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불변하는 영원, 숙명.
그 단어를 듣자 오한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강림은 언젠가 서화경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생님, 태어날 때부터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고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저는 그냥 빨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신에게 깃든 흉악한 운수.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살아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린 서강림이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서화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인간에게는 운명이 정해져 있지만 바꾸는 것도 가능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 거야.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서화경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강림은 여전히 의아했었다.
나중에 이현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사뭇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운명은 바꿀 수 있지. 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운명이 있다. 처음부터 정해진 불변의 운명, 그것을 숙명이라 부른다.]
서화경은 설명을 해줄 때 숙명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이야기했을 텐데도.
그녀의 침묵은 숙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때, 옆에서 무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내 손에서 불변의 운명, 숙명이 태어났다. 나는 인간이 첫 번째로 만든 신의 주인이었다.”
흰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백영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백영이 아니었다.
불변하는 영원은 온화한 신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영원은 그 뒤부터 인간의 운명을 정하고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불온한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운명을 부여하고, 내게 도움이 될 자들에게는 찬란한 미래를 선사했지.”
불변하는 영원은 인간들의 삶에 자신의 명령을 새겨 넣기 시작하였다.
운명을 의심하던 자들도 있었으나 무명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미래를 보자 점점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부유하고 평온한 생을 살다, 죽은 이후에는 신이 되었다. 죽음 뒤의 삶은 더욱 찬란했다. 내가 만든 신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신이 점점 커져 나가며 인간의 운명, 세계의 미래를 결정하다니.
그토록 강한 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황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무명의 얼굴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 마디의 비명 없이도 끝도 없는 후회와 회한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숙명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의지가 강한 자가 운명을 거역하는 일도 있었지. 숙명을 부여하려 해도 신력이 부족하여, 그녀는 곧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가 숨을 한 번 삼킨 뒤 제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도망치고 싶은, 숨고 싶은 사람처럼.
“그때부터 숙명은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게 지나치게 불행한 운명을 부여했지. 사람들이 왜 이런 운명을 주었냐며 저주하고 비난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억 속의 무명이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고아한 신전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현세를 바라보고 있는 숙명이 보였다.
[숙명이여, 어째서 인간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운명을 부여하는가! 대체 왜!]
[그들은 불행할 때만 신을 찾기 때문이다.]
숙명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불타고 파괴된 도시가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간이 자신을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도 숙명은 기분 좋은 연주를 듣는 듯 미소 지은 채였다.
[인간들에게 운명을 부여하며 알게 되었다. 그들은 평온한 상태에서는 운명이나 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업적을 이룬 것은 모두 자신의 덕이라 생각했다.]
[…….]
[반면 비극에 던져지면 그때부터 신을 찾았다. 내가 부여한 운명이 아닌데도, 그런 불행을 내가 주었다고 생각하며 내 이름을 욕설과 함께 외쳐댔지.]
숙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고 있음에도 소름이 돋는, 기이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일그러짐이었다.
[그들이 나를 이야기하고, 나를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절망이 필요하다.]
이제는 기억 속의 무명도, 현재의 무명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망, 그리고 후회.
무명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숙명은 점점 강해져 갔다. 운명이 아닌 숙명을 부여함으로써 인간들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
“나는…… 나는 내가 인간들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뒤늦게라도 숙명을 없애려 했지만 그것은 너무 강인해져 있었다. 인간들은 운명을 믿었고, 그 믿음은 그녀에게 힘을 가져다주었다.”
수천 년간을 이어져 온 믿음.
우리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나마 내가 적은 신화가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만신이 있어야지만 신이 제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으로 인해 숙명은 온전하지 못했지.”
“…….”
“그렇게 몇천 년이 흘렀다. 내게는 다행이었다. 인간들이 현명해지며 예전만큼의 신앙이 사라졌다. 낙뢰와 역병이 신의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운명을 믿지 않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러면 불변하는 영원의 힘도 약해진 것 아닙니까?”
“그래, 그랬지. 각성의 날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무명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강림을 돌아보았다.
“각성의 날이 시작되고, 사람들의 능력이 개화되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강력하게 믿게 되었다.”
“설마 각성의 날도 숙명이 발생시킨 겁니까?”
“그건 아니야. 각성은 마치 자연 현상 같은 것이지. 숙명이 이용하고 있을 뿐.”
지금만큼이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팔자를 믿는 시기가 또 있을까?
예전에는 사주를 미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사람이 소수가 되었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좋은 운명을 부여해주려는 부모들이 있었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포자기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믿음은 숙명에게 힘을 가져다주었다.
헌터들이 강력해지고 권력과 부를 얻게 되면서 더더욱.
“숙명은 보호국을 만들고, 대마경을 조성하여 사람들이 헌터가 되기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사주팔자, 운명이라는 것을 맹신하도록.”
흐릿하던 운명이 각성의 날과 함께 형체를 갖추며 사람들은 운명을 믿기 시작했다.
주어진 등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믿음과 함께.
그 믿음이 족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였다.
“숙명을 막기 위해, 나는 만신들을 만들어 보호국을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있었지. 그러다 나는 백영을 발견했다.”
그의 말과 함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은 어둑한 숲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실험복을 입은 백영이 부상을 입은 채, 수풀 사이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보호국의 연구소에서 실험체 하나가 탈출했지. 숙명의 신력을 품고 있던 만큼 그것은 무척 강력했고, 또한 보호국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신으로 삼은 겁니까?”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나는 내 신력의 상당수를 소모하여, 백영에게 회귀의 이능을 부여했다.”
서강림은 백영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어두운 숲속에서 허공을, 서강림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영은 이쪽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영을 필두로 나는 보호국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몇백 번, 몇천 번을 실패했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 쓰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회귀를 선택하는 백영이 보였다.
서강림은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를 보며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단 한 번이지만 자신도 회귀했기 때문인 걸까?
“그러나 회귀는 만능이 아니었다. 백영 역시 업보를 쌓으며 경계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회귀의 기회는 몇 번 남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차악을 선택했다.”
풍경이 일렁이며 또 다른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백영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칼은 피에 젖어 있었고, 발아래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숙명을 죽일 수 없다면 최소한 숙명의 그릇이 될 만한 자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시간 벌이는 될 테니까.”
그 명령에 따라 백영은 사람들을 죽여갔다.
숙명이 조금이라도 눈독을 들인 자라면 시체가 되고 말았다.
보호국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백영을 추격하였고, 곧 잡힐 상황이었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그릇이 남아 있었다.
은밀하게 처리하려 하였으나 시간이 없었다.
백영은 마지막 그릇이 있는 마경으로 향했다.
다른 통로를 이용해 마경 안으로 들어가, 불가살이를 쓰러트리고 나오자 수백 명의 사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사람의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다.
[서강림은 어디에 있지?]
서강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는 이 풍경을 잘 알고 있었다.
서강림과 백영이 처음으로 조우한 날의 풍경.
백영과 신수아가 조우하는 것을 끝으로 풍경이 암전했다.
“서강림, 네가 죽는다면 숙명은 모든 그릇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수십 년 정도는 기회를 벌 수 있었을 테지. 그러나 우리는 실패했고, 도리어 네가 회귀의 이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들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서강림이 잠시 침묵하다 무명을 바라보았다.
“이미 불변하는 영원은 수십 번이나 만신을 바꿔왔습니다. 모두 일회용품이었죠. 나 역시 그런 그릇 중 하나 아닙니까?”
“그릇 후보들은 온전하게 숙명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만약 숙명이 온전한 그릇에 강신을 하게 되면…….”
무명의 두 눈동자에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는 능력을 온전하게 되찾고 만다. 모든 인간에게 변화 불가의 숙명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그 강대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수아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서강림은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
“전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기껏해야 충급일 뿐인데, 왜 제가 그릇 후보입니까?”
“나 역시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가는 것도 같다.”
무명이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가장 밑바닥에서 온갖 고통과 비극을 겪으며 위로 올라와, 자신에게까지 도달한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꿔나가고 있는 인간.
서강림의 존재 자체가 운명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한 번의 회귀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운명을 거역하며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너는 숙명의 유일한 그릇이자…… 대적자일지도 모르겠구나.”
무명은 그렇게 말하더니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붉은 피가 입가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너에게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없다. ……숙명을 죽일 검은 안전한 장소에 숨겨두었다. 너에게 그 검을 맡기도록 하겠다.”
“그 장소는 어딥니까?”
무명이 느릿하게 숨을 내쉴 때마다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흰옷은 이미 그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명이 고통을 삼키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나는 수많은 세계가 태어나고 닫히는 것을 보았다. 세계가 반복되면 죽음도 생도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회귀하는 세계의 틈새에서 균열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