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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사주 헌터-221화 (220/256)

<221화>

세계가 회귀하여도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지 않는다니.

그 말은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왔으나, 그 장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곳은 가장 깊고 어두운 장소였다. 쉽게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검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지. 그곳에 가는 방법은…….”

무명이 힘없는 손길로 서강림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서강림은 손바닥에 뜨거운 무언가가 새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확인해보니 그곳에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사용하면 균열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한 명밖에는 보낼 수 없겠군. 범의 아이야, 네게는 다른 것을 부탁하겠다.”

신수아는 자신이 호명되자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가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이 힘겹게 손짓하여 신수아를 불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전생의 너를 죽인 것을 사과한다. 그리고…….”

피비린내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신수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손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무명은 모든 이야기를 끝낸 뒤 고개를 거두었다.

그가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신수아가 검을 빼 들었다.

-서걱!

상처투성이인 몸에 최후의 빗금이 새겨졌다.

신수아의 검이 무명의 가슴에 박히며 피가 흘러넘쳤다.

이미 모든 문장이 지워져, 타인의 공격을 무효화 하는 능력 역시 사라져 있었다.

무명은 가슴이 꿰뚫린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쿨럭……. 범의 아이야, 미안하다. 너에게 신살의 업보를 짊어지게 해서…….”

“……강림 씨가 짊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래, 그래. 그래도 나의 죽음이…… 네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스로 자결을 할 수도 있지만 굳이 신수아에게 죽여달라 부탁한 것은 공적치를 위해서였다.

신을 살해하였으니 그녀에게 상당한 공적치가 쌓일 것이었다.

무명은 바르작 몸을 떨며 서강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야……. 기억해라. 운명은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내 업보를 너에게 건네 미안하다. 나를, 너의 양분으로 삼아서 나아…….”

그의 목소리가 낙엽처럼 흩어졌다.

바닥에 늘어진 무명의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죽어버린 신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서강림은 그 유해의 앞에 서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신수아의 검 끝에서는 아직 더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서강림을 향해 말했다.

“강림 씨, 일단은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아요.”

-쿠르릉…….

서강림도 신역이 느리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지진이나 해일의 전조 증상처럼 느껴졌다.

무명이 죽으며 신역이 붕괴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직 무명이 남긴 유산이 있었으니.

그가 무명의 사체로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댔다.

[이능 ‘사주 훔치기’가 발동됩니다!]

무명의 운명을 강탈한 순간, 우주가 침범해 들어왔다.

무한히 시야가 확장되는 듯한 감각, 파괴력, 힘.

영혼이 터져 나갈 것 같은 힘이 용암처럼 자신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천 년간 쌓여온 증오와 회한도 함께.

[운명 강탈이 종료되었습니다!]

“강림 씨, 괜찮아요?!”

이능이 종료됨과 서강림의 다리가 꺾였다.

이미 육체는 무명과의 전투로 인해 한계였던 상황이었던 와중 운명 강탈의 여파로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서강림을 신수아가 다급히 부축하여 신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쿠르릉…….

무너져 가는 신역 한가운데에는 신의 주검이 남겨져 있었다.

피와 먹에 젖은 그 신은 어딘가 모르게 허탈해 보이기도 하였으며, 후련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위로 천장이 무너져내려 더 이상은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서강림의 운명에 개입해 있던 큰 흐름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서강림의 운명 등급이 용일품(龍一品)으로 상승합니다!]

21. 균열

“생환자 21명, 그중에서 중상자가 14명. 그 외 인원은 사망 혹은 실종되었습니다.”

안나비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보고라기보다는 부고에 가까웠다.

살아 돌아온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수가 몇 배는 더 많았으며, 시체조차 건지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짙은 고통이 어려 있었다.

몸의 상처는 나았으나 영혼은 썩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안나비를 보고 있던 서문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아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안나비 차사. 괴로운 경험을 했군요.”

서문용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마치 이슬처럼 영롱하고 애처로웠다.

서문용녀는 안나비를 잠시 안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물었다.

“임무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리고 하백헌 팀장은……?”

생환자 명단에 하백헌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사망, 혹은 실종되었음을 의미했다.

안나비는 정자세로 서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첫 번째의 주인이 갖고 있던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생사여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백헌 팀장님의 최후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분명 다들 결계 안으로 강제 이동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죠.”

서문용녀의 눈은 어느새 물기가 말라 있었다.

“신역이 붕괴한 것을 보면 첫 번째의 주인은 아무래도 사망한 것 같군요.”

그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으나 마음 놓고 기뻐하기에는 부족했다.

서문용녀의 설명에 안나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하백헌 팀장님이 무명을 쓰러트리고 그 과정에서…….”

“같이 공멸했을지도 모르죠.”

공멸이라는 단어가 안나비의 귓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작 그 단어를 입에 올린 서문용녀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가 안나비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대패와 조우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생포하지는 못했고, 생사도 불명이라…….”

서문용녀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무명이 죽은 건 확실하다. 다만 누가 무명을 죽였는지 장담하기가 어려워.’

무명에게는 상흔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뼈 단검을 갖고 있던 하백헌만이 유일하게 무명을 죽일 수 있었으나, 그 무기를 빼앗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부에는 제3의 세력, 광대패가 있었으니까.

‘광대패가 어떻게 무명에 대해 알아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갔다면 무명과 손을 잡기 위해서 방문했을 확률이 높은데…….’

그런데 도리어 무명이 죽어버렸다.

광대패가 무명을 죽일 이유가 있나?

그들은 단지 보호국을 붕괴시키고 싶어 하는 집단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서강림의 행적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서문용녀는 서강림에게 사람을 붙여둔 상태였다.

워낙 신출귀몰한 터라 그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요 며칠 간은 마치 증발한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마경에서 사냥을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신역에 방문한 것이라면?

‘광대패와 서강림이 접촉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서천꽃밭에서도 서강림은 광대패와 조우했었다.

그때 광대패가 서강림에게 협조를 요청했다면?

증거는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서문용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안나비를 힐끗 보았다.

“그 외에 보고할 사항은 없나요? 목격했던 광대패에 대해서라든지.”

지금은 작은 단서라도 필요하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 차사가 홀로 광대패와 싸워 그들을 쫓아냈다고 들었다.

서문용녀가 해부할 듯이 안나비를 주시하던 중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보고서에 적어 두었습니다.”

서문용녀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강단 있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안나비 차사도 많이 지쳤을 텐데. 그러면 가서 쉬도록 해요.”

안나비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조용히 서문용녀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휴게실로 들어선 뒤에야 긴장감이 풀려 그녀는 숨을 깊게 토해냈다.

‘들키지 않았다.’

안나비는 서문용녀에게 보고할 때, 딱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보고서에 적힌 것이 자신이 아는 전부라고.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작은 입술을 깨물며 토우가 자신에게 전달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애초에 너희가 날 영원의 그릇으로 삼으려고 했잖아? 그 상황에서 머무르는 놈이 미련하지.]

[어쩔 수 없잖아요. 실험체들이 다 죽었으니 말이죠.]

공주와 하백헌의 대화를 몇 번이나 떠올려도 머릿속에는 혼란뿐이었다.

실험체? 그런 것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외로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정보가 잔뜩이었다.

[그렇지만 곧 그분이 세상을 장악할 거예요.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소모품이라니, 그보다 좋은 일도 없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데도 말이야?]

[어라,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었어요? 분명히 스카우트 거절한 만신들을 잡아 죽이던 건 공 팀장님 아니었나…….]

불변하는 영원은 세상을 장악하려고 한다.

또한 스카우트를 거절하던 만신들을 보호국이 죽이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하백헌이 스스로 고백했다.

믿고 따르던 공 팀장이 그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호국을 위해 일하다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은?

“어, 안나비.”

그때, 휴게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같은 팀의 차사인 주성태였다.

그 역시 이번에 신역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참이었다.

“너 휴가 낸 거 아니었어? 너도 부상이 꽤 심했던 걸로 아는데.”

안나비는 주성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이번에 신역에도 함께 다녀왔다.

안나비가 그를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공유한다면?’

과연 믿어줄까? 장담할 수 없었다.

광대패와 마주치고, 토우에게 이야기를 들은 자신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와중 동료들이 이 사실을 믿을 리가 없다.

도리어 이 사실을 상부에 고발할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사람도 부족하니 저까지 휴가를 내면 일손이 부족할 겁니다.”

“참나,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난 휴가 쓸 거니까 너도 써라.”

걱정 섞인 빈정거림에 안나비는 고개만 한 번 꾸벅이고는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여러 동료들과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었으나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동료들에게 영원히 숨길 수는 없어. 그렇다고 지금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더욱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그러다 문득 안나비의 머릿속에 광대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신역에 있던 광대패들은……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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