
눈치를 보니 말을 편하게 하고 싶 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기억 날 때까지 이 름에 씨자를 붙이고 편하게 말하는
것은 어떤가요?”
장재웅은 이성진의 제안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동안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알았어요. 이진성 씨라고 부르죠.”
“네. 장재웅 씨!”
장재웅은 그냥 수긍하는 태도였다.
“그러면 내일부터 농장에 나가는 것으로 해요.”
“그냥 오늘부터 나가죠.”
오늘부터란 말에 장재웅이 눈을 크 게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몸을 제 대로 못 움직였던 사람이다.
“괜찮겠어요?”
“네. 아주 말짱합니다.”
팔을 휘저으며 건강하다는 것을 보 여 줬다. 제자리에서 점프도 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더 쉬다가 가 는 것이 어때요?”
“아니요. 계속 신세 질 수는 없죠.” 장재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고 싶다면야 말릴 이유가 없 지요. 오늘은 내가 다니는 옥수수 농장에 가 보는 것으로 해요. 해 보 고 적성에 안 맞으면 다른 농장에 가 보고요.”
“네.”
“그럼 작업복으로 사용할 것 좀 줄 게요.”
장재웅은 막 입어도 될 만한 옷을 가지고 왔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었 을 때 밖에서 부응 하고 나팔 소리 가 들렸다.
“일하러 갈 시간입니다. 아! 장갑! 맨날 잊는다니까!”
장재웅은 가죽으로 된 두꺼운 장갑 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하나를 줬 다. 옥수수 농장인데 왜 두꺼운 장 갑을 끼나 싶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 보면 알게 될 테 니까.
“가요.”
장재웅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 다. 그리고 새로 달은 현관문이 어
디서 온 것인지 알았다. 옆집 현관 이었다. 장재웅은 이성진이 뻥 뚫린 옆집 현관을 쳐다보자 계단으로 내 려가면서 말했다.
“아무도 안 사는 집이에요. 여기 그런 곳이 많아요. 이성진 씨도 농 장에 적응하면 빈집 골라 살면 될 거에요.”
“그렇게 하죠.”
빌라를 나오자 저번에 창문 밖으로 봤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 었다.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 고 오르쿠가 중간중간에 있었다.
오르쿠가 손을 들어 인사하면 사람 들은 그냥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장면 이 보였다.
오르쿠 둘이 서로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주먹으로 승용차를 치고 있 었다. 주먹으로 칠 때마다 꽝꽝하는 것이 해머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양쪽에서 럭비 선수가 달려오듯 오르쿠 두 명이 달 려와 어깨로 부딪혔다. 그리고 달려 왔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대충 봐도 30m는 넘게 날아간 것 같았 다.
“재미있죠? 아주 힘들이 넘쳐요. 저렇게 힘이 넘치면서 농장 일은 안
하려고 한다니까요.”
장재웅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저 오르쿠들은 그나마 힘이 안 강 한 편에 속해요. 일반 병사니까요.”
“일반 병사요?”
차를 맨주먹으로 부수고 달려와서 부딪히는 힘이 저렇게 강한데 일반 병사라니 놀랄 일이었다. 거제도에 있을 때 가졌던 힘과 비슷한 것 같 았다.
그리고 거제도에 오르쿠 성이 안 떨어진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소인족이 아닌 오르쿠였다면 더 힘 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니까.
“크흥.”
뒤에서 오르쿠 콧바람 소리가 들렸 다. 뒤를 돌아봤다.
“미친 인간! 다 나았나?”
“다 나았다.”
장재웅이 깜짝 놀라며 옆으로 피했 다. 이성진이 오르쿠에게 반말했기 때문이었다.
“크흥! 미친 인간! 너 겁 없나?”
“아니. 겁이야 많지! 하지만 내가 무시당하는 경우에는 겁이 없어지 지.”
오르쿠의 콧구멍이 넓어졌다.
“크흐응!”
오르쿠의 콧구멍이 넓어진 것을 본 장재웅은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어쩌다 낳은 세 번째 아들 님! 참 으세요.”
“크흐웅.”
어쩌다 낳은 세 번째 아들은 이성 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죽일 듯 이 노려본다고 해서 겁먹을 생각은 없었다.
한참 동안 오르쿠와 눈싸움을 했 다. 아무리 겁을 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인간! 너 그러다가 내 도끼에 맞 아 죽는다! 착한 인간도 같이.”
장재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장재웅은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 치지 말라고 이야기했는 데……. 나까지 죽게 생겼네요!”
“아니요. 안 죽어요.”
어쩌다 낳은 세 번째 아들의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장재웅에게 말해 줬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어쩌다 낳은 세 번째 아들은 이성 진의 눈을 계속 노려보면서 들고 있 는 도끼를 하늘 높이 들었다.
그래도 이성진이 눈을 피하지 않자 도끼를 이성진의 머리를 향해 내리 쳤다.
후웅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엄청난 힘과 빠르기였다. 장재
웅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진이 도끼에 맞는 소리가 들리 지 않았다. 이성진이 쓰러지는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피가 튀지도 않 았다. 장재웅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 자 보이는 것은 이성진의 머리 앞에 딱 멈춘 도끼였다.
“크릉. 크하하하하! 인간 네가 이 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