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외전. 비호문의 일상
독고준은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여럿이었다. 우선, 그는 숙명이 사라진 뒤부터 기본적으로 저기압 상태였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세계를 위협하는 적이 사라지고, 일상이 찾아온 것이 그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나마 그의 흥미를 충족시킬 대상이 있다면, 역시나 서강림이었다. 이야기는 끝이 났어도 그는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주인공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 회의실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
독고준이 회의실의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어딘가 모르게 그에게서 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빈자리에 차례대로 앉는 사람은 비호문의 간부인 장태헌과 유하랑이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착석하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장태헌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웬일이냐? 네가 회의를 다 소집하고. 평소에는 오라고 해도 안 오는 놈이.”
“평소 회의는 별거 없잖아. 어차피 내가 없어도 다 해결될 문제이고. 이번에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렀어.”
그렇게 말하는 독고준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유하랑도 그 눈빛을 보고는 덩달아 조금 긴장한 기색이 되었다.
“중요한 일이라면?”
“너희도 알고 있지? 서강림의 현재 상태를…….”
그가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장태헌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바라보자 독고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 서강림과 신수아가 권태기에 들어간 것 같다.”
마치 세계 멸망이라도 앞둔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회의까지 잡은 것 치고는 별 것 아닌 안건이었다. 장태헌이 어이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그런 걸로 부른 거야? 두 사람 연애사는 두 사람이 해결…….”
“그러다가 만약 헤어지기라도 하면?”
그 말에 장태헌이 멈칫해서 독고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둘이 헤어진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천생연분인 두 사람이? 상상이 안 되는데?”
“그렇지만 숙명은 사라졌어. 더 이상 신수아 씨는 서강림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고. 연인들이 헤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잖아?”
백년해로를 할 것 같던 연인들이 별 것 아닌 이유로 헤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서강림과 신수아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독고준이 거기에 못을 박듯 말했다.
“그리고 너희도 느꼈을 거 아냐. 요즘 서강림이 뭔가 이상하다는 거.”
“그런가……?”
장태헌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독고준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 침묵하고 있던 유하랑이 입을 열었다.
“권태기라…… 확실히 두 사람이 데이트 하는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 원래도 잘 못 했는데 말이야.”
운명 보호국이 문을 닫은 뒤, 혼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비호문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데이트는 보통 마경을 공략하는 것으로 대체되곤 했다. 그때 장태헌이 반박하듯 말했다.
“그렇지만 데이트가 줄어든 건 어쩔 수 없잖아. 평범한 데이트를 하려고 해도, 두 사람이 워낙 유명인이니까.”
지금 세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면 누구라도 서강림과 신수아를 지목할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이 평범하게 데이트를 한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공개 데이트를 할 법도 했지만, 두 사람은 가급적 비밀스러운 연애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니 데이트의 빈도가 줄어드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독고준이 팔짱을 낀 채 또박또박 장태헌의 주장을 반박했다.
“바깥에 나가진 않더라도 평소에 둘이 집에서 같이 요리를 해서 먹거나, 시간을 보내는 적은 많았다고. 아니면 변장을 하고 몰래 빠져나가서 영화관을 간다든지. VIP 전용 레스토랑을 간다든지.”
“……넌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그 질문에 독고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두 사람이 바쁘다고는 해도, 요즘 서강림이 보이는 행동은 이상해. 자꾸 혼자서 사냥을 다녀오고, 대장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단 말이지?”
그 말에 유하랑과 장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서강림은 단독 행동을 하는 일이 늘어났다.
신수아가 같이 가겠다고 해도 혼자서 충분하다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
유하랑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권태기인가? 믿을 수 없구나……. 서강림 성격상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말이 되더냐?”
“내 캐릭터 해석에 따르면 서강림은 여전히 신수아를 사랑해. 하지만 원래 그 녀석…… 자신감이 부족한 타입이잖아?”
“아. 그렇긴 하지.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니까. 그렇지, 장태헌?”
유하랑이 자신을 부르자 장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확실히 회귀 전부터 그랬지. 그때, 강림이 형이랑 문주님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몇 번 부추겼거든.”
“하아, 부럽다. 회귀자들아……. 나도 지난 회차의 내용을 알고 싶은데.”
독고준이 정말로 부럽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무튼. 부추겼더니 뭐라고 했어?”
“자기랑 사귀기에는 신수아 씨가 아깝다고 했어. 그때는 형이 약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거 빼더라도 형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장태헌은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독고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물어보니까, 자기랑 사귀기에 신수아 씨가 너무 아깝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너무 모자라다고.”
“강림이 형……. 남이 들으면 돌 던질 이야기를 하는구나.”
맞는 말이었다. 서강림은 누구라도 인정하는 훌륭한 헌터였으며, 자산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으며, 외모 역시 준수했다.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그는 언제나 위축이 되어 있었다.
유하랑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긴, 다른 사람이 신수아 씨랑 결혼하는 건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좋은 사람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던데.”
“우와 서강림 진짜 답답하다. 그러면 두 사람의 빠른 전개를 위해…….”
독고준이 싱긋 웃었다.
“내가 신수아 씨한테 청혼할까?”
-고오오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이 살기로 가득 찼다. 유하랑과 장태헌이 죽일 듯이 독고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 모습에 독고준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난 두 사람을 응원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둘이 빨리 결혼했으면 하는 심정이야.”
“결혼?”
“그래. 둘이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 아이 스승이 되어서 열심히 가르쳐 양성하는 게 내 인생 목표야.”
그 말에 유하랑과 장태헌은 살기를 거두었다. 서강림과 신수아의 연애에 독고준이 진심인 게 전해져 왔으니까.
대신 이제는 독고준을 미친 또라이를 보는 눈빛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강림이 형의 안락한 미래를 위해 역시 이 자식은 죽이거나 어디 가둬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도 동감한다, 장태헌.”
“저기. 암살 모의는 내가 없는 곳에서 해주지 않을래?”
독고준이 태연하게 말했다. 유하랑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 회의를 연 이유는 대체 뭐지? 둘을 결혼시키자고?”
“그게 제일 좋지만, 우선은 서강림이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데이트라도 시켜줄까 싶어서 말이지.”
독고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러면 다 같이 여행이나 가보실까나?”
* * *
쭉 늘어선 노점들 사이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다들 손에는 솜사탕이나 술 같은 축제 음식을 하나씩 들고 있는 상태였다.
초여름이라 나들이를 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봄나들이를 즐기는 이들도 보였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여름 축제 같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여러 형태의 이종족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아, 서강림! 여기 자리 맡아 놨어. 이쪽으로 와~”
“형! 이쪽이야!”
돗자리에 앉아 있던 독고준과 장태헌이 손을 흔들며 서강림을 불렀다. 서강림은 양손 가득 축제 음식을 들고 있는 채로 인파 사이에 서 있었다.
서강림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가장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은 터라 돗자리도 널찍하니 앉기가 편했다.
서강림이 다가오자 장태헌이 싱글벙글 웃는 낯이 되어 말했다.
“형, 이렇게 놀러 오니까 좋지? 여기라면 다른 사람들 시선도 덜할 테고 말이야.”
“그러게. 신역으로 놀러 올 생각을 다 하다니……. 누구 아이디어야?”
“독고준 아이디어였어.”
그 말에 독고준은 뿌듯하게 씩 웃었다. 큰 공적을 세운 사람처럼.
비호문 일행은 서강림과 신수아의 데이트를 위해, 어디로 여행을 가면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너무 먼 바다나 섬으로 간다고 하면 일 중독자인 신수아가 싫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 기각.
그렇다고 가까운 근교로 가자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번거로울 것 같았다.
그러다 독고준이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신역으로 다같이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십이간지의 중립 지대로 사용하는 신역이 있다고 하더라고. 마침 축제 중이라길래 이쪽으로 왔지.”
그 말대로 축제 인파 중에는 이족 보행을 하는 동물들이나, 수인의 형태를 한 사람이 많아 보였다.
서강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아. 그런데 이건 대체 뭐야?”
서강림이 머리에 쓰고 있는 머리띠를 가리키며 말했다. 쥐의 귀를 닮은 머리띠였다.
독고준 역시 같은 것을 쓰고 있었고, 장태헌은 뺨에 뱀비늘 같은 것을 붙이고 있는 채였다.
독고준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인간이 오면 눈에 띄잖아? 그니까 조금씩 우리도 십이지에 맞춰 변장을 한 거지.”
“……그래.”
독고준이 즐거워 보이는 게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눈에 띄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평소에는 눈에 띄어야 인지도가 올라가 강해지니,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고 주의를 끌려고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매번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것은 꽤나 지치는 일이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서강림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오랜만의 여행이기에 보호국 일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했지만, 그쪽은 일이 너무 바빠 올 수가 없었다.
요한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마경 공략을 하며 사람들을 돕느라 오지 못한 상태였다.
독고준은 다른 사람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뭐,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중요한 건 서강림과 신수아가 같이 놀러왔다는 거라고.”
그 말에 서강림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우리 데이트하는 거 구경하려고 이런 거야? 소설에다가 별 이야기 다 적어 놓은 걸로는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