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일단 이 몸의 주인을 상징적인 왕으로 내세울 테지만, 능력은 부족하지. 그 공백을 제 3 왕자가 채워주면 된다.’
평가를 보아하니 제 3 왕자는 상당한 성군이고 실력도 뛰어났다.
그가 섭정이 된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신내림을 받아 만신으로 만들면 계시를 통해 제재하고 조종하는 것도 가능했다.
“흐, 흙과 벌레의 왕께서 저를 만신으로 삼아주신다면 그보다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제 3 왕자는 다급히 서강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서강림은 그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이제 이 세계에서 자신을 섬기고, 자신의 신명을 널리 알리게 될 신도의 모습을.
제 3 왕자는 훌륭히 신도의 역할을 해낼 것이었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서강림이 다른 왕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지?”
“흙과 벌레의 왕께서 거둬주신다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왕자들을 모두 만신으로 만든다면 반역의 가능성은 줄이고, 인지도는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이들에게 투자를 하여 성장시킬 목적은 없으니, 만신을 여러 명 만들어도 상관은 없었다.
서강림은 차례대로 왕자들에게 신내림을 마쳤다.
“앞으로 해야 할 방향성을 지시해두지. 우선 노예제부터 철폐하고, 흙과 벌레의 왕을 국교로 추대할 것.”
그 외로는 폭정을 그만두고 민생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방향을 지시했다.
공포 정치로 인지도를 올려봐야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과 비슷한 꼴이 날 테지.
차라리 자비롭고 선한 신을 연기하는 편이 나았다.
애초에 그런 컨셉이기도 했고.
“그리고 소서국과 형제 국가의 연을 맺도록 해.”
소서국에서는 신수아를 신처럼 따르고 있으니, 그쪽 역시 유지를 시켜 놔야 했다.
새로운 신화에는 흙과 벌레의 왕뿐만 아니라 절망을 가르는 신록에 대해서도 기록되어야 한다.
소서국의 공주에게는 신수아가 신내림을 한 뒤, 대략적으로 상황이 정리가 됐다.
“저기, 강림 씨.”
그런데 그 와중, 신수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상당히 찜찜한 눈치.
서강림이 살짝 걱정하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강림 씨의 신명이……. 흙과 벌레의 왕은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요…….”
표정이 좋지 않길래 심각한 건 줄 알았는데 다행히 별일이 아니라 서강림은 안도했다.
흙과 벌레의 왕, 조금 격이 떨어져 보이는 신명이기는 하였다.
서강림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저는 딱히 상관없는데요.”
“아니, 형님. 그래도 벌레는 좀 아니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태헌도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살짝 흥분해 있자 옆에 있던 윤봄도 거들 듯이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사부님이 흙과 벌레의 왕이라면, 이 나라의 백성들이 다 벌레라는 건데……. 좀 그렇지 않나요?”
“맞아, 서강림은 내 주인공이니까 좀 더 품격있는 신명이 필요해.”
어느새 다시 제 3 왕자에게 빙의한 독고준이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강림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독고준이 신명을 짓는다면 분명 엄청난 것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런 신명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독고준이 왕자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서강림의 신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예, 예?! 흐, 흙과 벌레의 왕도 아름다운 이름이긴 하지만…….”
“그래서 서강림한테 벌레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어 왕자들은 쩔쩔매고 있었다.
독고준은 그런 그들이 재밌는지 웃고 있었다.
서강림은 독고준이 그들을 더 괴롭히기 전, 중재에 나섰다.
“그러면 너희가 적당한 걸로 바꿔서 불러. 일단 우리는 돌아갈 테니, 뒷일을 부탁한다.”
“예, 서강림 님……!”
왕자를 비롯하여 궁에 있던 모든 이종족들이 서강림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가 그를 향해 무릎 꿇고 있는 풍경.
그 풍경을 바라보며 서강림은 눈을 깜빡였다.
[낙원국에서 이탈합니다!]
[빙의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대마경에 처음 진입했을 때 보이던 벽화 앞에 서 있었다.
그림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지만.
“와, 사부님! 이것 보세요!”
윤봄이 흥분한 어조로 그림을 가리켰다.
그림 속에 있던 커다란 석상은 파괴되고,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밑바닥에 깔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던 백성들 역시 어느새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평화를 찾은 듯한 온화한 얼굴.
그들이 커다란 원을 그린 채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흑룡이 있었다.
흑룡 위에 앉은 사람은 서강림이었다.
낙원국의 주민들은 모두 기도하는 자세로, 서강림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강림은 기도하는 자들의 그림을 잠시 응시하다, 묵묵히 대마경을 떠나갔다.
20. 이름 없는 자의 땅
낙원국이 공략이 된 지 일주일.
세상은 여전히 대마경이 공략되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이번 대마경은 공략에 성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낙원국 내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기에 현세에서는 두 달 정도로 정리가 된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이번에도 또 서강림이 공략을 했다면서 그를 신처럼 추앙하는 자들이 대다수.
각성자든, 미각성자든 많은 이가 그를 흠모하였다.
각성자들은 어떻게든 서강림과 손을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고 미각성자들은 그의 파편이라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서강림의 과거사, 일상이 마치 전기처럼 다루어졌고 그의 사진이나 영상은 성물처럼 공유되었다.
물론 반대의 입장도 있었다.
서강림을 헐뜯고 비하하며, 그를 위선자라고 부르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며 그를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현은 따지자면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었다.
“서강림이 낙원국에서 싸우는 모습을 선배도 봤어야 합니다.”
외진 마경 한구석, 이현과 서화경이 서 있었다.
워낙 등급이 높은 마경인지라 일반적인 헌터라면 접근도 하지 못할 장소.
거기에 결계까지 쳐둔 상태인지라 외부인이 들어올 위험이 없는 상태였다.
서화경은 종종 이현이나 강도현과 비밀리에 만나고는 하였다.
아이템이나 정보를 주고받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화경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서강림에 대한 정보였다.
지금 가장 위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서강림일 것이었다.
몸을 숨기고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 상, 그녀는 서강림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없었다.
서강림과 종종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또 죽도록 구르고 혼자 피 토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겠지.
때문에 서화경은 주위 사람들을 통해 서강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현이 대마경에서 보았던 것을 상세히 보고하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강림이가 그렇게 강해졌니?”
“네. 심각할 정도로.”
이현은 낙원국의 궁전에서 싸우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호문의 일행 하나하나의 힘도 강력했지만 서강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서강림이 싸우던 모습을 네 번째 대마경에서도 봤었다.
그때도 강한 헌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 차원이 달랐다.
“솔직히 군림왕을 쓰러트릴 줄은 몰랐습니다.”
이현이 빙의했던 인물은 귀족 가문의 가주 중 한 명.
먼발치에서 왕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느낀 것은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은밀히 암살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던 상황.
그런 와중 서강림이 군림왕을 정면에서 쓰러트리는 장면을 보자,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나갔다.
저토록 강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했을까?
“……서강림, 경계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모르겠군요.”
업보를 쌓아 경계로 다가가며 미쳐 버린 각성자의 사례를 종종 접하고는 했다.
미쳐버린 각성자가 마수보다 더 악랄한 존재라는 것은 헌터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이현은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말했다.
“서강림은 너무 빠르게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비정상적인 성장의 원인은 아무래도 사주를 훔치기 때문이겠죠.”
그의 말대로 서강림은 착실히 타인의 운명을 훔치며, 업보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의 강함은 결국 업보를 동반한다.
서화경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래. 가급적이면 사주 훔치기를 쓰지 않고, 살생도 멈추면 좋겠지만…….”
서화경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위험부담을 지더라도 서강림은 강해져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보호국을, 불변하는 영원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
서화경이 해야 하는 일은 서강림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버틸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었다.
“강림이의 정신과 육체 자체를 강화하면 경계에 다가가는 일은 조금이라도 더 늦출 수 있을 거야. 약은 가져왔어?”
“네. 최상품으로 준비했습니다.”
이현은 작은 상자를 서화경에게 건네주었다.
서화경이 사전에 준 레시피를 참고하여, 흑의문의 모든 연금술사들을 총동원하여 만든 비약이었다.
이 안에 들어간 재료의 액수만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고맙다. 이게 있으면 강림이도 좀 버틸 수 있겠지.”
이현은 그런 서화경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건네는 약은 서강림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만능은 아니다.
경계가 보여주는 환상에 굴복하게 되면 결국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육체와 정신을 강화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정도로 강력한 업보를 쌓게 되면, 그 어떤 정신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겠지만.
서강림은 착실하게 경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 서강림이 경계를 넘어 미쳐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지를 잃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강림이 경계를 넘는다면 보호국보다 더 큰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이현으로서는 그것을 막고 싶었다.
그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서강림이 경계를…….”
“그럴 일 없어.”
서화경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현이 말하려는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강림이 경계에 도달하면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경계에 도달하기 직전 죽여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일 것이었다.
서화경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강림이한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내가 막을 거니까.”
서화경이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절대로 우리 강림이, 그렇게 보내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막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