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감독관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그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 단주님……. 단주님이 어떻게 노예 따위에게……!”
방금 전과는 달리 감독관들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감히 나와 눈도 맞추지 못한 채.
나는 한 놈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히, 히익……!”
“지금 여기에 있는 노예가 전부인가?”
“아, 아닙니다! 옆 작업장에도 더 있습니다!”
이야기를 할 거면 전부 모아둔 뒤 하는 게 낫겠지.
구석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던 노예들 중, 유독 희망에 가득 찬 눈빛이 보였다.
방금 전의 어린 이종족이었다.
“옆 작업장으로 가서 노예들을 모두 데려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어린 이종족이 후다닥 달려가는 사이, 노예들은 여전히 구석에 숨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피에 젖은 단주의 옷을 벗겨 걸치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왕위를 차지하려면 일반적으로 세력을 만들어 왕을 끌어내리는 것이 방법이다.
아니면 정치판에 뛰어들어 궁중 암투를 벌이거나.
지금 내 입장에서는…… 암살을 시도하거나, 노예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이 무난하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되는 동시에,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할 생각이었다.
[신수 ‘요롱이’를 소환합니다!]
큼지막한 흑룡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감독관과 노예 모두 기겁하는 얼굴이 되었다.
요롱이는 낮게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울게. 감시 좀 해줘. 도망가면 물어도 돼.”
“캬앙!”
나는 요롱이에게 감시를 맡긴 뒤, 인적이 없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다른 일행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으니.
원래라면 이 대마경은 개인전에 가깝다.
협력을 할 수는 있지만, 이 세계에 들어올 때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져버리기 때문이었다.
통신 장비가 있어도 거리가 멀어서 다른 일행과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아니었지만.
[무불 통신에 접속하였습니다!]
무불 통신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우선 윤봄에게 연락을 보내자, 곧 통신이 연결됐다.
화면 너머에서 꽤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윤봄의 얼굴이 보였다.
“[사부님! 저 이것 보세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 귀족 출신이에요!]”
윤봄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공유되고 있는 시야를 확인해보니, 옷차림뿐만 아니라 집안 내부가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높은 계급이라니, 다행이네.”
내가 노예 계급인 건 상관없지만, 다른 멤버들은 계급이 높을수록 유리하다.
결국 왕성으로 들어가야 하니 왕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너는 정확히 어떤 역할이지?”
“[왕궁에서 친위대로 일한다고 하더라고요.]”
친위대라, 나쁘지 않다.
나에게는 왕궁의 동태를 파악하고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이 대마경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는 알지만, 어떻게 공략하는지는 모른다.
왜냐면 다섯 번째 대마경은 공략이 진행되던 중으로, 아직 공략자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 나라의 왕이 상당히 강력하다는 것.
왕은 이 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날 만큼 좋은 사주팔자였고, 강했다.
왕을 죽이려고 시도한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시체로 돌아왔는가.
암살에 나섰던 각성자는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렸다.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 빙의자도 있었지만, 그 역시 실패하여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에는 각성자 중 하나가 왕을 쓰러트리고, 왕위를 물려받았다.
제 3 왕자로 빙의한 각성자가 왕을 암살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는데,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대마경은 공략되지 않았다.
분명히 대마경의 공략 조건은 이 나라의 ‘왕’이 되는 것.
그럼에도 공략이 실패했다면, 진짜왕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꼭두각시 왕도 강력한데 진짜는 얼마나 강력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알겠어. 우선은 몸조심하고, 정보가 있으면 알려줘. 다시 연락할게.”
“[네, 사부님!]”
윤봄과 연락을 마친 뒤,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통신을 보냈다.
전생과 다들 똑같은 포지션이었다.
우선 내가 근 시일에 합류할 수 있는 사람은 장태헌 정도인가.
일단 대략적으로는 상황을 파악했으니, 나도 다음으로 넘어가야겠지.
공터로 되돌아가 보니 어느새 노예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어린 이종족이 나를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달려왔다.
“노예들을 다 모아왔습니다!”
나는 노예들을 힐끗 보았다.
안도하는 자도, 호기심을 보이는 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있었다.
어쨌거나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대략 수는 200여 명 정도인가.
내게 보이는 모든 관심은 나의 인지도가 되어줄 것이었다.
내가 이 대마경에서 이뤄야 할 목표이기도 했다.
어린 이종족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저기……. 그…… 귀족 나으리이신가요?”
“아니, 노예다.”
“그런데 어떻게 이능을……?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 건가요?”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
그것은 이 나라의 수호하는 수호신의 이름이었다.
상당히 너그러운 신명 같았지만 실제로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신이었다.
이 나라의 신화에 따르면,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은 선하고 고귀한 자들을 왕족으로 태어나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보다 덜 귀한 자는 귀족으로, 그 아래는 상민, 그 아래는 평민, 노예 이런 식이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특별한 힘, 이능.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은 고귀한 혈통들에게만 이능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은 그 힘을 이용하여 나라를 강하게 번성케 하였다.
이 세계에는 흉폭한 마수들이 들끓고 있는데, 왕족이나 귀족이 마수들을 쓰러트려 주니 약한 노예들은 그들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강력한 무력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낙원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지배에서 비껴간 나라들 역시 낙원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신이 바로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만들어지다만 석상은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을 상징하는 석상이었다.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의 석상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고개를 조금 틀어 더 먼 곳을 보자 산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진 거대한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용의 석상이었다.
저 석상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석상으로 어디에서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크기도 크기지만,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특수한 주술을 걸어놓은 탓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저, 저기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께서 보내신 것…… 아닌가요?”
노예들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난장판을 벌인 게 신의 뜻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낙원을 수호하는 하늘을 따르지 않는다.”
“예……?”
자, 이제부터 제대로 연기를 해야한다.
나는 다소의 민망함을 감춘 채, 최대한 태연하게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수백의 눈동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흙과 벌레의 왕, 너희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전생에 신수아가 이 대마경을 공략할 때, 가장 높은 수치는 100을 넘었고 못한 것도 80은 됐다.
그럼에도 공략에 애를 먹었다.
지금 내 수치가 평균적으로 80 중반인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전생에 이 대마경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림 속의 세계지만 이곳에서 활약을 할 경우, 수호신의 인지도가 올랐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림 속의 세계는 현세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낙원국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여러 국가들이 있고, 수많은 종족들이 살아간다.
이 세계의 거주민들에게 나를 포교한다면, 내 인지도를 대폭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와중, 노예들은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왕을 운운하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겠지.
이제 말은 그만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할 때였다.
언뜻 보니 다친 자와 굶주린 자들이 상당했다.
모두 피골이 상접해있는 데다가 상처가 없는 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처가 산 채로 썩어들어가고 있는 자도 있었다.
나는 우선 상점에서 회복약과 식량을 구매했다.
[‘회복약’을 대량 구매하였습니다! 2000 영옥을 소모하였습니다!]
[‘오복 만두’를 대량 구매하였습니다! 2000 영옥을 소모하였습니다!]
그동안 사냥은 착실히 다니고 있었으니 영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구매를 끝내고 수령을 선택하자, 주위에 음식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것을 보자 노예들의 눈이 모두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뭐, 뭐야?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졌어?”
“저게 대체 뭐지? 정말 신인가?”
“마, 맛있겠다…….”
상당히 오래 굶었는지 곳곳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겠지.
와중에 나를 향해 경외심을 보이는 자도 있었다.
나는 어린 이종족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약과 식사를 나눠주도록 해.”
“네, 네! 알겠습니다!”
그는 부리나케 노예들에게 약과 먹거리를 전달해주었다.
머뭇거리며 쉽게 받지 못하는 주민들 가운데, 어린아이들이 가장 먼저 손을 뻗어왔다.
기껏해야 내 허리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의 아이들은 오래 굶은 듯이 얼굴이 퀭했다.
“정말 먹어도 돼요?”
“그래.”
“감사합니다! 왕님!”
아이들은 오복 만두를 집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먹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참지 못하고 음식을 받아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마,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야.”
“나무뿌리랑 벌레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감격해서 먹는 이들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웃고 있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도 보였다.
나에 대한 호의가 높아져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어려 있었으니까.
어린 이종족이 만두를 손에 든 채, 초조한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어, 그러면 흙과 벌레의 왕께서 저희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겁니까?”
이들은 결국 노예였다.
단주를 죽였지만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대로 흩어져 봐야 또 다른 노예 사냥꾼에게 노려지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줄줄이 끌고 다닐 여유도 없었다.
“아니, 나는 너희의 주인이 되는 대신 자유를 주겠다.”
나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아직 검에 묻은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노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