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호제왕이 권속들을 부르자, 그들이 다가와 서강림과 신수아의 팔에 각각 파란색 리본을 묶어 주었다.
보아하니 다른 호랑이들도 팔이나 꼬리에 같은 색의 매듭을 묶은 채였다.
“이게 신랑 측 인원이라는 증표일세.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이 행사는 잔치에 가깝다보니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네.”
호제왕은 느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전투라고는 하지만 친선전이니,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말아주게. 다들 칼 정도야 맞아도 상관은 없지만 죽거나 불구로 만드는 건 아무래도…….”
결혼식을 앞에 두고 초상을 치를 수는 없었다. 칼을 맞아도 멀쩡할 거라고는 하지만, 서강림이나 신수아가 휘두르는 칼을 맞고 무사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신수아도 서강림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눈빛을 교환하며 말했다.
“가급적 칼은 쓰지 말고 맨주먹으로 싸워야겠네요.”
“그래야겠군요.”
맨주먹이라고 해도 두 사람은 몸 자체가 흉기였다. 호제왕은 든든한 기분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설명을 더했다.
“아, 그리고 이능 사용도 금지일세. 죽을 수도 있으니까. 도구도 신체에 해가 되는 종류는 안되네. 맹독 같은 것 말일세.”
“해가 되지만 않으면 도구 사용은 제한이 없습니까?”
“그래. 제한이 없네.”
그 말에 서강림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호제왕은 그런 서강림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두 사람은 호위 임무에만 집중해주면 되고, 나머지 잔챙이들은 우리 쪽 호랑이들이 치울 걸세.”
“알겠습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두 사람도 연회를 즐기게나. 그러면 난 잠시 자리를 비우겠네.”
아무래도 아들의 결혼식이다보니 만나야 할 호랑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호제왕이 자리를 비우자, 서강림과 신수아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강림이 신수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그러면 저희도 구경 좀 할까요?”
“네. 좋아요.”
두 사람은 다정히 손을 잡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다녔다. 이렇게 마음 놓고 여행을 해본 것이 처음에 가까웠다.
호랑이들끼리 떠들고 씨름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여서 즐거웠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쿵……! 하고 뭔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수아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강림 씨, 아까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네. 들었습니다. 한번 가볼까요?”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자 여러 호랑이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신랑 측은 변변찮은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구만. 술 한 동이에 넘어가다니 말이야.”
그곳에는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진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마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인지 커다란 대접이 놓인 채였다.
둘러보니 술에 떡이 되어 쓰러진 호랑이가 너댓 마리는 늘어져 있었다. 다들 꼬리에 파란색 리본을 단 채였다.
“이거 이거, 술 내기도 못 이기는데 공방전은 이기려나?”
“이렇게 다들 나약해 빠져서야!”
아무래도 본격적인 공방전 전, 술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신부 측 호랑이들이 우세인 듯싶었다.
고작 술내기인데도 분위기가 위축된 것을 보고 있자니, 영 기세가 살지 않았다. 그러다 한 호랑이가 서강림을 힐끗 보며 말했다.
“하, 신랑 측에서 인간들을 데려왔다던데. 보아하니 쥐새끼 냄새가 나는걸?”
아무래도 서강림이 쥐띠인 것이 냄새로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신부측 호랑이가 잔뜩 이죽대며 말했다.
“잡아 먹히기 싫으면 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잔뜩 깐족대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냥 넘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는 신수아도 있었다.
공방전이 시작되면 단숨에 승부가 날 테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서강림은 주위를 힐끔 둘러보다 빈자리에 앉았다.
서강림이 도망가거나 화를 낼 줄 알았건만, 태연하게 자리에 앉자 신부측 호랑이는 다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뭐, 뭐야? 왜 앉아?”
“저도 술 한 잔 주시죠. 아까부터 술내기하던 거 아닙니까?”
서강림이 도발에 응하자 호랑이들은 피식 피식 웃기 시작했다. 인간, 그것도 고작 쥐띠인 인간이 허세를 부리다니.
“아이고, 이러다가 손님 실려가시면 어쩌려나 모르겠네. 걱정이 돼서 내가 술을 줄 수가 있어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호랑이들은 실실 웃으며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호랑이들에게는 평범한 잔이었지만, 인간인 서강림에게는 큰 대접이었다.
맑은 술에서는 꽃향기가 풍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저 커다란 덩치의 호랑이들도 몇 잔 마시면 그대로 쓰러질 법한 독주였다.
“이봐, 저 형씨 쓰러지면 아가씨가 데려갈 건가?”
호랑이 중 한 마리가 이죽거리면서 신수아에게 말을 붙였다. 신수아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는 빙긋 웃었다.
“아쉽게도 강림 씨가 쓰러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쪽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허? 참나.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보면 알겠죠.”
신수아는 생글 웃으며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그를 향한 믿음밖에 비치지 않았다.
서강림 역시 마찬가지로 태연했다. 그가 호랑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저랑 술내기하실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하도록 하지.”
그때, 덩치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서강림의 맞은 편에 앉았다. 히죽 웃는 것을 보니 술내기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 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러면 한 잔 하자고!”
유쾌하게 소리를 친 뒤, 호랑이는 큰 대접에 담긴 술을 쭉 들이켰다. 알싸한 술이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말술인 그는 단 한 번도 술 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독한 술이어도 물처럼 마시는 그였다.
때문에 지금 승부도 자신이 있었다. 호랑이들도 버티지 못하는 술인데, 한낱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랬을 테지만…….
-타앙!
“한 잔 더 주시죠.”
서강림이 대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은 이미 깔끔하게 비워진 채였다. 호랑이가 그것을 보고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저걸 마시고도 멀쩡하다고? 이 인간도 보통 말술이 아닌가 본데?’
하지만 그래봐야 인간. 고작 인간이 이걸 더 마시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호랑이는 아까보다 조금 긴장한 상태로, 두 번째 잔을 채웠다. 서강림을 살피는 눈동자가 예리했다.
“자, 두 번째 잔!”
호랑이는 벌컥 벌컥 술을 들이켰다. 확실히 도수가 높다보니, 두 번째 잔인데도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탕 소리를 내며 대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강림이 만취해 쓰러질 것을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으나.
서강림은 취기 하나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그가 대접을 내밀며 말했다.
“한 잔 더.”
그 반응에 호랑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상이었던 신랑 측 호랑이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저 인간, 잘 마시잖아?”
“아니. 대체 어떻게 저 독한 술을 다 비우지?”
그렇게 세 잔, 네 잔, 다섯 잔이 연거푸 들어갔다. 술동이가 빠르게 비워져 갈수록 호랑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미친 거 아냐? 이 독주를 마시는 데 이렇게 멀쩡하다고?’
서강림은 태연하게 술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아무리 독한 술이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주’를 해독하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로도 독을 먹고 멀쩡한 체질인데 독주쯤이야. 서강림에게 술은 향기로운 물이나 다름없었다.
서강림이 대접 하나를 더 비운 뒤, 상대방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한 잔 더 주시죠.”
그 태연한 모습에 호랑이들이 모두 경악하고 있었다. 상대방 호랑이는 사실 이미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온 상태였다.
‘젠장, 놈을 취하게 해서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서강림의 표정은 태연하지만 이런 술을 마시고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차라리 동귀어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호랑이가 커다란 술동이를 제앞에 턱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거 쭉 들이켜보자고!”
“좋습니다.”
호랑이는 술동이를 번쩍 들어 입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자신이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자신을 마시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쿵!
그때 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나자빠졌다. 신부 측 호랑이였다.
그는 술동이를 반도 비우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에 비해 서강림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저, 저 인간이 이겼어!”
“아니, 저 많은 양을 마셨는데도 멀쩡하다고?”
호랑이들이 모두 경악하는 사이로, 서강림은 차분하게 일어섰다. 신수아가 멍하게 서 있는 신부측 호랑이를 향해 말했다.
“말했죠? 그쪽 동료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신부측 호랑이가 얼떨떨하게 서 있던 그때. 어디선가 둥, 둥 하며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방전의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였다.
그 북소리를 듣자, 호랑이들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다들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공방전을 준비해라!”
“공방전이 시작된다! 지는 놈은 각오해!”
호랑이들은 취해 나자빠진 동료들을 각기 수습하여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서강림과 신수아 역시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거기에는 호양이와 호제왕이 서 있었다.
호양이는 잔뜩 긴장해서 발발 떨고 있는 상태였다. 호제왕이 서강림을 보고 반갑게 말했다.
“오, 왔군. 이제 곧 시작일세. 호양이의 호위를 잘 부탁하네.”
호양이는 덜덜 떨면서도 두 사람을 믿음직스럽지 않은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호위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을 호위로 붙이다니. 아버지도 이해가 가지 않아……!’
호랑이들은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다. 십이간지 중에서도 맹수로 분류되는 종족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호위를 인간에게 맡기다니. 같은 호랑이에게 맡겼다면 차라리 불만이 덜했을 것이었다.
신수아와 서강림의 활약상을 건너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기에 호양이는 두 사람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맨주먹으로 싸우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호랑이에게 한 방 얻어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찢겨 나갈 약한 몸뚱이를 가진 게 인간들이다. 호양이가 아니꼽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만 봤을 때는 나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 명령이니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게 속으로만 앓고 있던 그때, 다시 한번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서 공방전의 시작을 알렸다.
서강림이 호양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