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유하랑의 선전 포고에 그들은 발끈한 기색이 되어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세가 무색하게도 유하랑은 혼자서 상대를 모두 도륙하고 있었다.
내 제압령으로 인해 굳어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몰살은 순식간이었다.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후우, 다 정리했네.”
주위에 피냄새가 흥건하게 피어올랐다.
다행히 유하랑은 다친 곳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유하랑,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괜찮다. 여기서는 전부 재생하니까. 저들도 며칠 지나면 살아날 것이다.”
유하랑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재생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꽤나 위험하게 들렸다.
역시 이곳은 현세가 아니다.
유하랑은 시체들을 등진 채, 대량 학살을 자행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처연한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도…… 너도 죽은 것이냐? 네가 여기에 오지 않아서 너는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안 죽었어.”
“그러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비호문 일행이 몰살당한 뒤, 백영을 죽여 회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보호국을 상대하기 위해 무명의 검을 찾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끝내자 유하랑은 놀란 눈이 되어 있었다.
“서강림이 회귀라니……. 네가 어떻게 백영을 쓰러트린 거지?”
“너희로부터 운명을 훔쳤어.”
“믿기지 않아. 너는, 너는 연약해서 늘 내가 지켜주곤 했는데…….”
나보다 한참 작고 어린아이에게 듣기에는 민망한 말이었다.
유하랑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인, 성장한 유하랑이었다.
“유하랑, 이젠 네가 이야기해줘.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 여기는 대체 어디인지.”
“……그래.”
우리는 일그러진 세계 사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하랑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가 되었다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죽었지만 회귀가 반복되면서 이번 생의 유하랑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랑은 죽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유하랑은 누구일까?
유하랑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갔다.
“원래 나는 거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고 하더구나. 회귀 중 예정에 없던 죽음을 맞이했을 뿐. 그런 사람들은 저승으로 가는 대신 이 균열로 흘러들어오고.”
“…….”
“말하자면 전생의 기억, 영혼의 조각인 셈이지. 여기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편이라 부르더군.”
주위를 돌아보자 수많은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모두가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발생한 희생자란 말인가.
이곳은 지옥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런 장소에서 유하랑이 살고 있다니.
“여기서 나갈 수는 없는 거야?”
“못 나가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는 있다고 한다.”
“어떻게?”
“이 회귀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 불변하는 영원이 소멸하면 이 틈새도 닫힌다고 하더라.”
이 지옥 역시 불변하는 영원과 연관되어 있었다니.
빠져나갈 방도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갇혀있는 이상 불변하는 영원을 죽일 방도가 없다.
내 속내를 읽었는지 유하랑이 말했다.
“우리 스스로 죽일 방법은 없지. 대신 파편들은 이곳에 숨겨진 검을 지키고 있어. 언젠가 무명이 검을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서.”
“…….”
“우리는 백영에게 죽었지만 대다수는 보호국에게 살해당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더군.”
무명이 검을 참 적합한 공간에 숨겨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진입하더라도 수천, 수만의 파수꾼들이 존재한다.
이 영원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불변하는 영원에 대한 증오로 벼려진 자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자들은 가장 유능한 파수꾼이었으며, 또한 가장 저주받은 수호자이기도 했다.
그런 역할을 유하랑이 짊어지게 되다니.
나는 유하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그래서 검을 지키고 있는 거야?”
“으음. 나는 방관자에 가깝다. 나는 불변하는 영원보다 다른 쪽이 더 증오스러우니까.”
어린 얼굴에 처절한 증오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찢어 죽일듯한 그 눈빛.
유하랑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뒤늦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넌 검을 찾으러 온 거지?”
“응. 어디에 있는지 알아?”
“언뜻 듣기로는 균열의 가장 깊은 곳에 보관해뒀다고 하더군.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깊은 곳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방금 전 나를 습격한 파수꾼만 해도 수십 명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몇 배나 더 많은 수를 마주쳐야 할 테니 서둘러야 했다.
“고마워. 그러면 난 가볼게.”
“어, 그냥 가게……?”
유하랑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늘 어린아이 같은 유하랑이었다.
유하랑이 우물쭈물 제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 되겠느냐? 몇 시간 정도 기다리면 다른 사람들도 올 거야. 다들…… 서강림을 보고 싶어 했어.”
그 말을 듣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고 싶어 했다니.
유하랑은 살짝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몇 년 정도였을까. 네가 여기 없다는 사실에 우린…… 기뻤지만 동시에 보고 싶었어.”
“…….”
“너무 보고 싶었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지키려다 죽어놓고서, 그럼에도 이들은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모두를 끌어안고, 보고 싶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 눌러앉아 유하랑과 몇 날 며칠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멈춰서 있을 수는 없었다.
“……검을 찾으면, 그 뒤에 이야기하자.”
해후를 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언제 보호국이 다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이상, 검을 확보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그 이후 여유가 있다면 이곳의 사람들과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유하랑은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겠지. 뭐, 불변하는 영원이 빨리 소멸해야 이 공간도 닫힐 테고.”
그 이야기를 듣자 문득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이 공간이 닫히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공간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이 공간이 닫히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소멸이나 계승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던데. 계승할 경우 원래의 몸쪽으로 흡수될 거라더군.”
그 이야기만으로 불변하는 영원을 쓰러트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겨났다.
고통받는 비호문 일행들을 하루라도 빨리 이 틈새에서 꺼내와야만 했다.
그때 유하랑이 말했다.
“그나저나 서강림에게 맡기자니 걱정인데……. 이 험한 곳에 혼자 보내기도 뭣하고.”
반쯤은 농담으로, 반쯤은 진짜 걱정이 섞인 표정이었다.
유하랑이 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일단 내가 길 안내를 해주마. 너도 여길 혼자 다니면 헤맬 테고.”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내게도 좋은 일이었고, 동행하는 동안 유하랑과 조금 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하랑은 이내 기쁜 얼굴이 되었다.
“좋아.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다른 일행들에게도 네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둬야 하니까.”
유하랑이 이능을 발동시키자 여러 마리의 목우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목우들을 대기 시킨 뒤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유하랑이 준비를 하는 사이, 나도 몇 가지를 확인해보았다.
[해당 영역에서는 신수를 소환할 수 없습니다!]
[무불 통신에 접속합니다!]
신수를 소환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무불 통신은 연결되어 있었다.
강도현과 통신을 연결하자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강림, 괜찮아? 별일 없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꽤나 다급했다.
하긴, 위험한 곳일 거라고 모두가 걱정했으니까.
나는 강도현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그쪽 상황은 어때?”
“[보호국은 잠잠한 상황이야. 우선은 그쪽을 감시하면서, 네가 말했던 것처럼 비통의 날을 대비하고 있다.]”
비통의 날.
마수와 문이 대량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참극의 날이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머지않아 그날이 찾아온다.
비호문이 사람들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짊어지고 있는 이상, 비통의 날을 대비해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선생님이 계산한 우리에게 찾아올 미래였다.
[비통의 날이라고 했던가? 그날, 단단히 흉수가 깃들어 있다. 강림이 너와 관련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나와 있어.]
비호문 일행의 사망이라니, 지난 생에는 없던 일이었다.
비통의 날에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뭔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비호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다 죽을 정도라면, 높은 확률로 숙명이 관여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것일까?
비통의 날이 오기 전에 무기를 찾아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대비를 부탁한 상태였다.
“그날까지는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볼게. 문제 생기면 신수아 씨 통해서 연락 줘.”
“[알았다.]”
무불 통신이 끊긴 뒤 잔향처럼 침묵이 남았다.
반드시 검을 찾아 돌아가야 했다.
그때, 유하랑이 쪽지를 다 적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우들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서 이걸 전해줘. 서강림이 왔다고 적어놨다.”
“못모옷!”
목우들은 쪽지를 받은 뒤 사방으로 후다닥 흩어졌다.
이곳을 나가기 전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장태헌, 강도현, 신수아…….
그 외의 다른 비호문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까?
“서강림, 준비 다 끝났다. 가보자.”
아쉬움은 잠시 묻어놔야 했다.
지금 여기서 미적거리다가는 바깥의 비호문도, 균열 안의 비호문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유하랑의 안내를 받아 균열 안쪽으로 나아갔다.
* * *
피비린내가 가득한 균열 사이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장태헌이 휘두른 주먹이 마수의 머리를 박살 내기가 무섭게 또 다른 적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마수 중 하나가 장태헌의 어깨를 물어뜯기 전, 날카로운 검격이 마수의 몸을 반 동강 냈다.
강도현이 휘두른 검에 검은 피가 묻어났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마수를 정리한 끝에 장태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귀찮아 죽겠어.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장태헌 역시 백영에게 살해당하던 그 날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채였다.
죽은 날로부터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도현이 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일단은 처리했으니 당분간은 잠잠하겠군.”
그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마수들은 모두 처치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부활할 것이다.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가 묵묵히 사체들을 응시하던 그때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오옷-!”
유하랑의 목우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장태헌과 강도현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가보니 유하랑은 없었고 목우 하나만이 있었다.
그것이 쪽지를 내밀었다.
“모옷!”
장태헌이 쪽지를 받아 대수롭지 않게 펼쳤으나, 이내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강도현도 뭔가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데?”
“강림이 형이 여기 왔대.”
“뭐? 서강림도 죽은 거야?”
“아니. 파편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왔대. 우리가 죽은 뒤, 백영의 능력을 훔쳐 회귀했다는데…….”
쪽지에는 서강림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그가 검을 찾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합류해서 만나자는 내용이 주 골자였다.
두 사람은 서강림이 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쪽지의 마지막 문장에 시선이 박혔다.
[서강림과 신수아가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