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아무래도 아까 그 신수가 죽으며 일종의 주술이 발동된 것 같아. 결계인가?’
방금 전, 서강림은 자신을 향해 뻗어 오던 검은 액체를 피하려고 했었다.
그의 속도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어느새 발목은 붙잡혀 있었고, 순식간에 아래로 끌려와 버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천장은 무너진 곳 없이 꽉 닫혀 있었다.
‘결계라면 어딘가에 매개체가 있을 거다. 그걸 파괴하면 되겠지만…….’
신수아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함이 앞섰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그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신수아가 죽은 것 같진 않은데, 무불 통신이 안 된다면 의식을 잃은 상태일 테고. 그녀를 그 짧은 시간 내에 행동불능으로 만들 정도라면.’
무명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웬만한 차사나 신수 따위가 그녀를 단숨에 기절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애초에 무명의 목적은 신수아를 만신으로 삼는 것이었으니, 그녀를 끌고 갔을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이 결계 안에는 신수아가 없을 거야. 최대한 빨리 여기를 나가야 할 테지만…….’
자신 외의 차사들도 이 아래로 끌려왔으니 수색을 하다 보면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
이것도 무명이 계산을 한 부분일까?
이 결계 속에서 자신과 차사들이 서로 싸우다 죽는 것이 그의 계획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무명의 뜻대로 놀아날 수는 없어. 최대한 차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며, 최대한 빨리 매개체를 파괴하고 나간다.’
빠른 수색을 위해 그는 우선 분신을 만든 뒤, 형태를 변형시켰다.
서강림의 주위에 자그마한 쥐들이 바글바글 생겨났다.
서강림이 분신을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사방에서 무언가가 유령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샤아아……!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목구비 없는 얼굴을 가진 인형들.
인형들은 검을 든 채 망설임 없이 서강림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카가강!
들고 있던 검과 울부짖는 이빨이 맞부딪쳤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 역시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그 날카로움은 상당히 예리했다.
그러나 신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서걱!
사방으로 살점 대신 종잇조각이, 피가 아닌 먹이 튀어 올랐다.
종이 인형들은 목이 날아가자 결국 형체를 잃고 무너지고 말았다.
사방으로 종이가 흩어지는 와중 서강림은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차사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군. 강하진 않지만 번거로워.’
방금 막 종이 인형들을 처치했음에도 또다시 인형들이 생성되려는 듯, 사방의 글자들이 꿈틀거렸다.
저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세포처럼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발목이 잡힐 수는 없었다.
그가 미친 듯이 인형들을 파괴하며 달려 나가던 그때, 서강림은 머리 위에서 희미한 인기척을 느꼈다.
-끼이익!
서강림은 옆에 있던 종이 인형을 붙잡아 자신이 있던 위치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인형은 그대로 허공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목에 반투명한 줄이 얽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모습은 마치 교살당한 것처럼 보였다.
서강림이 뒤로 물러서자 위쪽에 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빠르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서강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퀭한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살기.
시선의 주인은 하백헌이었다.
서강림으로서는 통탄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금 신수아를 찾으러 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차사, 그것도 팀장급의 하백헌과 조우하다니.
반면, 하백헌은 서강림과 마주쳐 당황하고는 있었지만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놈들이 기척을 보이지 않기에 곤란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차라리 다행이군.’
이들이 첫 번째의 주인과 손을 잡게 된다면 보호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파진다.
때문에 광대패가 첫 번째의 주인과 조우하기 전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타나 주다니.
게다가 여기까지 잠입했을 정도라면 이 광대패는 조직 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일 것이 분명했다.
종종 광대패를 생포한 적은 있으나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가 없어, 수장을 추적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광대패라면 분명 유용한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생포해 정보를 빼내야겠어.’
-카가강!
서강림을 향해 십 수 개의 침이 날아들어 왔다.
끝에는 모두 독이 발라진 상태였다.
서강림이 검으로 침들을 막아내며 곧바로 하백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백헉은 코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서걱!
날카로운 공격에 얼굴에 미약한 실금이 그어졌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을 법했으나, 어느새 그의 검이 실에 막혀 있었다.
하백헌이 실로 공격을 막은 뒤 다급히 물러섰다.
‘보고대로 실력은 뛰어난 것 같네. 정면 승부는 곤란하겠어.’
하백헌은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인 전투에서는 팀장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사실 역시.
하지만 그의 특기 분야는 따로 있었다.
[이능 ‘어둠의 축복’이 발동됩니다!]
이능이 발동됨과 동시에 서강림의 눈앞에서 하백헌이 사라졌다.
감각을 총동원해도 그의 기척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서강림의 주위에 숨어 있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민첩과 감각이 300% 증가합니다!]
[주위의 어둠과 200% 동화하였습니다!]
하백헌은 암살과 잠입 쪽으로 특화되어 있는 능력자.
지금처럼 사방이 어두운 장소에서는 능력이 몇 배로 상승한다.
서강림의 공격은 분명히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명중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캉, 카강!
하백헌은 어둠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빠르게 서강림을 향해 공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침을 받아치면 이번에는 왼편에서, 그다음은 또다시 정면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형국이었다.
서강림은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마탄을 쏘아내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사라라락……!
그 와중 사방에서 종이로 된 인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백헌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어 종이 인간들은 미처 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포착된 것은 오로지 서강림뿐이었다.
-샤아아아……!
적들이 몰려오자 서강림은 곧바로 항전에 나섰다.
어둠 속에 하백헌이 숨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몰려드는 신수들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서강림이 신수들을 반동강 내던 그때, 하백헌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서걱!
서강림의 검이 신수를 갈랐으나, 그와 동시에 양다리가 바닥에 달라붙은 듯 멈췄다.
함정이었다.
하백헌이 어둠을 틈타 곳곳에 설치한 점착성의 실이 바닥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던 것이다.
-푸욱!
그리고 서강림이 빈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침 하나가 그의 목에 박혔다.
즉효성의 마비독이 체내로 투입되자 혈관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튼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콰과곽!
목과 팔, 등에 침들이 십수 개가 박히고 말았다.
그곳에 묻어 있는 독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서강림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축 늘어지자 그제야 하백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광대패가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하백헌은 짐짓 감탄하는 어조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강림을 공격하던 신수들은 모두 종잇조각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하백헌이 설치한 거미줄에 걸려있었다.
버둥거리는 신수들을 뒤로한 채, 그는 광대패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직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독이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는 종류는 아니니까.
다만 당분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보호국으로 끌고 가 정보를 끌어낼 생각에 그는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무명을 살해하는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광대패를 생포했으니 어느 정도는 참작이 될 것이다.
기절한 광대패를 끌어내기 전, 그 잘난 얼굴이라도 한번 봐보려고 손을 올린 그때.
-푸욱!
“컥……!”
하백헌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피가 왈칵 튀어 올랐다.
복부를 태우는 듯한 통증.
배에 난 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막으며, 그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이 더 있었나? 하지만 아까까지는 분명……!’
-콰과곽!
공격한 범인이 누구인지 찾기도 전, 연달아 발사된 마탄이 하백헌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백헌은 없었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기는 했으나 복부의 부상이 제법 심각하여 움직임이 느려지고 말았다.
그런 하백헌의 머리 위로 선뜩한 칼날이 날아들었다.
-캉, 카강!
하백헌은 다급히 단검을 꺼내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독침을 맞고 혼절한 광대패였다.
복부의 통증으로 머리가 아찔한 와중, 하백헌은 상대를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독이 먹히지 않는 체질인가? 골치 아프게 됐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점착성의 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광대패는 제자리에 뿌리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광대패에게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이능 ‘마탄’이 발동됩니다!]
그가 손짓을 할 때마다 사방에서 마탄이 생성되어 하백헌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검술뿐 아니라 주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각성자라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하백헌이 어둠 속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일단 틈을 노려야 한다. 실로 놈을 포박할 수만 있다면……!’
-화르르륵!
그때, 사방에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신수들의 시체에 불이 붙더니 사방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점착질인 실이 어둠과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하백헌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실의 약점이 불이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게다가 주위가 밝아져서 어둠 속으로 피할 수가 없어.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이든 의도이든 하백헌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사방에 불이 번지며 실들이 녹아내리자 광대패가 철벅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 와중, 광대패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고 하백헌은 경악하고야 말았다.
“당신, 언제 그걸……!”
광대패의 손에 흰 단검이 들린 것을 보자, 하백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저걸 대체 언제 가져간 거지?
방금 전 검을 휘두를 때였나?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무명을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빼앗기고 말다니.
하백헌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이대로 광대패가 단검을 갖고 도주하기라도 한다면 이번 임무는 대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저것을 되찾아야 했다.
하백헌은 잇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삼키며, 대침을 꺼내 들었다.
‘무명을 상대할 때 쓰려고 아껴둔 것이지만……!’
-푸욱!
그는 대침을 자신의 목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핏줄이 굵게 도드라지기 시작하며, 온몸의 혈관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퀭하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하고 핏기없던 얼굴에는 붉은 기가 돌았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서강림을 노려보는 하백헌은 명백하게 변해 있었다.
[상태 이상 ‘강제 활성’이 발동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