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무명이 강제로 신내림을 하려던 그때, 서강림은 그 전에 신수아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상황에서 무명의 신내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먼저 신수아에게 신내림을 하는 것.
아무리 무명의 명령이 절대적이어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바꿀 수는 없었다.
그가 신수아에게 신내림을 시도하자,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서강림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신내림을 받아들였다.
[이능 ‘보호수의 그늘’이 발동 중입니다!]
[지정 구역 내에 있는 아군의 능력치와 회복 속도를 300% 증가시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신수아는 대장장이인 한로야에게 부탁해 최상품의 검을 받아온 상태였다.
그 검은 빠르게 성장하여 어느새 신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녹음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고 숲향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자, 서강림의 공격이 생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촤악!
무명의 가슴에 길고 날카로운 상흔이 그어지고, 선뜩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쳤다.
눈앞에 있는 서강림은 마치 포식자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작은 인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두렵다고?’
무명은 자신의 감정에 당황했다.
두려움이라니.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그는 이번 회차에 서강림의 행보를 보며 수백 번을 질문했다.
이 자가 혹시라도 불변하는 영원을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때마다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렸으나, 서강림은 지금 자신의 검으로 그 답을 부정하고 있었다.
-촤악!
무명이 쏘아 보내는 마력이 서강림의 불꽃에 갈갈이 찢겨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궤적이 새겨진다.
수많은 문장이 칼질에 의해 찢겨 나가고, 자신의 몸은 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낌과 동시에 무명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두 눈에는 빛이 꺼지지 않았다.
무명은 그 눈빛을 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렸다.
수천 년이 넘도록 셀 수 없는 문장을 적었다.
그 문장을 적으며 잊어버린 단어가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그 단어를 떠올렸다.
희망.
소실 되어버린 단어.
무명은 그토록 사랑스러운 살해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온몸으로 반격을 하면서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무명이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공격을 쏘아 보낸 순간.
-촤악!
제 몸의 모든 문장이 찢겨 나갔다.
그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문장이 단 한 줄도 없었다.
어떤 것은 칼에 찢겨 지워졌고, 어떤 것은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남은 문장은 없었다.
이야기의 끝이었다.
무명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으나,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쿠웅……!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신이 무너지고, 무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명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너는, 내 예상을 벗어났구나. 작은 아이야.”
어느새 서강림 역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패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몸에 축적된 데미지 때문에 쓰러지려는 서강림을 신수아가 빠르게 부축했다.
서강림은 쓰러진 무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죽일 수는 있지만, 그 전에 들어야 할 것도 받아내야 할 것도 있었다.
그가 피에 젖은 입술로 말했다.
“당신이 중요한 무기를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그 검은 이곳에 없다. 만약을 대비해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지……. 네게 그 장소를 알려주는 것은 쉽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무명이 쿨럭거릴 때마다 입가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서강림도, 신수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자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무명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너진 책장에 등을 기댔다.
“……우선, 내가 누군지부터 이야기해야겠지.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원래 인간이었다. 직접 보는 편이 낫겠군.”
그의 몸에 남아 있던 희미한 마력이 일렁이더니 주변의 풍경이 환영처럼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서강림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경계를 보는 눈을 이용해 과거를 들여다볼 때의 그 느낌.
이것은 무명의 기억이었다.
풍경은 아주 오래전의 역사 일부분으로 변해 있었다.
오래된 의복을 걸친 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마을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몇천 년 전으로 보였다.
“그때의 내 직업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제사장, 예언자, 무당, 그런 존재였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였지.”
환영 사이로 젊은 무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으나 표정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기억 속의 무명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불길 속에 신이 있었고, 밀밭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신이 있었다. 어둠과 밤 사이에도 신이 숨어 있었으며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기억은 밤으로 이동했다.
기억 속의 무명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말 못 할 취미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존재하지 않는 신을 상상하는 일이었다.”
“…….”
“어둠 속에도 신이 있다면 빛무리 사이에도 신이 있지 않을까. 불꽃이 신의 선물이라면 저 물길 역시 그들이 준 것은 아닐까. 그런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서강림은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독고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독고준이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신과 인간 중 무엇이 먼저였을 것 같냐던 질문.
“나는 그러다 왜 내가 제사장이 되었을까 생각했다. 왜 나에게는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을까. 왜 그런 차이가 있을까.”
무명은 기억 속의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며 말했다.
언뜻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인간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신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에 대해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한 제사장이 내가 쓴 기록을 발견했다.”
환영 속에서 무명과 한 제사장이 싸우고 있었다.
흥분으로 목소리가 뭉개져 있어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설전에서 무명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거짓된 신탁을 기록하였다. 이게 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제사장으로서의 순수함을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기록한 것은 신탁이 아니라 허상의 이야기였으나,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인정했다가는 제사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었다.
무명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외쳤다.
[내게 신탁을 보낸 분을 의심하지 말라! 그분은 모든 것을 정하고, 조율하며, 끝을 일러주시는 분이다.]
[뭐라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져 있으며, 그것은 그분께서 정하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미래.
서강림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이 미식거리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은 무명의 말에 침을 퉤 뱉고는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헛소리를 하는군. 그렇다면 내 미래를 말해봐라!]
그 말에 젊은 무명이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가 객기에 가득 차 소리를 질렀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분을 의심하는 것 역시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었으며, 너의 불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불타오를 것이라고!]
상대방은 그 말을 무시하는 듯 콧방귀를 뀌고 사라졌다.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암흑으로 변했다.
무명은 처연한 시선으로 어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것은 내가 지어낸 거짓 예언이었다. 다른 이들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떠한 비극은 허구를 진실로 만드는 법이지.”
어둠이 일렁거리며 또 다른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에 타는 집이 보이고 울부짖는 누군가가 보였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불길 사이에서 속삭였다.
[제사장의 집에 불이 나, 일가족이 모두 죽었다더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신께서 노하신 거야! 그때 말했잖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 대가로 모든 것이 불탈 거라고!]
무명의 예언대로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많은 이가 그렇게 믿었다.
서강림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무명에게 물었다.
“불은 당신이 냈습니까?”
“……그래.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해봐야 지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처음에는 작은 불만 일으켜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입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길은 결국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무언가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 제사장, 신의 존재를 의심해서 벌을 받은 거야.]
[그래서 대체 그 신이 누구시지?]
[모든 것을 정하고, 미래를 알려준다고 했어. 우리의 미래도 알 수만 있다면…….]
그림자들은 몰려와 기억 속의 무명에게로 다가갔다.
그 신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자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정해져 있는지 알려달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거짓을 말했다. 인간을 포함해 세계의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고. 나는 그것을……”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힘겹게 말했다.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뱉는 무명은 비통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무명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말은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
“나는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운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어떤 운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지만, 어떤 운명은 노력 여하에 바뀔 수 있다고 말하며.”
그림자들이 무언가를 잔뜩 이고 지고 와 제단 앞에 내려놓았다.
가축과 곡물, 금붙이와 보석을 내려놓고 자신의 운명을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무명은 최고의 제사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한 운명 중 어떤 것은 맞았고 어떤 것은 틀렸으나 상관없었다. 틀렸다면 그의 신실함으로 미래가 바뀌었다고 둘러대면 됐으니까.”
더 이상 그는 제사장도, 무당도 아니었다.
홀로 신화를 적을 때는 그저 이야기꾼이었으나 이제는 살인자에 사기꾼일 뿐이었다.
기억 속의 무명이 책상 앞에 앉아 또다시 신화를 써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신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기억 속의 무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지금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숨을 막히게 하는 목소리.
기억 속의 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질문에 목소리는 가만히 웃었다.
서강림은 그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저 웃음.
[잊었느냐? 네가 나를 만들고, 내게 이름을 주지 않았느냐. 그 어떤 운명보다도 강력한 것. 절대로 바뀌지 않는 규칙. 처음부터 정해진 것. 나의 이름은…….]
목소리가 웃었다.
[불변하는 영원,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