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시체의 기억을 더듬어가자, 울렁이는 감정이 내게 스며들어왔다.
두려움도 있었으나 빛나는 종류의 감정 역시 섞여 있었다.
그 일렁이는 감정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불탄 도서관 대신 깔끔한 회의실 구석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언뜻 보면 평범한 회사 같지만, 곧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검은 양복을 입은 채, 가면을 쓰거나 들고 있었다.
죽은 차사, 이 기억의 주인도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 와중 한 사람이 회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4팀 팀장, 하백헌입니다. 돌아가신 공주 팀장님을 대신해 2팀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였다.
상당히 왜소하고 음침한 인상이었으나,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팀장 자리를 맡을 만한 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번 특별 임무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겠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오랫동안 추적해 오던 첫 번째의 주인. 무명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의 주인이라는 이름에 몇 사람은 술렁였다.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이 주제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도 많아 보였다.
[워낙 비밀리에 조사를 하고 있던 지라,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가 광대패의 배후입니다.]
하백헌이 해주는 설명은 첫 번째의 주인이 얼마나 끔찍한 적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첫 번째의 주인은 악신으로, 광대패를 조종하여 이 세계를 멸망으로 빠트리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요하는 차사들을 향해 하백헌은 설명을 이어갔다.
[첫 번째의 주인이 원하는 것은 산제물과 절망입니다. 그걸 위해 광대패는 끊임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요.]
[…….]
[즉, 광대패를 아무리 쓰러트려 봐야, 첫 번째의 주인이 뒤에서 버티고 있는 한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을 선택했다.
요즘은 비교적 광대패가 잠잠했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또한 민간인뿐만이 아니라 차사들 역시도.
그때, 침묵 속에서 한 차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래서 결국 저희가 그, 첫 번째의 주인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도, 마수도 아닌 신을 상대하는 일이다.
인간으로서 신을 죽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차사들이 의문을 품은 와중, 하백헌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죠……. 많이들 죽을 테고…….]
하백헌의 말에 공기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는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하백헌이 조용조용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테죠.]
나는 기억의 주인이 느끼는 감정을 공유받으며, 끔찍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일반 차사다.
미지의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보호국의 진상에 대해 모른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정말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보호국에 몸을 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차사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뿐이었다.
[불참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여러분이 이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봤던 문구를 떠올리세요.]
건물의 입구에 적힌 문구.
기억의 주인은 그 문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차사가 그 문장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인류의 운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모였다.]
그것은 운명 보호국의 설립 목적이었다.
마수로부터, 각성 범죄자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자 의무.
누군가는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 보호국에 들어오기도 했으나 누군가는 오로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첫 번째의 주인을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죽이지 않더라도 그가 갖고 있는 어떤 물건을 확보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해요.]
[물건이라니, 어떤 것이죠?]
[형태는 나도 잘 몰라요. 무기의 일종이라고만 들었죠. 신역에 숨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신을 상대하지 않더라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니.
정체도 모르는 무기를 확보하는 임무 역시 성공할 확률이 희박해 보였으나 신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차사들이 망설이고 있던 그때, 하백헌이 입을 열었다.
[자, 어떻게 하겠어요? 물러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이어지는 기억을 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그사이 기억이 범람하며 또 다른 풍경이 내 앞으로 흘러 들어왔다.
깔끔한 회의실은 사라지고 무너진 도서관이 눈앞에 보였다.
[증원, 증원 요청해!]
비명과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기억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치렀던 전투, 마지막 생의 기억이 내게 스며들며 곳곳에 상흔을 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차사가 고함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부상자는 뒤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신수들을 상대해!]
사방에서 신수들과 차사들이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이빨이 산 사람의 살을 베어 물고, 찢고 있는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사들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분명 신수들은 강했지만 기억의 주인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싸울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보다 강한 마수들과도 싸워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는가, 영원의 꼭두각시들아.]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몸이 심해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압박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었다.
그 압력 속에서 기억의 주인은 힘겹게 눈동자만 들어 올렸다.
[잘도 이곳을 찾아냈구나.]
그것은 언뜻 보면 인간을 닮아 있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먹으로 빚은 듯한 검은 머리카락이 발치까지 내려오고, 그가 입은 옷자락만큼이나 흰 피부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되었고, 고요했으며, 또한 잔인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것은 젊은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건 그저 껍데기일 뿐이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모든 차사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희가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어떤 업보를 쌓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여기까지 왔구나.]
남자는 정물처럼 선 채 차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방비하게 모습을 내보이고 있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심장은 저 남자가 얼마나 강력한 포식자인지 외쳐대느라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때, 첫 번째의 주인의 뒤편으로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콰직!
기습을 감행한 차사가 있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차마 알 수 없었다.
단말마를 내지를 틈새도 없이 차사의 머리가 터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핏물이 터지며 무명의 옷자락에 붉은 얼룩이 새겨졌다.
[이곳에 너희의 피로 역사를 새기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 피의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무명이 손을 한 차례 휘두를 때마다 차사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는 머리를 잃었고, 누군가는 심장을 꿰뚫렸다.
그 와중에 천운, 혹은 짐승과도 같은 반사력으로 공격을 피한 차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물러서는 대신 또다시 전투에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진다’는 말 외로는 그 장면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생을 내던지고 있었다.
휘두르는 칼날이 신에게 차마 닿지 않고 있음에도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기억의 주인 역시 뼈를 얼려버릴 듯한 두려움과 압박감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콰가각!
그때, 누군가가 쏜 화살이 무명의 허벅지에 박혔다.
화살에 맞자 무명이 잠깐 멈칫거렸고, 그 찰나가 차사들에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모두가 이를 악물고 무명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었다.
-서걱!
기억의 주인이 휘두른 칼날이 무명의 등을 길게 베어냈다.
또 다른 차사들 역시 피를 삼켜가면서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꺾이지도 않았다.
[쓸모없는 짓을 하는군.]
무명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다.
잘려 나간 옷가지 사이로 그의 속살이 보였으나, 몸 안쪽에는 상처 대신 뜻을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얼굴에 고통 따위는 없었다.
[나 외의 그 누구도 내게 상처입히지 못하리라.]
-콰과광!
허공에서 번개가 내리치며 차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어버린 동료들을 보면서도 애도를 할 틈 따위는 없었다.
도주를 해봐야 의미가 없음을 알았고, 두려움을 지울 수도 없었다.
기억의 주인은 공포에 흐느끼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차사들의 생명이 모든 어둠을 태울듯한 기세로 타올랐으나, 그에 비해 무명은 고요할 뿐이었다.
이들의 아우성도, 신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가 손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바닥에 피꽃이 피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차사들이 쉼 없이 스러져가던 그때.
-으드득!
무명의 팔이 허공에 결박되었다.
보이지는 않는 무언가가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무명은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어리석구나. 고작 이런 것으로 나를…….]
-촤아악!
무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백헌이 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한 손에는 흰 단검을 든 채였다.
무명이 빈틈을 보인 사이 그의 가슴에 긴 자상이 새겨졌다.
기억의 주인은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공격을 해봐야 어차피 모두 회복하지 않는가.
그러나 무명의 얼굴에 이제껏 본 적 없는 동요가 퍼져 나갔다.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어떤 공격을 받아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던 몸뚱이었다.
무명의 피로 젖은 흰 단검을 든 채 하백헌이 외쳤다.
[첫 번째의 주인을 저지하세요! 단 1초라도 좋습니다!]
하백헌의 명령에 따라 차사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무명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기억의 주인이 하백헌의 명령에 따라 잠시라도 무명을 붙잡고자 달려든 순간.
-촤악!
고통과 함께, 기억이 끊겼다.
눈을 뜨니 나는 여전히 도서관 안에 있었으나 더 이상 첫 번째의 주인은 없었다.
차사들 역시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을 휘두르던 차사는 시체로 스러져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위로 다시 가면을 덮어주며, 내가 본 것들은 신수아에게 전달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그녀는 서글픈 눈빛이 되었다.
“[이 사람들……. 보호국의 진짜 목적이 뭔지도 모른 채 죽었군요.]”
하백헌은 광대패와 첫 번째의 주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짓말로 차사들을 부추겼다.
이 모든 희생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헛된 정의감을 심어주며.
결국 이들의 죽음은 개죽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