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계속해서 칼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쇠 비린내가 풍겨왔지만 숙명의 목소리에 배인 피 냄새보다는 지독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갸름해지며 서강림의 모습을 담았다.
“부유한 집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배곯은 적이 없는 자가 흙을 삼킬 수 있겠는가?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인간이 질시와 모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온실 속의 화초는 고귀할지언정 강하지는 않다.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검게 죽어가는 화초가 얼마나 많은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우아한 관상조가 아닌, 쓰레기를 먹고도 살아남는 벌레가 아니었던가.
“때문에 나는 비참한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찾아보았다. 다른 놈들보다는 쓸 만한 그릇이었지만 그마저도 불완전했다.”
때문에 숙명은 가장 낮은 곳에 임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찾아.
서강림을 바라보는 숙명의 눈빛이 따스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발견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눈을 본 순간 마음이 녹아버리고 홀릴 정도의 애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장품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물론 소질만 있었을 뿐, 아직 온전하지는 않기에 나는 너에게 수많은 고통을 선사했다. 너는 놀랍게도 그 모든 시련을 겪고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 말에 서강림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수없이 많은 장례식이, 피와 비명이,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울부짖던 새벽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서강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숙명은 말을 이어갔다.
“너는 수많은 불길과 담금질로 빚어진 그릇, 나의 가장 귀한 그릇이다. 정말 고생 많았다, 서강림.”
그녀는 당장에라도 서강림을 끌어안을 듯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서강림의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증오와 살의뿐이었다.
고작 그런 것을 위해, 부모님이 죽었다.
고아가 되어 입에 올릴 수 없는 불행과 수치를 겪으며, 오로지 증오만으로 살아남았다.
자신을 거둔 사람들은 모두 불행을 겪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곤 하였다.
고작 그릇을 만들기 위해.
서강림에게서 타는 듯한 증오가 흘러넘쳤지만, 숙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뜬 어조로 말했다.
“자, 가장 비참한 아이야. 이제 수확의 시간이다. 나의 그릇이 되거라. 내가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게 된다면, 너 역시 많은 영광을 누리게 될지니.”
서강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한다면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국장이 되어 보호국을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끝없는 찬사와 영예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강림은 단 한 순간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나 원했던 것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안온한 일상이었다.
-콰과광!
날카로운 파격음이 대기를 찢었다.
시간조차 서강림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공격은 잔상으로도 남지 않았고,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바닥을 얕게 채우고 있던 수면은 순식간에 물보라가 되었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맹공이었으나 그 자리에 숙명은 없었다.
숙명은 어느새 거리를 둔 채 서강림이 든 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을 노려보는 시선에는 두려움 대신 경멸이 담겨 있었다.
“영살검이라. 내 창조주면서도 참 멍청하단 말이지.”
그녀는 무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는, 숙명이라는 신을 만들어 놓고서도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자신을 없애려고 했다.
그녀는 무명을 추억하려 하였으나 여유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맹격이 쏟아져 내렸다.
-카가강!
숙적을 만난 영살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수면은 두려움에 떠는 것마냥 미친 듯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그대로 공간이 잘려 나가는 기백이었다.
이 순간만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기다려온 검.
그 어떤 검이라도 이 순간, 이보다 날카롭고 빠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단 한 번의 공격도 숙명에게는 닿지 못한 상태였다.
[이능 ‘예지안’이 발동 중입니다!]
숙명의 눈에는 모든 미래가 비치고 있었다.
몇 초 뒤의 미래가 현재보다 앞서 수면에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서 공격이 들어올지 알고 있다면, 아무리 강한 검이라 한들 닿을 리가 없다.
아무리 강한 검이라 한들 닿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도리어 숙명이 재미 삼아 손가락을 까딱일 때마다 날아드는 마력의 파편이 서강림의 살갗을 찢고 피를 훑었다.
그녀가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이기는 하는지 모르겠군. 환영들과는 잘 놀고 있나?”
-콰지직!
허공에서 불덩어리가 번개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저 풍경이 서강림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이미 한계까지 다다랐다는 것이었다.
경계에 다다른 인간의 말로 따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았다.
그들은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허상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날뛰다가 죽곤 했다.
무차별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정확한 현실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숙명이 전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업보에 짓눌려 무너질 것이 뻔했다.
-촤아악!
그럼에도 서강림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 적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모두 파괴하겠다는 심산처럼 보였다.
서강림이 검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떨어지던 공격들이 영살검의 앞에서 모두 그 형체를 잃고 말았다.
자신의 공격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숙명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녀는 어린 서강림의 머리맡에 머무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가는 목을 붙잡고 힘을 한 번만 주면, 그대로 목이 뚝 부러질 것 같았던 그 어린아이.
매일 밤 타오를 것 같은 신열을 앓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던 그 아이로부터 그녀는 가능성을 보았다.
잔에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트리며, 언제까지 넘치지 않을까 기대하는 아이처럼 숙명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만신을 보내 서강림의 부모를 모두 죽이고, 그가 떠도는 장소마다 불행을 보냈다.
서강림의 곁에는 늘 장례식에서 흘러나오는 향의 냄새가 지독하게 배어 있었고, 발밑에는 오로지 시체뿐이었다.
숙명은 신중하게 서강림의 영혼에 고난과 비극을 흘려보냈다.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서강림이 강해지길 바라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숙명일 것이었다.
“그래, 더 발버둥 쳐봐라! 더 반항해보란 말이다!”
물방울을 아무리 흘려보내도 잔은 넘치지 않았다.
이토록 거대한 그릇이라니.
마수와 인간, 인간과 신의 경계에 도달한 뒤에도 망가지지 않은 인간이라니.
숙명은 황홀한 듯이 웃으며 그에게 한 방울의 고통을 더 떨어트렸다.
-쿠웅!
서강림은 내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주어지던 중력이 순식간에 십 수배로 늘어나며 발밑이 푹 꺼졌다.
그대로 압사될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와중 숙명은 자유로워 보였고, 즐거워 보였으며,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방에서 마력이 화살처럼 서강림을 향해 쇄도했다.
[이능 ‘차륜형’이 발동됩니다!]
-콰과곽!
서강림이 거대한 차륜을 불러내자 그것은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던 차륜은 적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숙명을 향해 발사되듯 날아갔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콰직!
숙명이 소환해 낸 거대한 창이 그대로 차륜 위로 내리꽂혔다.
바큇살 사이사이로 못이 박히듯 창이 고정되자, 차륜은 비틀리는 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숙명이 서강림을 향해 뛰어들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느냐?”
-콰아앙!
서강림이 피하려고 한 자리에 마력의 구체가 직격했다.
미래를 읽는 그녀의 눈에는 서강림의 행동이 뻔히 보이고 있었다.
서강림이 다급히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지만 그의 몸이 사정없이 밀려 날아갔다.
“쿨럭……!”
한 번 공격을 받아낸 것만으로 뼈가 부서지고 눈과 코, 귀에서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파편들에게서 빌려온 회복 이능이 발동 중이었지만 고통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서강림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 눈빛을 보고 숙명은 온몸의 피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에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간절했던 아이.
이제 그릇을 만드는 마지막 작업이 남아 있었다.
수많은 메질과 담금질 끝에 만들어진 그릇은 이제 절망으로 완성될 것이었다.
절망으로 닦아내고 장식한 저 그릇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 더 버텨 보거라. 작은 벌레야.”
-쿠우웅……!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숙명이 다루는 수많은 신수였다.
상체는 숙명의 형상, 하체는 짐승의 것을 닮은 신수들이 서강림을 향해 몰아닥쳤다.
-키이이!
반신반마의 형상을 한 신수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서강림의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다급히 공격을 피하자마자 이번에는 거대한 맹금류가 날개를 펄럭이며 상공에서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가 공격들을 막아내려 애쓰고 있었지만 점점 수세에 몰릴 뿐이었다.
숙명의 피로부터 태어난 신수들은 모두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발버둥 쳐봐야 정해진 미래 앞에서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숙명은 느긋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언제쯤 꺾일까, 언제쯤 무너질까.
신수들은 모든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간혹 서강림의 공격을 기꺼이 받아주고 있었다.
이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더욱 절망할 수 있으니까.
-촤아악!
신수의 목덜미에서 더운 피가 솟구치며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서강림이 붉은 수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숙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숙명은 그 모습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충분히 희망하였으니, 이제는 절망할 시간이었다.
어떤 공격이 날아들지 뻔히 보였다.
이대로 서강림을 꺾어버리기만 하면 될 뿐.
1초 뒤, 그의 검이 목을 노리고 오른쪽으로 날아들 것이었다.
2초 뒤, 뒤로 물러선 숙명을 노리고 서리 불꽃이 발목을 잡을 미래가 보였다.
그리고 3초 뒤, 빈틈이 보였을 때를 노려 그의 왼쪽 다리를…….
-푸확!
그때, 숙명의 오른쪽 어깨에 피가 튀어 올랐다.
시큰한 통증에 고통보다 당혹감을 먼저 느꼈다.
‘내가 공격에 맞았다고?’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예지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수면이 비치고 있는 그의 미래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서강림의 속도가 예지의 속도를 앞서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미래가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 미래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예지가 한 박자씩 늦춰져 가자, 엉킨 시곗바늘 같은 꼬락서니가 되었다.
당황한 틈을 노려 서강림의 공격이 속사포처럼 꽂히기 시작했다.
-쾅, 콰광!
한 발자국 앞선 미래를 보여주었던 수면이, 어느새 거울처럼 서강림의 모습을 반사하기 시작했다.
현재가 미래를 쫓아온 것이다.
그것을 보며 숙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도가 빨라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지금 서강림은 업보로 인해 보여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들려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서강림의 공격은 너무나도 정확했으며, 또한 온몸에 활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신수아가 옆에 있을 때처럼.
그때, 숙명은 서강림의 두 눈을 보았다.
태연하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너, 그 여자를……!”
서강림의 두 눈동자가 서로 다른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왼쪽 눈은 평소 같은 금안, 여명이 내려앉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금성의 색깔이었으나 오른쪽 눈동자의 색이 변해 있었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자라나는 맹아(萌芽)의 녹빛.
서로 다른 두 색깔의 신력이 그의 몸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신수아의 신력이었다.
[‘절망을 가르는 신록’이 서강림을 만신으로 선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