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마지막 문장에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둘 중 누구도 그 문장에 의혹을 품거나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도현이 장태헌을 향해 말했다.
“신수아 씨를 마지막으로 어디서 봤지?”
“수아 누님, 어제 동쪽 큰 나무 부근에서 본 것 같은데. 유하랑도 봤을 거야.”
“그러면 당장 마주치지는 않겠군. 서두르자. 목우, 유하랑에게 안내해.”
“모옷!”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목우는 용맹하게 가슴을 탕탕 치고는 강도현의 손에 올라탔다.
목우가 지시하는 방향을 향해 장태헌과 강도현은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강림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한편, 신수아를 떠올리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 * *
파편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길게 잡아도 3년을 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곳에서 수십 년을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끔찍한 장소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파편이 할 수 있던 것은 원망과 저주뿐이었다.
다짜고짜 나타나 자신을 살해한 그 여자.
흰 머리를 흩날리며 자신과 사람들을 마치 벌레처럼 살해하던 그 모습을 보며, 여자를 향해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증오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두었다.
서강림,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서강림을 죽이겠다며 날뛰던 그 여자보다 서강림을 보호하던 신수아, 비호문 일행이 원망스러웠다.
그들이 서강림을 끌어냈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이런 세계에 오지도 않았을 텐데.
이곳에 온 이상 보호국으로부터 검을 지켜야 한다는 놈들도 있었지만 알 바인가?
지금 당장 서강림을 죽이고 싶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바로 서강림을 찾아가 그 얼굴에 칼을 쑤셔 넣으리라 다짐하던 그때.
“……!”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서강림이 있었다.
환상일까? 아니면 놈도 드디어 이 지옥에 떨어진 것일까?
후자이길 간절하게 바랐다.
서강림도 이 지옥에 남아 몇백 번 몇천 번 자신의 손에 죽어야 했다.
저 벌레 새끼 때문에 자신이 죽은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서강림-!”
그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서강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충삼품,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그대로 놈의 머리를 날려버리려는 그 순간 서강림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역시 환영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콰직!
강한 충격이 가해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서강림은 제 발치에 쓰러진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이 사람도 그때 백영에게 죽은 사람이네.”
유하랑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향하는 동안, 서강림을 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달려들었다.
무명의 명령에 따라 침입자를 제거하려는 파수꾼들도 있었고 미쳐서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서강림을 알아보고 죽이려 달려드는 파편들 역시 존재했다.
그때 그 대형 마경에서 백영에게 살해당한 자들이었다.
비호문 문파원들은 서강림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유하랑이 그런 서강림을 보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너 정말…… 강해졌구나.”
얼굴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하랑이 감탄하는 모습에 서강림은 괜히 멋쩍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근처에 쌓여 있는 시체들의 산이 보였다.
이곳에 진입했을 때부터 보이던 것들이었다.
그때는 특별히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분명 이곳에서는 모두가 불사자가 된다.
죽었다 한들 며칠이 지나면 재생한다고 했는데, 이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은 무엇일까?
“유하랑, 여기에 쌓인 시체들은 뭐지?”
서강림이 검은 시체 더미를 가리키며 묻자, 유하랑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시체라니?”
“여기 검은 시체가 쌓여 있잖아.”
“……그건 그냥 흙더미인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체들이 눈을 떠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흰 이빨을 드러낸 채 서강림을 보며 웃는 저것들.
마치 귀신이 산 사람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깔깔대는 목소리가 어지러이 귀에 울려 퍼졌다.
“서강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저것들이 환상이었다니, 구별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다니.
‘이 장소가 현세가 아니라 착각하기 쉬울 수밖에 없었어.’
원래 이상한 공간이니, 이런 모습이라고 오해할 법도 하지 않은가.
그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등을 돌렸다.
“……가자, 유하랑.”
유하랑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서강림은 말을 붙일 새도 주지 않고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향해갈수록 파편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강림은 그것들을 베어가며 오감의 날을 세웠다.
여기서 흘러넘치는 피비린내는 진짜일 것이다. 유하랑도 피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파편들 역시 진짜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환영이 껴 있었다 한들, 자신이 구분할 수 있었을까?
“서강림!”
모든 파편이 쓰러진 뒤, 유하랑은 다급히 서강림을 막아 세웠다.
서강림이 피폐한 눈으로 유하랑을 바라보았다.
유하랑이 서강림의 팔을 붙든 채 말했다.
“조심해. 여기서부터는 마수가 나온다.”
-크륵, 크르륵…….
유하랑의 말대로 근방에서 마수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마수가 피와 체액으로 젖은 바닥을 밟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보기에는 개나 늑대를 떠올리게 했으나, 꼭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몸 곳곳은 썩어들어가고 다리가 하나씩 없는 놈들도 많이 보였다.
서강림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쥐었으나 뭔가가 이상했다.
마수들로부터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자신들을 보자마자 달려들었을 놈들이었다.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건가?’
아니, 마수들은 분명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에게서는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하랑과 서강림을 목격한 순간, 그들은 경계를 풀어버렸다.
‘유하랑을 보고? 아니, 아니야. 저것들은…….’
마수들은 서강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흉악하던 마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시선이 된 채로, 마치 동족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때, 마수들 사이로 낯이 익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야인 같은 모양새에 빼빼 말라 갈비뼈가 드러난 채로 히죽이 웃고 있는 저 남자.
시간의 흐름이 일그러졌던 마경에서 마주쳤던 남자였다.
수십 년의 세월을 홀로 지내며, 동료의 시체를 삼키며 업보를 쌓고 경계로 넘어갔던 그 남자.
마수들은 그 남자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마수들은 그때의 그 남자처럼 서강림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것들은 서강림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대하는 듯이.
‘……경계에 다가갈수록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환영도, 악몽도 그 빈도가 줄어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신수아가 동행을 한 덕분에 일시적으로 완화가 되었을 뿐,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자신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유하랑, 나한테서 떨어지지마.”
마수 따위를 잡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서강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수들을 뒤로한 채, 유하랑을 데리고 빠르게 구역을 벗어났다.
유하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강림,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말해봐.”
“그런 거 없어.”
“거짓말하지 말거라! 너 뭔가 이상하니까!”
끌려가던 유하랑이 다리에 힘을 주어 멈춰 섰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의심과 두려움, 우려가 배어 있었다.
서강림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못, 모옷-!”
목우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니 작은 산등성이 위로 무언가가 보였다.
어른거리는 실루엣, 저 익숙한 그림자.
“강림이 형!”
“서강림!”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강도현과 장태헌이었다.
죽었던 그 날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그 모습.
그들은 서강림을 보자마자 유하랑이 그랬던 것처럼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서강림 너지? 안 죽은 거 맞지?”
“흐윽, 흐어엉, 강림이 형……!”
장태헌은 울음이 터져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피부를 통해 와닿았다.
정작 죽은 것들은 본인이면서, 그것도 서강림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으면서.
그때 강도현이 서강림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더니 반가움은 사라지고 경악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기운이 왜 이래?”
서강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탁한 기운에 강도현은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연기에 파묻힌 것만 같은 이 독한 기운.
눈물을 질질 짜던 장태헌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강도현을 돌아보았다.
“왜? 강림이 형이 어떤데?”
“……서강림, 네가 설명해봐.”
변명을 하려고 해도 강도현의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짧은 망설임 끝에 서강림이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자, 세 사람은 경악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때 우리 능력을 훔치는 바람에 업보를 쌓았다고? 아니, 나는 그냥 가져가도 괜찮았는데?”
장태헌이 분통한 어조로 외쳤다.
이야기를 함께 들은 유하랑 역시 한숨을 내쉰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골치 아파졌네. 그나저나 회귀하면서 능력은 소멸했는데 업보만 남다니. 불공평하지 않나?”
유하랑이 그렇게 말하자, 강도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파편으로 남은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애초에 업보라는 게, 단순히 죄업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콰아앙!
그때,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마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마수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 마치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얼마나 강력한 공격이었는지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흙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유하랑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서강림, 빨리 가자! 멀어져야 해!”
유하랑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상급 마수라도 나타난 것인가?
그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부터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빠르고 날카로운 발소리에 모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이 다급히 서강림을 끌고 도주하려고 하였으나, 발소리는 어느새 근처까지 와 있었다.
-콰지직!
발소리의 주인이 허공에서 낙하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있던 시체들의 머리가 모두 터져버리고 말았다.
질척한 피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강림의 코를 간질이는 것은 혈향이 아닌 익숙한 나무 향기였다.
어둑했던 세계가 그 향기를 따라 밝아지고 있었다.
서강림의 귓가에 낄낄대던 환청들도 그 빛을 피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서강림은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살리고자 제 목숨을 내던지고, 비참하게 살해당했던 날의 저 모습을.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있었다.
안대로 가려진 한쪽 눈과 빛을 잃은 녹색 눈동자.
백영에게 살해당한 날의 신수아가 서강림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