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옆에 신수아가 있어도 경계가 침식해 들어오고 있는 상태인데, 홀로 숙명을 마주한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신수아가 이 신역에 같이 올 방법은 없었기에 서강림은 또 다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신으로 받는 것이었다.
-캉, 카가강!
그의 몸에 녹빛과 금빛의 아우라가 감돌고 있었다.
동행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생기가 서강림을 감싸고 있었다.
몸 안에 거대한 나무가 자라난 것 같았다.
무너지려는 자신을 지탱하는 듯한 그 기운.
세상은 일그러져 있었으나 아직 숨 쉴 수 있었다.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이능 ‘가속’이 발동됩니다!]
최소한의 마력만을 사용하며 나머지 신력과 마력은 모두 육체 강화로 돌리고 있었다.
신수아의 신력이 흘러들어올 때마다 그는 더욱 빠르고 예리해지고 있었다.
숙명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빈도가 늘어났다.
강신을 한 상태에서 국장이 사망하는 바람에 숙명의 신력이 상당히 소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숙명은 신이었으며.
이 순간에도 많은 인간이 숙명을 믿고 있었다.
-콰르릉!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구친 물줄기가 서강림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사지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그 공격에 멈칫한 틈을 노려 숙명이 뛰어들었다.
“이제는 주제 파악을 좀 해야 할 텐데.”
-촤악!
그녀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바람은 그대로 칼날이 되어 서강림의 살갗을 저몄다.
붉은 피가 튀어 오르는 와중에도 두 눈동자의 빛은 선연했다.
질릴 정도로 또렷한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자 숙명은 이상하게도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그래봐야 서강림이 자신의 그릇이 되는 것은 정해진 미래.
그가 발버둥을 쳐 봐야 숙명에게는 여흥에 불과했다.
얼마나 단단한 그릇이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여흥일 뿐이다.
분명 그랬을 텐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반항적인 눈동자를 보는 것이 즐거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불쾌함이 솟구쳤다.
이 불쾌함은 무엇인가?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서강림의 눈동자에서 저 빛을 꺼버리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 봐야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그녀의 두 눈이 새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을 거닐고 있던 신수들의 모습이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더니, 그대로 신력으로 치환되어 숙명의 몸에 스며들었다.
푸른 눈동자에 미래가 비치기 시작했다.
-퍼걱!
서강림의 왼팔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급히 피하려 했지만, 어느새 그 자리에 숙명이 서 있었다.
마력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서강림의 급소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숙명의 자비 때문이었다.
소중한 그릇이니 죽일 수는 없다.
대신 죽여 달라고 울부짖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다.
수면이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숙명이 예측하는 미래를 비추는 수면.
쓰러져 바닥을 기는 서강림의 모습이 수면에 비치면, 곧 실재의 서강림도 같은 꼴이 되었다.
그러나 쓰러지더라도 서강림은 다시 일어섰다.
어디서 저런 집념이 나오는지 기이할 정도였다.
서강림이 모든 예지를 도륙할 듯이 발버둥을 치는 와중, 숙명은 이 불쾌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명이 자신을 떠났을 때, 숙명은 이와 같은 불쾌함을 느꼈다.
그녀는 무명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을 숭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명은 자신을 배신하였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남은 생애를 모두 바쳤다.
그것은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미래였다.
무명의 배신보다 그를 온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화가 났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지금도 느끼고 있었다.
서강림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쾌함으로, 또한 불길함이 되어 그녀의 목덜미를 훑고 있었다.
-서걱!
숙명의 뺨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강림이 입은 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지만, 그녀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저것은 내 그릇이다, 내 소유물일 뿐이다.
그런데도 서강림은 팔다리가 으깨지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숙명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서강림의 고함이 대기를 찢으며 맹격이 날아들었다.
예지 따위는 이미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였다.
그때,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적대 대상이 숙명을 부정합니다!]
[미래 예측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운명 조율에 오류가 발생합니다!]
숙명의 예지안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방금 전과 같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서강림의 운명을 더 이상 읽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녀가 보는 것은 미래가 아닌 허상에 불과했다.
[대상은 규칙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운명 등급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대상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고작해야 작은 벌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고아, 비참한 형상으로 뒤틀려 있던 패배자가.
승패가 자명함에도, 굴복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변의 신을 가로막은 채, 온몸을 피에 적신 상태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평가는 따로 있었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상승됩니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신삼품(神三品)’으로 변화합니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신이품(神二品)’으로 변화합니다!]
1초가 수없이 조각나 흘러가는 동안, 그의 운명은 처절하게 개화하고 있었다.
한 발씩 내디디며 달려올 때마다 그의 뒤에 일렁이는 기운은 점점 거세졌다.
작은 인간이 마치 거인처럼 보이는 와중, 영살검이 고함을 내질렀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신일품(神一品)’으로 변화합니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상승합니다!]
[오류가 발생합니다!]
[대상의 등급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등급 외입니다!]
[대상의 운명 등급이 ‘운명 돌파’로 변화합니다!]
숙명이 만들어 낸 수십 겹의 마력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반격이 날아오자 서강림의 왼쪽 귀가 날아가며 피보라가 일었으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숙명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공포였다.
[대상의 신명이 변화합니다!]
[서강림에게 신명 ‘숙명을 거역하는 불길’이 주어집니다!]
-서걱!
숙명의 어깨부터 가슴 위를 붉은 선이 가로질렀다.
치명상이었다.
숙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정한 규칙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이 뜻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 하찮은 벌레 따위가……!”
모든 것은 자신이 결정한다.
인간의 미래 따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이 정하는 것.
불변하며, 영원한 진리, 그것이 숙명 아니던가.
-콰아아아아!
숙명의 영혼 깊숙한 곳부터 끓어오른 분노가 신력과 함께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숙명의 형상이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털이 희고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맹수가 서강림을 그대로 짓뭉갰다.
-콰직!
온몸이 으깨지는 듯한 충격이 서강림을 덮쳤다.
그대로 곤죽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가 걸친 옷자락이 비명을 지르는 듯하였다.
[‘서강림’의 빈사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생사의 경계선’의 특수 효과가 발동됩니다!]
빈사의 고통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지만 서강림은 절망하는 대신 숙명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했어도 영살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숙명의 잇새로 어울리지 않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크르륵……!
발아래에 질척한 피웅덩이가 밟혔다.
숙명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피에 수면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서강림의 모습이 사라졌다.
-으드득!
어느새 서강림은 숙명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그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었다.
변화한 숙명에 비하면 자신의 몸은 너무 가벼웠다.
그러나 그 순간 숙명은 제 목에 박힌 검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능 ‘도둑쥐’가 발동됩니다!]
[‘불가살이’의 모습을 빌립니다!]
어느새 마수가 검 자루를 물고 있었다.
체중이 실리며 검이 길게 살과 뼈를 찢으며 내려왔다.
찢긴 상처를 따라 피가 폭포처럼 흘러넘쳤다.
불가살이의 몸이 피로 젖어가던 그때, 숙명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어나며 괴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서 감히, 나에게!”
-콰아앙!
숙명이 앞발로 불가살이를 후려치고, 머리를 짓누른 채 이빨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숙명의 공격은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못했다.
생사의 경계선의 특수 효과로 모든 공격이 파훼 되는 틈을 타, 서강림이 끊임없이 숙명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
숙명의 흰 털은 이제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이제 승산은 서강림에게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숙명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 날카롭게 날이 선 마력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서강림이 그 공격을 피해가며, 혼신의 힘을 향해 숙명에게 일격을 가하려던 그때.
-푸욱!
공격 중 하나가 서강림의 복부에 깊게 파고들었다.
뼈에 스며드는 통증.
빈사 상태에서는 차마 버티기 힘든 고통이었다.
[‘생사의 경계선’이 해당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충격에 도둑쥐가 풀리며 그는 수면에 얼굴을 박았다.
생사의 경계선은 99%의 확률로 공격을 반사해내는 아이템.
실패 확률은 고작 1%였건만, 이 순간까지도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었다.
숙명 역시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처음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 목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틀어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은 피로, 얼굴은 고통으로 젖어 있었으나 서강림만큼은 아니었다.
서강림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숙명이 그런 서강림의 등을 짓밟았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나?”
서강림은 감히 그녀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발아래에서 간신히 숨만 헐떡이고 있자, 숙명이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날 받아들일 생각은?”
서강림의 몸이 발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거부의 뜻이었다.
숙명은 피로 물든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지. 죽더라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몇 천 번이나 그랬으니까.”
몇 천 번?
고통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으로 그 단어가 파고들었다.
반항심으로 번들거리던 서강림의 눈빛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숙명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천 번의 삶 동안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숙명이 발을 거두는가 싶더니, 쓰러져 있는 서강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축 늘어진 몸뚱이가 바닥에 끌렸다.
숙명이 그런 서강림의 이마에 손을 짚은 순간, 눈앞이 번쩍거리며 기억들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기억 속에는 서강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어떤 순간에 서강림은 병실에 있었으며, 어떤 순간에는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고, 어떤 순간에는 감옥 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던 운명들.
하지만 모두 자신이 겪은 운명들이었다.
백영이 회귀하는 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일들.
수천의 삶, 모두가 비참하였고 불행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서강림은 끝끝내 숙명을 거부했다.
전생의 기억들보다, 이것을 숙명이 보여준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가 떨리는 시선으로 물었다.
“너, 회귀를…….”
숙명은 회귀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가?
숙명이 입을 비죽대며 웃었다.
“알고 있었다. 애초에 백영이 혼자 힘으로 그곳을 탈출했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