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숙명을 쓰러트려 달라.
그것이 회귀자의 유언이었다.
수천 번의 생을 바쳐 그녀가 이룩하고자 했던 염원이었으며, 서강림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능 ‘검제’가 발동됩니다!]
천 개의 바람이 칼날이라도 된 것처럼 공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 폭풍 속에서도 국장은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가려진 가면 너머로, 두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쩌어엉!
사방에 얼음이 돋아나며 서강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귀가 도려져 나갈 듯한 혹한.
서강림은 얼음의 목덜미에 칼날을 쑤셔 넣었고, 부스러지는 보석처럼 빙편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 사이로 예리한 고통이 서강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악!
서리만큼 차가운 검날에 뜨거운 피가 흘러 맺혔다.
드디어 서강림의 몸에도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추위나 고통 따위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산속에서 동사(凍死)한 운명은 이미 몇 명이나 짊어졌다.
고문당해 온몸이 난자당한 운명 역시 몇 십 번이고 체험하였다.
이런 것으로는 서강림을 조금도 겁먹게 할 수 없었다.
-카가각!
서강림은 모든 두려움을 아는 사람처럼 국장의 검을 받아쳐 냈다.
검제가 발동되며 그의 검술은 이미 신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국장의 몸에 수많은 상흔이 새겨지자 숙명은 그에게 더욱 힘을 빌려주었다.
[‘불변하는 영원’의 20%가 강신하였습니다!]
국장의 외형에는 큰 차이가 없었고, 가면 때문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육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과열된 기계처럼 몸뚱이에서 쇳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그 인형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국장이 검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콰과곽!
거대한 추(錐)같은 얼음들이 서강림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는 빙주들을 파괴하는 동시에 내달리며 공격 범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파고들었다.
-푸욱!
빙주의 파편이 허벅지를 깊게 후벼 팠다.
그 통증에 백영과 처음 조우했을 때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때도 이 다리에 공격을 받았다.
-채애앵!
주춤하는 틈을 노려 국장의 검이 서강림의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왔다.
서강림은 빠르게 공격을 받아냈지만 검이 부딪치자 그 충격이 뼈와 근육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국장의 검은 점점 무거워졌고 빨라졌으나 상관없었다.
모두 베어내면 그만일 뿐이다.
[이능 ‘절대검’이 발동됩니다!]
-콰직!
국장이 들고 있는 검이 삼분의 일 가까이 베여나갔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뼈 직전까지 와 닿은 것이었다.
한 번만 더 휘두르면 곧 반 토막이 날 듯싶었으나 국장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불변하는 영원’의 30%가 강신하였습니다!]
-촤아악!
강신률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국장의 검에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형세가 뒤엎어지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 서강림은 위화감을 느꼈다.
국장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는 몇 번이고 서강림의 급소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으나, 그때마다 오작동을 일으킨 것처럼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그때, 두 자루의 검이 격돌했다.
-콰아앙!
검압이 사방을 덮치자 얼굴에 실 같은 상처들이 새겨지고, 국장의 가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가면이 부서지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서강림의 맥박이 거칠게 뛰었다.
그는 가면 너머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 버렸지만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시선으로 말하고 있었다.
죽이라고.
빨리 자신을 죽이라고.
그 처절한 눈빛을 보자 서강림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국장은, 백영은 숙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의 계시를 거부한 채 온몸으로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막 태어난 그것에게 기억 따위는 없었다.
그저 피에 각인된 본능적인 증오, 숙명에 대한 살의가 그의 몸을 이끌었다.
회귀자의 유언을 눈빛으로 빚는다면 저런 눈빛일 것이었다.
서강림은 백영과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도 기구한 팔자라고.
그 말대로 백영의 운명도, 자신의 운명도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비틀린 운명을, 업을 끝낼 수 있을까?
서강림의 답신은 검으로 새겨졌다.
-콰직!
태어난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은, 그러나 동시에 수백 년의 시간을 살아가던 심장에 검이 파고들었다.
국장의 입과 가슴에서 선혈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었음에도 붉은 피였다.
“…….”
국장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보낼 뿐.
서강림이 검을 뽑아내자 국장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국장님……!”
그것을 본 서문용녀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국장이 죽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이를 갈며 차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서강림을 확보하도록 해! 지금 당장!”
조금이나마 서강림이 부상을 입은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를 따르는 차사들이 다급히 서강림을 향해 달려든 그때, 촉수가 땅에서 뻗어 나와 그들의 목을 졸랐다.
차사들이 쇳소리를 내지르던 와중 서문용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카가강!
날카로운 검이 서문용녀의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녀는 다급히 피하며 공격을 가한 얼굴을 응시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독고준은 기이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봐, 보스전 전에 잠깐 숨 돌릴 틈은 주는 게 매너 아니야?”
그는 지독하게 흥분한 기색으로 숨마저 거칠어져 있는 채였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독고준이 행복해 미칠 것 같다는 얼굴로 말했다.
“자, 나랑 놀아주지 그래? 나에게도 그 번개꽃이라는 거 새겨주지 않겠어? 짜릿할 것 같은데!”
서문용녀가 국장과 서강림을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독고준은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나머지 팀장들 역시 비호문과 차사들이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목이 묶인 사이, 서강림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금 국장이 강신한 상태로 사망하며 숙명에게도 타격이 갔을 거야.’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사이 회복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빠르게 신역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서강림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육체가 아닌, 정신의 문제였다.
뇌가, 머리가, 영혼이 부식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비극적인 날과 어울리지 않게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었으나 서강림의 눈에는 다르게 비치고 있었다.
석양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검붉은 하늘, 사방에서 풍겨오는 쇠 비린내와 시체로 이루어진 도시의 풍경.
“강림 씨!”
그때 신수아가 다급히 서강림을 부축했다.
이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도 아직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나마 신수아가 있기에 간신히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이대로 신역으로 간다면 버틸 수 있을까?
“신수아 씨, 부탁이 있습니다.”
“네, 뭐든 말해요……!”
서강림이 힘없이 고개를 늘어트린 채,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희박한 숨이 목소리와 함께 닿자 신수아는 놀란 눈이 되었다.
“괜찮겠어요? 그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지금은 그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보호국과 마경을,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서강림은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힘겹게 웃었다.
재와 피에 젖은 얼굴에는 기묘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언제나.”
“네? 그게 무슨…….”
신수아가 이유를 묻기도 전, 서강림의 모습이 사라졌다.
신역으로 떠난 것이었다.
신수아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고맙다고 말하던 그 얼굴이 너무도 평화로워 보여서 도리어 불안했다.
대체 왜?
신수아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던 그때, 쓰러져 있는 국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강림과 똑같은 그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평안해 보였다.
방금 전, 피폐해진 얼굴로 미소 짓던 서강림의 모습이 죽어있는 국장의 얼굴과 겹쳐졌다.
* * *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와 닿았다.
발아래에 깔린 바닥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얕게 물이 고여 있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작은 파문이 일었다.
바닥에는 신전의 형상이 반사되고 있는 채였다.
눈앞에 있는 신전은 아주 오래되었으며 지독하도록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서강림은 신의 세계에 서 있었다.
무명의 기억 속에서 봤던 장소였다.
희고 투명한 신역을 걸어가자 그 끝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흰 풍경 사이에 흰 인영이 서 있었다.
눈으로 짜낸 듯한 새하얀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여자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스러우며, 위협적이고, 또한 동시에 오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서강림을 향해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목소리.
자신이 잠들 때마다 머리맡에서 밤새 속삭이던 그 목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칼을 벼려 동상을 만든다면, 저것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시체와 죽음을 조각하여 저 목소리를 만들 수 있을까?
저 앞에 있는 것은 불변하는 영원, 숙명이었다.
자신의 평생을 지배해온 존재.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숙명을 죽이고 싶었으나, 이대로 숙명이 소멸한다면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너를 죽이기 전 물어볼 게 있다.”
잔잔한 물가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숙명은 느긋한 시선으로 서강림의 질문을 기다렸다.
영살검의 칼날을 타고 아직 굳지 않은 핏방울이 똑똑 떨어져 내렸다.
“어린 시절 나에게 찾아온 신이 너였나?”
“그래.”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내가 가는 장소마다 사고와 죽음을 일으키는 것 역시 너였나?”
“그래.”
“왜 나였지?”
어린 시절부터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나에게만 이렇게 지독한 운명이 주어졌을까?
그 질문에 숙명이 웃었다.
“인간들이 놋쇠 그릇을 만드는 걸 본 적이 있나?”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숙명의 목소리는 그저 나긋했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처럼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우선 놋쇠를 녹여야 하지. 뼈조차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불로 금속을 녹이고, 그릇의 형태를 잡기 위해 수없이 망치질을 하더군.”
흘러내린 피가 투명한 물에 퍼져 나갔다.
숙명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으나 악취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수면에 숙명의 미소가 반사되었다.
“나는 그것이 만신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서강림은 어린 시절 신열에 앓던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을 녹여버릴 듯한 그 열기와 머리를 부술 기세로 두들기던 목소리.
마치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나는 나에게 걸맞은 그릇을 찾으려 했다. 예전에는 왕과 귀족을, 역사가 바뀐 뒤로는 강한 운명을 타고난 자들을 찾아다녔지.”
서강림은 연구소에서 만들어지던 실험체를 떠올렸다.
우수한 피를 넣어, 길일을 받아 태어난 축복받은 운명의 소유자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서강림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릇은 모두 오래가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어버렸지. 수없이 많은 그릇을 부순 뒤, 나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숙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숙명이라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가장 고결한 자가 아닌 가장 비참한 자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