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안나비는 무명의 강력함을 직접 체감했었다.
만약 광대패가 휘말렸다면 그들은 높은 확률로 시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안나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들 무사하면 좋겠는데.’
* * *
방바닥에 빈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서강림은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든 채 안에 든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이현이 주었던 약이었다.
몇 병째 마시고 있는지는 세지 않았다.
그저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약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빈 병 하나가 더 바닥을 굴러가고, 서강림은 다시 새로운 약병을 집어 들었다.
갈기갈기 찢긴 내장으로 물약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신역에 들렀다 온 지 약 사흘이 흘러 있었다.
오자마자 기절하듯 의식을 잃었고 요한 신부가 사력을 다해서 그를 회복시켰으나 아직 완전히 몸이 낫지는 않았다.
이렇게 약을 퍼부어도 통증은 남아 있었다.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역시 신역에서 너무 무리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입은 부상이 심각하기도 하였고, 신력을 과도하게 쓴 탓에 여기저기가 만신창이었다.
몸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 역시 고통스러운 참이었다.
‘몸이 약해지니 경계가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육체에 상흔이 나면 영혼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서강림이 부상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면 환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침범해 들어왔다.
‘하지만 참을만해.’
그가 보는 세상이 붉었다.
사방이 핏빛으로 녹아내리는 와중이었으나, 아직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인 진실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이딴 흉흉한 환영 따위는 얼마든지 버텨줄 수 있었다.
‘무명의 운명을 흡수한 덕분에 확실히 강해졌어.’
지금이라면 누구라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만 같았으나 불변하는 영원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이들이 운명을 믿고 있었으니까.
온 세상이 운명을, 팔자를, 숙명을 믿고 있다.
자신에게 정해진 사주팔자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넘쳐흐르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는 좋은 팔자로 태어나고 싶다며 목숨을 끊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었다.
믿음이 힘이 된다면 불변하는 영원은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갖고 있을까.
그토록 강했던 무명조차도 불변하는 영원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수천 번의 세계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최소한 그 검을 확보해야 한다.’
서강림은 마지막 약을 마신 뒤, 입가에 흘러내리는 액체를 거칠게 닦아냈다.
어느 정도 몸은 회복되었으니 이제 움직여야 했다.
‘지금 당장 균열로 갈 수는 있겠지만…….’
손바닥을 펴보니 그곳에는 무명이 남겨 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득히 오래전 죽어버린 언어로 쓰인 터라, 그것은 본 적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지만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무명의 운명을 흡수한 덕분인가.’
하나는 균열로 향하는 방법, 하나는 숙명의 신역 좌표였다.
두 가지 모두 서강림에게는 귀중한 정보였다.
그 외로도 무명은 많은 이능을 남겼고,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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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각인(刻印)
[등급] 신일품(神一品)
[설명] 새겨진 문장이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능력. 내용에 따라 소비되는 신력이 다르며, 주체가 되는 대상에게 직접 문장을 새겨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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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대가만 치른다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야말로 신이 가질 법한 능력.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에 흥분할 법도 한데, 서강림의 시선은 그저 차분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겠지. 그런 능력이라면 진즉 무명이 불변하는 영원을 죽였을 테니까.’
서강림은 묵묵히 설명창을 읽던 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왼팔에 문장을 적어 넣었다.
[《불변하는 영원을 즉사시키는 능력을 갖는다.》]
그 한 문장만으로 이 모든 일이 끝이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문장을 새겨 넣자마자 곧 경고가 떠올랐다.
[해당 문장을 각인하는데 필요한 신력이 부족합니다.]
역시 안될 줄 알았다.
그는 그 아래에 또 다른 문장을 적어보았다.
[《회귀의 이능을 획득한다.》]
[해당 문장을 각인하는데 필요한 신력이 부족합니다.]
[《모든 업보를 지운다.》]
[해당 문장을 각인하는데 필요한 신력이 부족합니다.]
역시 이것도 안 되는가.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운 문장을 적어보았다.
[《경계를 넘을 경우 즉사한다.》]
[보유 신력의 1.21%를 소모하여 각인할 수 있습니다. 각인하시겠습니까?]
생각보다 적은 양의 신력이 소모되어서 의외였지만, 그는 각인하는 대신 문장을 문질러 지웠다.
경계에 관한 부분은 이미 생각해둔 방책이 있으니, 그게 실패하면 각인을 새기면 된다.
적은 양의 신력이지만 만약을 대비해 아껴두는 것이 좋았다.
‘제한은 있지만 확실히 쓸모는 있어. 일단은 균열에 가서 검을 찾아와야 하겠는데…….’
-똑똑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와 서강림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노크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서강림이 살짝 문을 열자 그 틈새를 통해 상쾌한 녹음의 바람이 불어왔다.
“강림 씨, 몸은 좀 괜찮아요?”
신수아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쉬고, 말을 건네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의 세상은 정화되어 갔다.
약을 씹어 삼킬 때도 사라지지 않던 환영이 신수아의 존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신수아 씨,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수아 역시 신역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저도 괜찮아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그 말에 서강림은 퍼뜩 방 안의 상태를 떠올렸다.
방 안에는 수십 개의 약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방이 이 꼴인데 신수아를 들일 수 없었고, 또한 자신이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 공격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방 안이 지저분해서 밖에서 이야기하죠.”
그는 신수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성큼성큼 공용 공간으로 향했다.
내심 누가 있기를 바랐는데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다.
서강림이 소파에 앉은 뒤 신수아를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이 오로지 서강림과 신수아, 두 사람뿐이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서강림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뀐 것만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도 바뀌어 있었다.
‘신수아에게 신내림을 한 뒤, 기묘한 연결감이 생겼어.’
지난번 낙원국에서 왕자들을 만신으로 삼았을 때도 이런 감각을 받았었다.
그러나 왕자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때 느껴 보지 못했던, 마치 영혼이 연결된 듯한 감각.
떨어져 있음에도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
눈을 감아도 그녀의 존재가 어둠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자신의 몸 안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신수아도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까?
“신수아 씨,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신내림을 하는 것 외에는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은 신수아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 사실에 서강림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신수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사과를 하나요?”
“여러모로 단점이 있으니까요. 인지도 관련된 문제도 있고.”
이제부터 신수아가 쌓는 인지도 중 대다수는 서강림에게로 넘어오게 될 것이다.
서강림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이 이상 신수아가 신으로서 성장하기에는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은데, 신과 만신은 한쪽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신내림을 해제할 수 없는 걸로 압니다.”
자신이 신수아의 성장을 막을뿐더러 그녀에게는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자신 같은 신을 갖게 된 신수아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더 좋은 신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더더욱 강해질 수 있을 텐데.
신수아는 서강림이 말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좋아요. 강림 씨가 저의 수호신이라는 게.”
그녀는 너무도 담담해 보였고, 평온해 보였으며, 언뜻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서강림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성격상 거부감을 표하거나 싫어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태연하다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 저 강림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먼저 공격에 나서기도 애매한 것 같아서요.”
이제는 누가 적인지 명확해졌다.
남은 것은 보호국과 숙명을 섬멸하는 것뿐이었지만, 지금 행동에 나서기에는 일렀다.
불변하는 영원을 쓰러트릴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보호국을 상대하려 합니다.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몇 가지 준비를…….”
말을 이어가던 서강림의 입술이 순간 멈췄다.
그는 신수아가 아닌, 신수아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복도에 검은 얼룩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환영이다.
검은 환영이 금방이라도 기습을 할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으나, 신수아의 존재 때문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거리도 멀고, 위협적인 형상은 아니었으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수아가 옆에 있음에도 경계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어.’
예전에는 시야가 닿는 곳이 모두 정화가 되었건만, 이제는 가장자리부터 침식하기 시작했다.
저것이 어느 틈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서강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선 보호국에 어떻게 대항할지, 비호문 일행 모두에게 이야기를 해둘 생각입니다. 저는 잠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신수아와 함께 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안락하였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신수아의 존재는 자신에게 위안이었으나 자신의 존재는 신수아에게 위협이었으므로.
그가 다급히 자리를 뜨려던 찰나, 신수아가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강림 씨.”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강인했다.
신수아는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붙든 채 물었다.
“왜 저는 자꾸 강림 씨가 도망가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
“그리고 아직 이야기 안 한 것 있잖아요. 균열에 갈 계획 아니었어요? 그것도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야기할 생각이었나요?”
서강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려 했건만.
“또 숨기려고 한 건가요? 경계에 대해서 숨겼던 것처럼.”
그녀의 입에서 경계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서강림은 당황하고 말았다.
신수아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신수아는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었고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체온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강림 씨의 상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옆에 있으면 나아지는 것도요.”
“…….”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세요. 같이 있어요.”
팔을 잡고 있던 신수아의 손이 한 차례 떨어지는가 싶더니 아래쪽으로 향했다.
신수아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같이 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