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
소인족들이 방패를 들어 총알을 막 는 곳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 었다.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 멀 리 보기를 원했다. 그러자 쓰러진 사람이 10m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 다. 등 뒤로 화살촉이 튀어나와 있 었다.
“무기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대화 하러 나왔다가 당했네.”
확실했다. 도망치다가 화살을 맞았 다면 화살촉이 아니라 화살 날개 부
분이 보여야 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며 둘러봤다. 조 금 이상했다. 소인족이 거제시를 공 격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제시에 서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 뿐 거제시 로 공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가끔 안전한 방패 뒤에서 화살을 날릴 뿐이었다.
“똑똑한 놈들이네.”
아니면 거제시에 있는 사람들이 멍 청하거나.
저렇게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 대면 총알 낭비다. 그 증거로 소인족은 단 한 명도 죽은 것 같지 않았다. 머리를 맞춰야 하는데 방패로 가리
고 있다. 그 방패에 대고 총을 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강철진은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모습이었다. 총성이 들리니 당연했다.
“이성진 씨! 무슨 일인가요?”
“소인족이 거제시를 포위하고 있어 요.”
“포위요?”
“네.”
왜인지 모르지만 소인족은 거제시 를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양옆으로 계속 병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조금 전 우리가 처 리했던 놈들이 만들던 차단선 방향 이 거제시 쪽이었어요.”
조금 전에는 차단선이 다 완성되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 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거제시에서 도망 나오는 사람을 잡기 위해 도로 를 막으려 한 것 같았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길래 거제시 를 포위해요?”
“그냥 대충 봐도 500명 이상이요. 알이 있는 방향에서 더 오고 있고 요.”
20명 단위로 몰려다니니 몇 명인 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거제시에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 까‘?”
“잘은 모르겠고 1만 명 이상 있을 겁니다. 제가 있던 그룹에만 1천 명 이 넘습니다.”
“많이도 살아남았네요.”
“네.”
많이 살아남았다고 말하지만 20만 명이 넘어가는 거제도 인구 중 살아 남은 사람이 1만 명뿐이었다. 찾아 보면 해안가가 아닌 곳에 살아남은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몇천 명 안 된다.
“성인 남성은요?”
“제가 있던 그룹에서 18세 이상
남자는 150명 정도였습니다.”
그냥 단순 계산으로 1천 명 이상 그룹 10개라고 생각하고 한 그룹에 150명씩 10개면 1,500명이었다.
“군인은 없었나 보군요.”
“네. 그나마 경찰과 소방대원 그리 고 시청 직원들이 꽤 살아남았습니 다. 그들이 사람들을 모으고 그룹으 로 나누어 관리했어요.”
총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했 다. 이제야 총알 낭비라는 것을 알 아차린 것 같았다.
“저와 아이들은 길이 뚫리자마자 남부면으로 출발했고요.”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거제시
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 이다.
지도를 꺼냈다.
“장목면까지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소인족이 모여 있는 곳을 뚫고 지나가야 해서 안 될 것 같네요.”
현재 위치에서 동북쪽 1시 방향 길로 가면 장목면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소인족이 모여 있다. 총알이 많다 해도 500명 이상 되는 소인족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자살하려는 것과 같다.
“어쩔 수 없이 이 방향으로 최대한 빠르게 달린 다음에 거제시를 통과
해야겠어요.”
강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북쪽 11시 방향으로 가서 해안가 근처 도로를 통해 거제시로 들어간다. 그 리고 거제시를 통과해 연초면으로 나간다.
“차단선을 이제 만들기 시작했으니 빨리 뛰면 놈들이 거제시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거제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유리를 업으세요.”
“네. 유리야!”
“한결이는 아저씨에게 안기고!”
유리와 한결이는 상황이 심각하다 는 것을 알고 아무 말 없이 움직였 다.
“바로 갑니다. 힘 아끼지 말고 뛰 세요! 똘이야 가자!”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지금 은 빨리 뛰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있는 힘껏 뛰었다. 그래도 똘이는 전혀 힘들지 않은 모습으로 따라왔 다. 똘이가 능력을 얻은 것은 확실 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테스트하 지 못하지만, 나중에 테스트해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10분쯤 뛰었다. 찌르르 하는 감각 이 느껴졌다. 급하게 멈췄다.
“이성진 씨……
자세를 낮추며 손을 들었다. 그러
자 강철진은 바로 입을 다물고 이성 진과 똑같이 자세를 낮췄다. 한결이 와 유리도 눈치 빠르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똘이 역시 멈췄다. 하지만 소리 없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 다.
똘이도 감지한 것이다. 저 코너를 돌면 소인족이 있다.
한결이를 내려놓고 손으로 모두 이 곳에 남으라는 신호를 했다. 강철진 과 한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갔다. 코너쯤에서 멈춰 고개를 빠르게 빼서 보고는 넣었다.
1초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중요한
것은 다 파악했다. 이런 훈련과 실 전은 지겹게 겪었다. 아직 녹이 슬 지 않았다.
다시 강철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 다.
소인족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상관 없었다.
“소인족 한 무더기 20명이 있어 요.”
“그렇군요.”
강철진은 이성진이 문제가 있을 때 마다 미리 감지한다는 것을 확실하 게 알았다. 거대한 알이 떨어져 두 번째 해일을 피할 때만 해도 이성진
때문에 살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소인족 40명을 만났을 때는 SAS 특수부대원이었으니 신경 써서 움직 이다가 소인족을 파악한 줄 알았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지금은 소인족이 멀리 있는데도 미리 파악했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겁니다.”
“뚫린 입구로 가는 길을 막고 있군 요.”
“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쓰레기나 장 애물을 치워 놓은 곳으로 가는 도로 를 소인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 다른 곳을 찾는 것은 시 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 리고 갈 수도 없었다.
아이들만 없다면 충분히 뚫고 지나 가거나 장애물이 있다 해도 넘어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뚫고 지나가야 합니 다.”
“그래야겠죠.”
강철진은 동의하면서도 걱정하는 얼굴로 아이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이성진을 다시 쳐다 봤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 그대로 뚫고 지나갑니다.”
“네?”
강철진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짝 보니까 저놈들 거제시 방향 만 경계하고 있더군요. 이쪽은 신경 도 안 쓰고 있어요.”
사실이었다. 소인족은 차단선을 설 치한 동료를 믿고 있었다. 이성진이 처리한 줄도 모르고.
“코너를 돌자마자 직선으로 200m 정도 거리에 소인족이 있어요.”
최대한 빠르게 달리면 200m 거리 는 15초 안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철진이라면 20초가 넘게 걸린다. 20초면 소인족이 충분히 경계 태세
를 갖출 수 있다. 1〜2초 차이로 소 인족에게 발목이 잡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도로 옆 배수로로 최대 한 가까이 접근합니다. 목표 지점인 100m 넘게 갔을 때 그냥 달리는 겁니다.”
“그냥 달려요?”
“네. 소인족을 향해 달려갈 때는 방패로 유리는 물론 강철진 씨 얼굴 까지 가리세요. 소인족을 뚫고 지나 가면 바로 방패를 뒤로 돌려 머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성진의 말을 듣자 이해가 갔다. 갑옷과 방패 그리고 새롭게 생긴 능
력을 믿고 하는 작전이었다. 이성진 이 작전을 말할 때까지 갑옷과 방패 는 생각도 못 했다.
너무 긴장해서 그랬다. 사람이 긴 장하면 평소에 잘 돌아가던 머리도 굳어 버린다.
“알겠습니다.”
“탄창은 제 것하고 교환해요. 장전 된 1발은 정말 중요한 때만 사용하 세요.”
“네.”
강철진은 불평 없이 2발 남은 탄 창을 빼서 이성진의 탄창과 교환했 다.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있어요.”
이성진이 배낭에서 에너지 바를 2 개 꺼내 주자 강철진은 너무 고마웠 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다니……
“중간에 쓰러지면 제가 더 힘들어 서 그럽니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뭐든지 하나 가 아쉬운 상황에 살아남을 수 있게 아끼지 않고 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혹시 모르니 유리를 안고 떨어지 지 않게 묶으세요.”
배낭에서 밧줄을 꺼냈다. 그러자 강철진은 진짜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배낭은 요술 배낭인가요?”
“요술 배낭이요?”
“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원 하면 나오는……
“큭……. 아닙니다. 그냥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철진은 이성진의 배낭 안에 무엇 이 들었을까 진짜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낭 안을 볼 때가 아니다. 이성진의 말대로 유리를 안고 뛰어 도 떨어지지 않게 유리를 몸에 묶었 다.
사실 잘 묶지 못해 이성진이 도와 줬다.
“한결이도 안겨라.”
“네.”
한결이가 안기자 이성진은 한결이 역시 뛰어도 떨어지지 않게 밧줄로 잘 묶었다. 그리고 매듭은 한 줄만 당기면 언제든지 풀어지게 해 놨다.
“자 갑시다.”
“네.”
강철진과 함께 도로 코너까지 갔 다. 똘이도 조용히 따라왔다.
‘ 지금!’
조용히 살펴보다가 손을 내밀어 입 술로만 말하자 강철진이 최대한 빠 르게 뛰었다. 중간에 돌이 몇 개 튀 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소리였다. 소인족 몇 명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강철진은 배수로 안에 무사히 도착
해 몸을 바짝 붙였다.
이성진은 코너 안쪽으로 고개를 집 어넣은 상태였다.
소인족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거제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이성진 차례였다.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소인족은 아무도 신 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바로 뛰었다. 하지만 강철진처럼 돌을 차거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배수로로 내려와 턱 하 는 작은 소리와 함께 강철진 옆에 붙었다. 똘이는 기가 막히게 소리 없이 뛰어왔고.
‘조용히 앞으로!’
수신호로 말하자 강철진이 몸을 낮 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뒤 를 이성진과 똘이가 따라갔다.
키 작은 소인족의 비애라고나 할 까?
배수로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해 오 지 않는 이상 배수로를 통해 다가오 는 이성진 일행을 발견할 수 없었 다.
그냥 배수로를 이용해 거제시에 들 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인족이 있는 곳까지만 배수로가 뚫려 있었 다. 소인족이 근처 쓰레기를 가져다 가 막아 놓았다. 그리고 배수로가 뚫려 있다고 해도 거제시 방향을 바
라보며 경계하고 있는 소인족을 끝 까지 속일 수 없었다.
한참을 긴장하며 조용히 전진했다. 강철진은 얼마나 갔는지 생각할 수 없었다. 긴장감에 땀이 비 오는 것 처럼 흘렀다.
턱. 하는 느낌이 어깨에 나자 강철 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리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고개를 돌리니 이성진이 손가락으 로 위를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그 제야 철컹 철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인족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진은 어쩔 수 없이 강철진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30m도 안 남았어요. 저놈 처리하 는 즉시 뛰어요!”
30m도 안 남았다는 말에 강철진은 눈을 크게 떴다. 170m나 온 줄 몰 랐기 때문이었다.
이성진이 대롱 같은 것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소인족에게 얻은 것이 다. 그리고 침통에서 침을 꺼내는 것도 봤다. 침이 번들거리는 것을 봐서는 독이 묻어 있는 것이 확실했 다.
철컹 소리가 바로 위에서 멈췄다.
“키 릭‘?”
혹.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소변을 보기 위해 갑옷을 들추던 소인족이
얼굴에 침을 맞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대로 쓰러졌다.
“뛰어요!”
강철진은 있는 힘을 다해 땅을 박 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너무 힘을 줬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보다 높게 뛰었다. 배수로 바닥에서 도로까지 1.5m 정도인데 3m를 뛴 것이다.
소인족들은 이성진의 ‘뛰어요.’ 소 리와 함께 독침을 맞고 쓰러진 소인 족의 갑옷이 내는 소리를 듣고 일제 히 뒤를 돌아봤다.
이게 또 운이 좋았다. 소리 나는 곳은 낮은 배수로 쪽이었다. 당연히 배수로로 눈이 내려갔다. 유리를 안
고 있는 강철진이 떨어져 내릴 때쯤 에서야 눈치챘다.
소인족은 다급하게 강철진을 공격 하며 앞을 막으려는 순간 갑자기 옆 배수로에서 튀어 올라온 이성진의 공격을 받았다.
이성진은 강철진처럼 바로 뛰어오 르지 않고 배수로를 달려간 다음 뛰 어오른 것이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성진이 휘 두르는 방패에 맞아 소인족이 날아 갔다. 날아가는 소인족은 동료 2명 과 함께 나뒹굴며 쓰러졌다.
당황하는 소인족 사이를 그때 강철 진이 그대로 달려 돌파했다.
이성진 역시 몸을 돌려 강철진을 따라 달렸다. 소인족 중 궁병이 화 살을 거는 것을 보며 방패를 뒤로 돌렸다.
그런데 쐐액 소리가 들렸다. 화살 이라면 피잉 하고 날카로운 소리여 야 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경험상 위 기감보다는 불안한 기분이면 강철진 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달리고 있는 강철진의 다리 사이를 노리고 창이 정확하게 날아왔다.
“억]”
강철진은 날아온 창에 다리가 걸려
앞으로 뒹굴며 넘어졌다.
강철진은 뒹굴면서도 유리를 다치 지 않게 감쌌다. 덕분에 어깨가 심 하게 땅과 부딪쳤다.
“한결아. 방패 들어!”
한 손으로 당기면 풀어지게 매듭지 어 놨기 때문에 한결이를 쉽게 풀어 내려놓는 동시에 180도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K2 소총을 들면서 빠르게 파악했다.
창을 던진 놈을 찾아야 했다. 창을 던진 놈은 일부러 강철진의 다리 사 이를 노린 것이다. 창이 날아온 소 리로 짐작하는 데 팔의 힘도 강하 다.
그냥 팔의 힘만 강한 것이 아니다. 쐐액 소리가 들릴 정도면 어깨와 허 리 그리고 옆구리 근육까지 강해야 했다.
빙고.
창을 들고 활대처럼 뒤로 한껏 허 리를 뒤로 굽힌 놈■이 보였다.
탕!
그놈은 뒤로 굽힌 상태 그대로 날 아가 쓰러졌다.
창을 던진 놈을 저격하는 데 걸린 시간은 2초가 채 안 되었다. 한결이 를 내려놓고 말이다.
“한결아! 아빠 부축해서 뛰어!”
“아저씨는요!”
“충분히 따라갈 수 있으니까 뛰 어!”
사실이었다. 이성진 혼자만 뛴다면 더 빠르게 뛸 수 있었다.
“똘이 너는 아이들 보호하고!”
보호라기보다는 똘이도 안전한 곳 으로 보내기 위해서 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똘이는 그런 이성진의 마음 을 아는지 머뭇거렸다.
“똘이 너까지 보호할 수 없으니까! 가!”
“끼 잉.”
똘이는 단호한 이성진의 말에 몸을 돌려 강철진이 넘어진 곳으로 뛰어 갔다. 그러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성
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소인족은 대형을 갖추고 있 었다. 이성진 때문이었다. 이성진이 몸을 빙글 돌려 자신들의 대장을 한 번에 총으로 쓰러뜨렸다. 이성진의 사격 실력이면 자신들도 쉽게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한결이가 강철진을 부축해 일어났다.
“이성진 씨!”
“빨리 거제시로 가요! 그래야 나도 편하게 갈 수 있으니까!”
강철진은 이성진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자신과 아이들은 지금
이성진에게 걸림돌이었다.
“꼭 무사히 오세요.”
“그 말 할 사이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요!”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은 안타까 워할 때가 아니었다. 머뭇거리다가 는 다 죽는다. 소인족은 방패로 머 리를 가리며 진형을 갖췄다. 이제 다시 화살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패 뒤에 숨은 궁 수가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철진과 아이들은 거제시 를 향해 뛰고 있었다. 화살은 강철 진과 아이들이 있던 자리에 헛되이 떨어졌다.
방패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피는 소인족이 보였다. 총 알만 충분했다면 바로 저격인데 그 럴 수 없었다.
지금 남은 총알은 한 발뿐이었다.
총을 쏘지 않자 소인족은 계속 고 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화살이 이성진을 향해 떨어지기 시 작했다. 저렇게 쏘면 맞을 수가 없 다.
옆으로 뛰었다가 뒤로 뛰었다. 이 런 식으로 5번을 피하자 화살이 뚝 멎었다. 화살 낭비라는 것을 잘 아 는 것이다.
척척척척…….
방패를 앞세워 총을 견제하며 전진 하고 있었다. 근접전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19대 1의 싸움이면 누가 이길까 생각하지 마라.
총알이 없다.
그렇다고 질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뒤를 힐끔 돌아봤다. 아이들을 데리고 절뚝거리며 뛰어가 는 것이 보였다. 똘이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좋아. 몸도 15년 전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한번 해보자고.”
오히려 더 좋았다. 스피드도 힘도 더 강해졌다. 시력까지 좋다.
일차 목표는 강철진과 아이들이 안
전하게 거제시까지 들어가는 것이 다. 그때까지만 막으면 된다.
장애물이 많은 거제시로 들어가고 놈들이 따라 들어오는 순간 19대 1 이 아니라 40대 1이라도 이길 자신 이 있었다.
소인족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 다. 그리고 방패 사이로 쑥 하고 창 이 나타났다. 충분히 이성진에게 닿 는 거리였다.
소인족은 그 거리까지 계산하고 접 근한 것이다.
하지만 창이 나오는 순간 이성진의 왼손은 창을 잡았다. 그리고 창을 잡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창을 지지
대로 삼아 소인족의 뒤로 떨어져 내 리기 위해서였다.
공중제비를 돌며 검을 들었다. 총 은 멜빵처럼 매여 있으니 자연스럽 게 이성진의 등 뒤로 돌아갔다.
이성진이 떨어져 내린 곳은 궁수가 있는 곳이었다. 불리해지면 도망가 야 하는데 궁수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푸욱.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이성진을 보며 당황하던 궁수 한 놈의 얼굴에 그대로 검이 꽂혔다. 검을 꽂은 상 대로 앞구르기를 하듯 몸의 중심을 앞으로 보냈다.
소인족 궁수가 넘어진다. 동시에 검이 그대로 뽑혔다. 원심력을 이용 해 검을 뽑은 것이다.
아직 소인족은 당황하고 있었다. 앞에 있던 놈들은 몸을 급하게 돌리 려다가 방패 때문에 서로 부딪혔다. 넘어지는 놈도 있었다.
그사이 이성진은 일어나서 검을 옆 으로 그었다. 바로 옆에 있던 궁수 한 놈이 목을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남은 궁수 두 놈은 서로 다른 방 향으로 뛰었다. 똑똑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성진에게 총알 한 발이 남 아 있다는 것은 몰랐다.
검을 왼손으로 옮기며 오른손으로 총을 돌려 잡았다. 그리고 도망가는 한 놈을 쐈다. 힘이 강해지니 한 손 만으로 총을 정확하게 쏠 수 있었 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놈을 놔두 고 다른 놈에게 뛰었다.
짧은 다리로 도망가 봤자다. 속도 도 훨씬 느리다. 뒤에서 목을 찔렀 다. 소인족 궁수 4명이 순식간에 죽 었다.
이제 남은 것은 15명이다.
마지막에 죽은 소인족에게서 방패 를 빼 들었다. 남은 소인족은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둥글
게 서서 포위했다.
중간중간에 창을 든 놈들이 있었 다. 거리를 두고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이상했다. 15명이나 되 는데 1명을 겁을 내 포위만 하고 시간을 끈다?
아니다. 눈빛이 죽지 않았다. 더 확실한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시간 을 끌면서 더 확실한 기회를 노린다 면 한 가지뿐이었다.
또 다른 소인족 부대가 곧 도착한 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확인하 는 방법은 간단했다.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그러자 포
위한 놈들도 한 발자국 뒤로 움직였 다.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놈들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잡아 두려 하는 것이다.
검을 든 손을 내렸다.
“이래도 안 덤비냐?”
자세를 잡지 않고 놈들을 도발하는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것 이 느껴졌다. 모른 척했다.
탁 소리가 나자 몸을 빙그르르 돌 렸다. 땅을 강하게 밟는 소리였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탁 소리 가 났다. 창을 찌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을 찌르던 놈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당황했다.
몸통을 노리고 찌른 창은 이성진이 몸을 빙그르르 돌린 것 때문에 빗나 갔다. 당황한데다가 창까지 빗나가 니 자세가 흐트러졌다.
방패를 들어 뒤를 방어하면서 검을 찔렀다. 뒤에서 창이 날아오기 때문 이었다. 동료가 위급하다고 생각해 창을 던진 것 같았다.
창이 방패에 맞는 순간 검은 앞에 있는 놈의 머리를 뚫었다.
끝이 아니다. 진형이 흔들릴 때가 기회다. 방패를 앞으로 돌리며 땅을 박찼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놈 이 강한 힘을 막지 못하고 튕겨 나 갔다.
양옆이 비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 로 오른쪽에 있는 놈의 목을 찌른 다음 옆으로 돌았다. 소인족 검이라 서 다행이었다. 장검술 따위는 배운 적이 없다.
소인족 검은 강철 3단 봉 정도의 길이였다. 단검술과 단봉술은 좀 한 다. 방패는 총 때문인지 소인족의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성진에게는 딱 알맞은 크기였다.
이제 소인족도 앞뒤 가리지 않았 다. 포위망이 무너졌다. 다시 포위망 을 만들려다가 더 많은 피해를 입는 다. 창을 찌르고 검을 휘두르며 이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키이이이에게!”
이상한 소리도 질렀다. 마치 ‘죽어 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는 것은 이성진이 아니었 다.
방패로 막고 찌르고 빙그르르 돌면 서 원심력으로 창을 튕겨 내면서 벤 다. 옆에서 오는 검은 방패를 비스 듬하게 만들어 빗겨 나가게 해 중심 을 잃게 했다. 중심을 잃은 소인족 은 넘어진 다음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싸우면 싸울수록 이런 싸움을 한 적 있는 것처럼 몸이 익 숙하게 움직였다. 생각하지도 않은
동작이 나왔다.
이성진은 원래 수없이 생각하며 싸 우는 타입이었다. 지금처럼 생각지 도 않은 동작을 안 한다. 덕분에 팔 과 다리를 살짝 베였다.
하지만 팔과 다리를 벤 놈들은 모 두 죽었다.
“헉헉•…"
땅 위에 온전하게 서 있는 것은 이성진 혼자였다.
힘이 들었다. 소인족 19명을 모두 죽였다. 몸에서 힘이 빠진 것이 아 니다. 순간순간마다 집중해서 싸우 느라 정신적으로 지쳤다.
심호흡하면서 끝난 싸움이라는 것
을 세뇌하듯 되새기며 안정시켰다. 동시에 강철진과 아이들 그리고 똘 이가 안전하게 거제시로 들어갔는지 봤다.
이미 거제시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키이이엑! 키이!”
멀리서 달려오는 소인족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땅을 박차고 거제시를 향해 뛰었 다. 너무 힘을 줬는지 한 번 뛸 때 마다 5m씩 뛰는 것 같았다. 순식간 에 거제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거제시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리만 아니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먹 어야 했다. 배낭 옆 주머니를 뜯어 내듯 열어 에너지 바 하나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입에 넣었다.
있는 힘껏 씹었다. 껍질이 찢어지 고 안의 내용물이 침과 섞이며 목을 타고 넘어갔다.
“퉤!”
순식간에 먹었다. 껍질을 뱉어내고 다시 에너지 바 하나를 더 꺼내 이 번에는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었다.
2개를 먹으니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사이 소인족도 거제시에 거의 다 왔다. 2개 부대 40명이었 다.
“이성진 씨! 괜찮아요?”
하지만 이쪽도 지원이 왔다. 강철 진과 함께 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 다. 총을 든 사람들은 바로 소인족 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인족은 방패를 들어 총알 을 막으며 천천히 뒤로 후퇴하기 시 작했다.
“괜찮습니다. 저 사람들은?”
“거제시 자치 수비대입니다. 안쪽 에 방어선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역시 대한민국 남자들이었다. 총을
익숙하게 잘 쏘고 있었다. 하지만 소인족도 익숙하게 방패로 잘 막고 있었다. 소인족이 멀어지자 총 쏘는 것을 멈췄다.
“강철진 씨. 다시 방어선으로 가야 합니다.”
“네. 이성진 씨 일어날 수 있어 요?”
“물론이죠.”
가볍게 일어났다. 그리고 강철진과 함께 남자들을 따라 거제시 안쪽으 로 들어갔다. 5분 정도 걷자 각종 물건으로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 다.
누가 정했는지 적절한 위치였다.
건물들 때문에 이곳을 지나지 않으 면 꽤 멀리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옥상마다 사람이 올라가 있었다.
“아저씨!”
“컹! 컹!”
한결이와 유리 그리고 똘이가 이성 진을 보더니 반갑게 달려왔다.
“아저씨 멀쩡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한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똘이가 다리를 머리로 비볐 다.
“알았다. 너도 걱정하지 마라.”
똘이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좋은 지 꼬리를 흔들었다.
그때 군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 다.
“안녕하십니까. 예비군 중대장 오 원희입니다. 중령 예편했습니다.”
몸은 좀 뚱뚱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눈빛과 말투를 봐서는 실전을 해 본 것 같았다. 야전 지휘관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위아래로 훑으면서 살펴보고 있었 다.
“잘 싸우시는 것 같더군요.”
“보셨나요?”
“저쪽 빌딩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강철진이 쉽게 사람들을 데
리고 왔다 싶었다. 소인족이 포위하 는 상황에 총을 든 사람들을 쉽게 보낼 수 없다. 오원희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성함이?”
“이성진입니다.”
“이름도 좋으시군요.”
웃으며 말하는 것이 찜찜했다. 저 런 타입은 직설적이다.
“이성진 씨, 군 경험자이신 것 같 은데 자치 수비대에 합류해 주세 요.”
그리고 당연히 이성진이 합류할 것 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치 수비대에 합류해 달라고 말하
는 오원희에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강 철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강철진이 대신 말했다.
“이성진 씨는 우리와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강철진의 말에 오원희는 눈을 가늘 게 떴다.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버 룻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편한 목소리로 오 원희가 말했다.
“지금은 긴급 위난 상황입니다. 아 니 확실하게 말하죠. 외계인이 공격 해 온 상황입니다. 저기 보이는 저 커다란 물체가 갑자기 나타난 달에 서 떨어졌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
면 민방위 기본법을 지켜야 할 의무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진 씨 는 자치 수비대에 합류해야만 하는 것이죠.”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법을 지켜야 한다.
“저기……. 지금 민방위 기본법이 라고 했나요?”
“네. 이성진 씨.”
당연하다는 둣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만약 민방위 대상자가 아니라면 요?”
이성진의 말에 오원희의 눈이 또 가늘어졌다.
“병역 면제를 받았다고 해서 민방 위 대상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혹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맞습니다.”
영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 적을 취득했다. 누구처럼 이중 국적 을 갖는 짓은 안 한다.
“그럼! 자치 수비대에 합류하세 요!”
“싫습니다.”
“지금 법을 어기겠다는 겁니까? 그 렇다면 체포하겠습니다.”
“법을 어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 니다.”
오원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곧 황당한 표정을 지 을 수밖에 없었다.
“민방위는 만 40세까지 아닌가요? 민방위 끝난 지가 언제인데……
“거짓말……. 지금 이성진 씨가 40 세가 넘었다는 건가요?”
오원희가 이성진을 위아래로 훑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쳐줘도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배도 안 나왔다. 얼굴에 처진 살도 없었다. 흰머리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네. 딸이 15살입니다.”
“주민등록증 보여 주세요!”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래서 배낭에서 지갑을 꺼냈다.
“자요!”
오원희는 지갑 안에 꽂혀진 주민등 록증을 보더니 다시 이성진을 쳐다 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 렸다.
“발급일이 2010년인데……. 지금이 2025년이니까, 15년 전 사진과 똑 같잖아!”
머리 모양만 조금 다를 뿐 이목구 비가 완전히 똑같았다. 이성진이 확 실하게 40세가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원희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 만 고민은 짧았다.
“그래도 전시 상황에서 강제 징집
동원령을 행사하겠습니다.”
“강제 징집 동원령이요?”
어이가 없었다. 그런 법이 있나 싶 어 다시 강철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강철진이 앞으로 나섰다.
“그 법이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억 지를 부립니까?”
“당신 자꾸 나서는데 당신이 법을 잘 알아? 그리고 강제 징집 동원령 이 폐지되었다 해도 지금 상황에 찬 밥 더운밥 가릴 때야? 저기 저놈들 이 쳐들어 온 것 안 보여?”
주변 사람들을 슬쩍 둘러보니 오원 희가 확실하게 지휘권을 가지고 있 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반발하는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 였다.
“시장 대리 김성수 씨 어디 계십니 까? 김성수 씨가 지금 오원희 씨가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까?”
강철진이 시장 대리 김성수를 찾자 오원희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잘난 시장 대리 김성수 씨는 저놈들과 대화하겠다고 나갔다가 화 살 맞고 죽었소! 멍청하게 무기 들 고 온 놈들에게 비무장으로 나가다 니……
거제시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었다. 그 사람 중에 시장 대리 김 성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모든 지휘권 을 가지고 있소. 전시니까!”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 다. 군인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지금도 하늘에서는 우 윳빛 막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강철진 씨. 예비군 중대장이 높습 니까? 현역 영관급 장교가 높습니 까?”
이성진의 말에 오원희가 무슨 소리 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강철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은 맞 았다.
“현역 영관급 장교가 지휘권을 인 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춰서 미안 합니다.”
강철진도 지금 상황에 오원희를 막 으려면 자신이 현역 군인이라는 것 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보사령부 소속 소령 강철진입니 다.”
강철진은 갑옷 안에 있는 신분증을 어렵게 꺼냈다. 대외적인 신분은 정 보사령부 소속이었다.
오원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이 나 말하는 것을 봐서는 강철진은 육 사 출신 같았다. 자신은 육군3사관 학교 출신이다. 대령 진급을 못한 것은 육사 출신에게 밀렸기 때문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은 법이었다.
“네. 거제시 예비군 중대장 예비역 중령 오원희입니다.”
오원희는 다시 정중하게 자신을 소 개 했다.
“제가 현역 소령이라고 해서 이곳
거제시의 지휘권을 그냥 뺏을 생각 은 없습니다.”
오원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이 통하는 사람 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하는 것 같자 그렇게 생각했다.
“저와 이성진 씨는 지금 장목면으 로 가야 합니다.”
“장목면이요?”
오원희는 장목면에 뭐가 있나 생각 했다. 그리고 작은 군 시설이 있다 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장목면에는 허름한 콘크리트 창고 몇 개만 있는데 그곳에는 왜?”
“그건 군사 기밀이라 말할 수 없습
니다. 이성진 씨는 지금 저를 그곳 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야 하는 임무 를 맡았습니다.”
“아••••••
오원희는 이성진을 특수한 임무만 수행하는 비밀 요원쯤으로 생각했 다.
“그럼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그곳으로……
오원희는 강철진에게 다가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철진은 오원희가 오해하게 놔뒀 다. 오히려 더 오해하게 했다. 그래 야 움직이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네. 아주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렇군요.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 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강철진에 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 다. 강철진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강철진 소령님. 이곳 거제시는 오 원희 중대장에게 맡기시는 것이 낫 지 않을까요?”
오원희의 표정이 더 환해졌다. 강 철진도 오원희의 표정을 보고 이성 진이 말한 이유를 알았다.
“그게 낫겠군요. 여태까지 고생해 서 예비군 편성하고 이렇게 방어진 까지 만드셨는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감사합니다. 장목면까지 가는데 필요하신 거라 도……
그냥 예의상 물어본 것이 분명했 다. 하지만 기회였다.
“탄약이 부족합니다. 물도 조금 있 었으면 하고요.”
“탄약과 물이요?”
다시 오원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표정만으로 거제시에 탄약과 물 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도 탄약이 넉넉하지 않습니 다. 물은 더 부족하고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 이 더 문제입니다.”
오원희는 탄약은 줄 수 있어도 물 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데 한결이가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 말했다.
“물 정수하는 법 가르쳐 주시면 되 잖아요. 정수기 없어도 나무만으로 물 정수해서 먹을 수 있잖아요.”
한결이의 말에 오원희가 눈을 크게 떴다.
“나무로 물을 정수해?”
“네. 이성진 아저씨가 가르쳐 주셨 어요.”
오원희는 바로 이성진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마트 같은 곳에서 물을 구 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 한쪽에는 정수되지 않 은 물을, 다른 한쪽에는 정수된 물 을 받을 수 있게만 하면 됩니다. 나 무의 섬유질은 어지간한 세균이 통 과할 수 없습니다.”
바닥에 검으로 간단하게 그림을 그 려 줬다. 말로 하는 것도 좋지만 이 렇게 그림으로 그려 주자 더 빠르게 이해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군요.”
“바다가 가까우니 바닷물을 끓여서 증류한 다음 다시 정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요.”
다시 그림을 그려 줬다. 솥 같은 곳에 물을 끓이고 물이 수증기가 되 어 날아갈 때 비닐 같은 것으로 막 으면 물방울이 생기고 그것을 모으 면 된다.
“이거 괜찮군요. 감사합니다. 탄약 은 바로 모아 드리겠습니다.”
물은 끝까지 준다는 말은 안 했다. 오원희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탄약 을 가져오라고 말한 다음 지도를 꺼 냈다.
“거제시 방어 지휘는 제가 하지만 강철진 소령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 서요.”
오원희가 꺼낸 지도는 전술 지도였 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과 그곳 을 방어하기 위해 어디를 막아야 하 는지 표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10개 그룹에서 5개 그 룹으로 나눈 다음 이곳과 이곳……. 이렇게 5군데에 분산 수용했습니 다.”
자랑할 만했다. 약간 고집이 있고 자신만 아는 것 같은 성격을 제외하 고는 제대로 된 야전 지휘관이었다. 방어하기 쉬운 곳으로 사람들을 대 피시 켰다.
“그리고 이곳과 이곳 10군데에 20 명씩 배치했습니다.”
훌륭한 배치였다. 범위를 줄여 서 로 교차해 지원할 수 있는 곳에 사 람을 배치했다. 오원희가 다시 보였 다.
“혹시 폭탄 종류는 얼마나 있습니 까?”
약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류탄 30개가 다입니다. 예비군 중대에 그 정도 있는 것도 다행이 죠.”
수류탄 30개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C4 정도는 있 어야 위급한 상황에 건물이라도 무 너뜨릴 텐데.
“문제는 저놈들의 숫자입니다. 벌
써 2천 명이 넘었습니다.”
이건 놀랐다. 몇 시간 전만 해도 500명 정도였다. 하긴 생각해 보니 알 속에서 나타난 성의 규모를 생각 하면 당연했다. 최소 1만 명 이상은 머물 수 있다. 이것저것 따졌을 때 최대 5만 명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 다.
“거제시를 포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병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장목면에 가실 때 주의하셔야 할 겁 니다.”
높은 곳에서 망원경으로 얻은 정보 를 말해 주고 있었다.
“여기 탄약 가지고 왔습니다!”
“어서 드려!”
30발들이 탄창 10개였다. 300발이 었다.
“지킬 곳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탄창을 7개 챙기고 3개를 강철진 에게 줬다.
“그리고 이곳은 아직 저 작은 놈들 이 막지 못했을 겁니다.”
오원희가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을 막으려면 거제시 외곽을 통과해야 하는데 저놈들은 외곽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원희가 가리킨 곳은 진짜 그랬
다. 소인족이 막으려면 더 멀리 돌 아서 도로를 막아야 했다.
“중요한 임무 꼭 달성하시기를 바 랍니다. 그리고 혹시 장목면에 군인 들이 살아남았다면 거제시 잊지 말 아 주세요.”
오원희는 거제시가 오래 못 버틴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탄약도 부 족하고 싸울 수 있는 성인 남자도 부족했다.
강철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장목면에 비밀 군 시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오원희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였다.
대신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네. 이성진 씨! 강철진 소령님 잘 보호해서 가세요.”
“그렇게 하죠.”
잘 보호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다. 서울과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인데다가 장목면에 있는 장비를 가 지고 거제도를 탈출할 수 있는지 확 인해야 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강철진 씨 다시 유리 업으세요. 한결아!”
강철진이 유리를 업고 한결이는 이 성진에게 안겼다. 그리고 오원희가 가르쳐준 곳을 향해 뛰었다. 똘이도 신나게 따라왔다.
30분쯤 달리자 거제시를 벗어나는 도로에 도착했다. 오원희의 말대로 이곳은 아직 소인족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멈추고 살 폈다. 하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다행이네요.”
강철진의 말대로 다행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갑시다.”
“네.”
이성진과 강철진 그리고 똘이는 다 시 뛰기 시작했다.
1시간쯤 뛰어 갔을 때 이성진이 손을 들며 멈췄다. 그리고 도로 옆 에 움푹 들어간 곳으로 뛰었다.
강철진 역시 말하지 않고 이성진의
뒤를 따라 뛰어 들어갔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소인족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철진의 생각대로 소인족이 나타 났다. 하지만 소인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키티익!”
소인족이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 리고 퍽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비명 을 질렀다.
“악!”
“여보!”
“키익. 키키익!”
소인족은 지금 사람들을 잡아 줄로 묶어 끌고 가고 있었다.
구덩이 위로 머리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순식간이다.
소인족 5명에 포로로 보이는 남자 4명과 여자 2명 그리고 아이 2명이 다. 주변에 다른 소인족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30m 정도.
강철진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다섯 놈이 사람들을 줄로 묶어 데 려가고 있어요.”
강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 다. 만약 이성진이 그냥 가자고 했 으면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 진이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 것 같자 기뻤다. 냉철한 사람
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강철진의 생각일 뿐 이성진은 계산이 있었다. 정보가 필 요했다. 20명 단위로 움직이는 놈들 이 5명이나 빼서 사람들을 다른 곳 으로 옮긴다.
이 앞쪽에 얼마나 많은 소인족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했다. 소인족과는 대 화가 안 되니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검을 주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혹 시나 위험한 상황이 오면 주저하지 말고 쏴요.”
강철진은 이성진이 주는 K2를 받
고 검을 건넸다. 그런데 받은 검을 허리춤에 끈으로 묶는 것이 보였다. 잡아당기면 그냥 풀어지는 매듭으로 묶었다.
이제 배낭을 벗고 단검을 꺼냈다. 구덩이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갑옷 때문에 움직일 때마 다 철그럭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로 거리를 알 수 있다. 또한, 포로 로 잡힌 사람 중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구덩이에 붙어 보이지 않아도 언제 튀어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조금 전 1초도 안 걸리는 시간에 다 파악했다. 어떻게 공격할지
를...
첫 번째 목표는 가장 앞에서 창을 들고 거들먹거리며 걸어가는 소인족 이다. 전혀 경계를 하지 않고 있다.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 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거제시에서 1 시간이나 달려온 곳이다. 꽤 먼 곳 이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 역시 가까 워졌다.
단검을 거꾸로 잡았다. 칼날을 손 으로 잡고 던지려는 것이다. 단검 던지는 것도 방법이 있다. 던지기
용 단검이 따로 존재한다. 던지기 용 단검은 무게 중심이 가운데 있 다. 손잡이를 잡고 던져도 된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단검은 손잡이 부분이 무거운 단검이다. 칼 날을 잡고 던져야 회전하면서 정확 하게 꽂힌다.
물론 수많은 연습을 해 감각을 익 혀야 가능한 일이다.
10m 안쪽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래도 구덩이에서 일어서 단검을 던지지 않았다. 10m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단검을 던져 죽 이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다.
최소 5m 안쪽으로 들어와야 원하 는 곳에 던져 맞출 수 있다. 더군다 나 소인족은 갑옷을 입고 있다. 또 한, 움직인다.
5m인 것 같다. 정말 가까이에서 절그럭 소리가 들렸다.
구덩이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소인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 마 사람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장 앞에 서서 걸어오던 창을 든 소인족이 그나마 이성진을 보고 눈 이 커졌다. 하지만 더 눈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단검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키엑!”
구덩이에서 일어서자마자 단검을 던지고 허리에 매달아 놓은 검을 풀 어 양손에 쥐면서 땅을 박차고 뛰었 다.
지금 힘이라면 5m 거리는 도약 한 번이면 끝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목표는 동시에 끝낸다. 한 번의 도약으로 창을 든 놈 뒤에 서 있는 소인족이 있는 곳 까지 갔다. 이놈도 눈이 커졌다. 그 리고 곧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포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세 번째 소인족은 검을 뽑으려다가 어느새 날아온 검에 머리를 뚫렸다.
이성진이 두 번째 소인족의 목을 베면서 다른 검을 던졌기 때문이었 다.
네 번째 소인족은 홀륭하게 검을 뽑았다. 하지만 늦었다. 이성진이 바
로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당연히 그륵 소리를 내면서 검을 놓고 목을 움켜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놈.
“키익. 키리익!”
검을 뽑고 방패를 들어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렸 다. 어 하는 사이에 동료 4명이 죽 었다. 그리고 혼자 남았다. 자신이 이성진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등을 돌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성진의 다리가 자신보다 긴 것은 물론 빠르다는 것도 눈으로 봤다.
남은 것은 한 가지.
소인족이 바로 앞에 있는 포로를 인질로 삼으려고 움직였다.
그 순간 이성진이 날아올랐다. 태 권도 시범단이 보여 줄 법한 이단 옆차기가 나왔다.
머리를 그대로 얻어맞고 뒤로 날아 갔다. 투구까지 벗겨졌다.
“쯧. 시선을 돌리면 안 되지.”
소인족이 포로를 인질로 잡기 위해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었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소인족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에 검을 꽂았다. 다른 세계의 침략자와 제네
바 협약을 맺은 것도 아니니 포로 대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놈들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한 살려 두면 데리고 다 닐 수 없으니 어딘가에 묶어서 감춰 놔야 한다. 그러다가 다른 소인족이 찾아내면 행적을 들킬 수도 있었다.
“괜찮으세요?”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 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포에 소리도 못 지르고 주저앉아 있기 때문이었 다.
“묶인 줄을 풀어 드릴 테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
다. 그런데 여자가 기겁을 하고 다 리를 마구 움직여 뒤로 도망갔다.
“오지 마세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용기를 내 어 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기는 한데 이 해도 된다. 갑자기 튀어나와 소인족 을 무참히 죽였으니 일반인이 공포 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성진 씨!”
“아저씨!”
“컹컹!”
강철진과 아이들 그리고 똘이가 구 덩이에서 나왔다. 한결이는 구덩이 에서 나오자마자 유리의 눈을 가렸
다. 소인족의 시체를 보여주지 않으 려는 것이다.
하지만 강철진과 아이들 그리고 똘 이가 나오면서 포로들의 공포는 많 이 희석되었다. 이성진 혼자 피 묻 은 검을 들고 있다면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아이들과 귀여운 개를 보면 대부분 의 사람들은 안정된다. 나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종의 호르몬 작용이라는 학설도 있다.
“여러분을 구하고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겁을 안 내셔도 됩 니다.”
“정……말입니까?”
여자 앞을 막은 남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여러분을 구할 생각이 없었 다면 그냥 저 구덩이에 숨어서 지나 가는 것을 지켜봤겠죠.”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사 람들은 이성진의 말을 이해했다. 공 포 때문에 잠시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검으 로 줄을 끊어줬다. 강철진도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묶인 사람들의 줄 을 풀어 줬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
게 일어서지 못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했다.
“어디서 저놈들에게 잡힌 건가요?”
“하청면에서 잡혔습니다.”
“하청면이요? 강철진 씨 배낭 좀.”
“네.”
강철진이 배낭을 건네줬다. 배낭에 서 지도를 꺼냈다. 하청면이면 걸어 서 1시간 거리였다. 문제는 하청면 을 지나는 길이 장목면으로 가는 최 단 거리라는 것이다.
“하청면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만 잡힌 건가요?”
“아닙니다. 살아남은 사람 50명 정
도가 다 잡혔습니다.”
“50명 정도가 잡혔는데 왜 여러분 만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는 아시 나요?”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갑자기 줄로 묶어서 끌고 왔습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요?”
“저쪽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봤 습니다.”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은 알에서 나 온 성이 있는 곳이었다. 이놈들은 사람을 잡아가고 있다. 거제시에만 살아남은 사람이 있지 않다. 거제도 여기저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거다.
소인족이 사람들을 잡아가는 이유 는 정확하지 않지만 몇 가지 추측할 수 있었다.
거제시를 공격하지 않고 포위만 했 다. 그리고 병사를 풀어 거제도를 뒤져 사람들을 잡는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을 막는 다. 죽이지 않는 것을 보니 포로로 잡아 무언가를 시키려고 한다.
추측을 하는데 포로를 잡아 무언가 를 시킨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남자 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기 때문이 었다.
“하청면에서 시체를 모으게 했었습
니다.”
“시체를요?”
“네. 보이는 시체는 다 모으고 부 서지지 않은 집 안에 시체가 있는지 뒤져 있으면 가지고 나오게 했습니 다.”
“그러고요?”
“그러고 나서는 저도 잘……
남자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 르는 것이 보였다. 대규모로 불을 질렀다면 저렇게 연기가 가늘게 몇 군데에서만 올라오지 않는다.
“소인족은 하청면에 몇 명이나 있 습니까?”
“이 사람들을 소인족이라고 부르나 보군요.”
남자는 물론 사람들이 모두 수긍했 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으니 소인 족이란 말이 어울렸다.
“그냥 편의상 소인족이라고 부릅니 다.”
“네……. 하청면에 엄청 많이 있습 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소인족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른 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하청면 은 피해서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머 지는 좋은 정보였다.
소인족은 전혀 미개하지 않다. 갑 옷을 입고 창을 들고 검과 방패 같
은 무기로 무장했다고 해서 미개하 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들은 전염병을 대비하고 있다. 동시에 거제도를 완벽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넣으려 한다.
“감사합니다.”
더는 물어볼 것이 없었다. 이제는 장목면으로 가는 계획을 다시 세워 야 했다.
“거제시는 아직 사람들이 있습니 다. 그곳에 가시면 안전할 겁니다.”
들어갈 수 있다면 안전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강철진이 눈을 크게 뜨고 이성진을 쳐다봤다.
“강철진 씨. 이 사람들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저거 보이죠?”
점점 더 범위를 넓혀 가는 우윳빛 막을 가리켰다. 강철진은 입을 열려 다가 닫았다. 이성진의 말이 맞다.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가는 것만으 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럼 무사히 거제시로 가시기 르...”
“저기. 안 데려다 주시고요?” 처음에 뒤로 도망쳤던 여자가 불안 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희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도……. 같이 가 주시면……
“미안합니다. 안 됩니다.”
딱 잘라서 강경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이성진이 아닌 강철 진에게 말했다.
“총이라도 하나 주세요.”
이성진 보다는 강철진이 더 말이 통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좋게 말 해 말이 더 통할 것 같은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만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이성진이 뒤에서 안 된다고 말하자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남자들이 항 의하고 나섰다.
“무기도 없이 우리끼리 거제시까지 가란 말입니까?”
“아이도 있어요.”
“그럼 소인족이 있는 하청면을 뚫 고 지나가야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합 니까?”
이성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 하자 여자가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하청면에 소인족이 많으니까……. 그냥 같이 거제시로 가면 안 될까 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 이었다. 이성진이라면 소인족이 나 타나도 쉽게 물리쳐 줄 것 같았다. 조금 전과 같이.
“그게 더 쉽잖아요.”
쉽다는 말에 열이 확 올랐다. 아직 도 저들은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른
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세 요.”
이성진이 화난 것 같자 사람들은 긴장했다.
“우리가 떠난 후부터,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 몸은 여러분이 알아서 지켜야 합니다. 누가 도움을 주고 누구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생 각 따위는 버려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진이 무슨 소리를 하 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보이는 저 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몰라요? 왜 하늘에 달이 하 나 더 생겼을까요? 몰라요? 짐작하
잖아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는 모 르지만 저 달이 나타나고 해일이 일 어났어요. 그리고 거대한 알이 떨어 지더니 알 안에서 성이 나타나고 소 인족이 나와 사람들을 잡아갑니다.”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평범하고 편안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조 금 전까지는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 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평범하고 편 안하게 살았던 대로 이기적인 주장 을 하고 있었다.
“저 알이 이곳에만 떨어졌을까요? 정부는 온전할까요?”
온전하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아무
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온전했 다면 벌써 구조 활동을 했다.
“정부가 온전하다 해도 거제도까지 신경 쓰려면 시간이 꽤 오래 지난 후일 겁니다. 그동안 남에게 의지할 건가요?”
이성진의 말에 한 남자가 울컥했는 지 소리쳤다.
“그래서 총을 달라고 하는 것 아닙 니까!”
“총은 못 줍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무기를 가질 수는 있어요.”
총을 못 주는데 무슨 무기를 가질 수 있냐는 표정으로 이성진을 쳐다 봤다.
“저기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성진이 가리키는 것은 죽은 소인 족 시체였다. 사람들은 이성진의 말 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하지 만 아는 것과 수긍하는 것은 달랐 다.
“저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도 사이 즈가 안 맞아요.”
“그리고 우리는 검을 사용해 본 적 도 없어요.”
“숫자가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건 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협박해야 했다.
“그럼 빼앗아 보시든지. 나는 적이 라고 생각하면 그 어떤 인정도 두지
않으니까.”
조금 전 이성진이 전광석화와 같이 소인족을 죽이는 것을 봤다. 그리고 진짜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성진이 진짜 죽일 것 같이 노려보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벅 소리와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깜짝 놀라 쓰러지는 사람 도 있었다.
“히익. 오지 마요.”
“당신에게 가는 것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마요.”
가장 먼저 죽인 소인족에게서 단검 을 뽑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단
검은 회수해야 했다. 비싸게 주고 산 이유도 있다. 하지만 톱 대용으 로 사용할 수도 있다.
단검을 뽑아 피를 털면서 주위를 스윽 둘러봤다. 모두 눈을 피했다.
“강철진 씨. 먼저 출발해요. 똘아! 네가 앞장서라.”
“ 컹!”
똘이는 대답하고는 사람들에게 으 르렁대고 앞장섰다. 다른 것은 모른 다. 주인인 이성진이 구해 준 것 같 은데 화를 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강철진이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강철진 씨! 아이들 데리고 먼저 가세요!”
“하지만……
강철진은 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 고 싶었다. 그래서 머뭇거렸다.
강철진이 머뭇거리자 사람들이 강 철진에게 몰려들려 했다. 그것을 가 로막았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여 기까지 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뒤 에 있는 강철진에게 하는 말이다. 강철진도 알고 있다. 그래도 머뭇거 렸다.
“어쩔 수 없군요. 강철진 씨는 강
철진 씨 마음대로 하세요.”
강철진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 고 몸을 돌렸다. 강철진의 눈이 혼 들렸다.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도울 때가 있고 돕지 않아야 하는 때가 있다.
“어? 어……
강철진이 가지고 있는 K2 소총과 배낭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아무 말 없이 배낭을 메고 K2 소총을 챙긴 다음 앞에서 왜 안 오냐는 듯 고개 를 돌려 기다리고 있는 똘이를 향해 뛰었다.
“이성진 씨! 혼자 가시면……
대답하지 않았다. 거제시에 잠깐 있으면서 몇 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어쩔 수 없 이 강철진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어 쩔 수 없는 경우 중 이런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는 했다.
어쨌든 헤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
는가!
장목면 기지까지 가는 것은 같다. 비밀 기지이니 여러 가지 유용한 물 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챙기고 거제도를 벗어날 기회를 노린다.
아니면 장목면 비밀 기지를 베이스 기지화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어차피 저 우윳빛 막이 거제도를 뒤덮기 전에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 능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강철진도 말은 안 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래서 저 사람들에게 미련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진 씨! 같이 가요!”
강철진은 사람들을 포기하고 한결
이와 유리를 안고 뛰었다. 하지만 이성진은 멈추지 않았다. 똘이 역시 이성진의 뒤를 따라 뛰면서 뒤돌아 보지 않았다. 이성진의 마음이 느껴 지기 때문이었다.
선을 긋고 있었다. 강철진은 이미 2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무조건 따 라야 한다는 약속을.
“제발! 같이 가요!”
강철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진 다. 그래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저씨! 저와 유리만이라도 데리 고 가 주세요!”
멈칫.
한결이의 목소리에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 니까.
아라와 한결이는 1살 차이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아라가 같은 상황 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면…….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멈췄듯이 다른 누구도 아라를 위해 멈춰 주기 를 바라는 마음에서.
“헉헉……. 으윽.”
강철진이 빠르게 달린 부작용으로 쓰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안간힘 을 쓰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들어가는 방
법을…… 알려…… 줄…… 테니…… 아이들……만이라도……
아무 말 없이 배낭에서 에너지 바 를 꺼내 찢은 다음 강철진의 입에 넣어 줬다. 순식간에 2개를 삼키고 는 기운을 되찾았다.
“허억. 허억. 기지에 들어가는 방법 을 알려 주겠어요.”
강철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결 이에게 다가갔다.
“진짜 한결이 너와 유리만 데리고 가도 되겠니?”
한결이는 쉽게 대답 못 했다. 본능 적으로 이성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소리쳤었다. 이성진이 같
이 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이성 진이 점점 더 멀어지자 불안한 감정 이 올라왔다.
이성진이 바로 앞에 있는 지금 전 혀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하지 않으 니 아빠인 강철진을 버리고 싶지 않 았다. 그렇다고 이성진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마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묻는 짓궂은 질문 같았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 요?”
“히잉……. 아저씨……. 유리도 부 탁할게요.”
유리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아빠
와 오빠가 이성진에게 용서해 달라 고 한 것은 안다. 아빠와 오빠가 이 성진에게 부탁하니 유리도 부탁하고 있었다.
유리 역시 이성진과 똘이가 좋았 다. 헤어지기 싫었다.
“ 알았다.”
하루 정도 같이 지냈다. 하지만 정 은 그 이상 든 것 같았다. 아라 생 각도 나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 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강철진에게 몸을 돌렸다.
“아이들 때문에 같이 가기는 갑니 다. 하지만 또 내 말을 무조건 듣겠
다는 말을 어겼을 때는 끝입니다.”
“알겠어요. 미안합니다.”
“그렇다고 조금 전처럼 배려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기지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강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진 과 아이들이 같이 있으면 안전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한결이가 소리쳐 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성 진을 멈추게 했으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 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만 안전할 수 있다면 다 포기할 수 있 었다. 지금은 이성진이 비밀 기지에 들어가는 방법만 알아내고 자신과
아이들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 이 슬며시 올라왔다.
“방법 말 안 하나요?”
이성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 다. 약속을 또 어기면 끝이다.
“아닙니다. 비밀 기지는 세 번째 창고에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창고 안에 들어가면 냉동고가 있습 니다. 냉동고를 열고 들어가 오른쪽 아래 파이프에 달린 원형 손잡이를 돌리면 냉동고 벽의 문이 열립니 다.”
“손잡이를 돌려요?”
“네. 비밀 기지 입구는 철저하게 수동으로 작동되게 설계했습니다.”
전자 제품은 모두 작동하지 않는다 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비밀 기지의 입구를 수동으 로 작동하게 설계하지 않는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서 문을 닫습 니다. 문을 닫아야지만 다음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통로를 따 라 들어가면 거대한 금고 같은 문이 나옵니다. 번호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고 11, 왼쪽으로 세 번 돌리고 22, 오른쪽으로 네 번 돌리고 23, 왼쪽으로 다섯 번 돌리고 24입니 다.”
“외우기 쉽게 해 놨군요.”
“네.”
세 번 11, 세 번 22, 네 번 23, 다 섯 번 24.
첫 번째와 두 번째만 알면 나머지 는 연상할 수 있게 금고 번호를 세 팅해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문을 닫으 면 바로 기지 안내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겁니다.”
“알았습니다. 일어나세요.”
“네.”
강철진은 바로 일어났다.
“유리 안으시고 한결이는 아저씨에 게 안겨라.”
강철진이 다시 유리를 안았다. 그
리고 한결이는 이성진에게 안겼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제 말과 신호 에 따라야 합니다.”
“네.”
조금만 더 가면 하청면이었다. 소 인족들이 있는 것은 물론 정찰을 하 거나 포로 호송을 하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모두 피해 가야 했다. 하청 면 외곽으로 길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