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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사주 헌터-192화 (191/256)

<192화>

아래를 내려다보자 찢겨진 옷 사이로 채찍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고문이라도 받던 상황인가.

내 운을 생각해보면 나쁜 역할로 배치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럴 줄은 또 몰랐다.

이 와중 나는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힐끗 보았다.

[다섯 번째 대마경에 진입하였습니다!]

[당신은 낙원국(樂園國)의 인물 중 하나로 빙의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그림 속의 세상이었다.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현실 세계와 다를 것은 없다.

알림창 아래로 나에 대한 기본 설정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빙의한 인물의 계급은 노예입니다.]

이 몸의 주인은 노예들 사이에서 태어나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흔한 설정.

양친이 부조리하게 주인에게 살해당한 뒤, 주인에게 복수를 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랄까.

그 뒤로 도망자로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가 된 모양이었다.

[성격이 호전적이며 반골 성향이 강합니다.]

나쁘지 않은 설정이었다.

이런 성격의 몸 주인이라면 빙의가 끝난 뒤에도 수습하기 편하겠지.

일단 상황 파악은 끝났으니 슬슬 몸을 움직일 차례였다.

-뿌드득!

힘을 주어 팔을 잡아당기자 쇠사슬이 맥없이 끊겨 나갔다.

나는 수갑과 족갑을 부순 뒤, 목에 걸린 쇠목걸이를 파괴했다.

분명 이게 노예의 증표였던 걸로 기억한다.

몸을 살펴보니 바지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채였다.

들어올 때 갖고 있던 아이템들은 모두 사라졌다.

저물대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 무기는 새로 조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상점창은 열리고, 능력치나 이능에는 변화가 없었다.

싸우는 데에 큰 지장은 없겠지만, 노예라.

정석적으로 이 대마경을 클리어하기에는 악조건이었다.

[낙원국의 왕이 되십시오.]

[제한 시간: 없음.]

이 대마경의 공략 조건은 낙원국의 왕이 되는 것.

아무래도 왕족, 혹은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현왕에게 접근하는 것이 쉬워진다.

이 세계의 권력이나 인맥도 적용이 되니까.

전생에 나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케이스들은 그냥 자진 하차를 한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계급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번 대마경에서는 단순히 공략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물론 노예인만큼 부족한 부분들은 있지만, 그건 인맥으로 해결하면 된다.

나 외에도 이곳에 진입한 다른 사람들 역시 그림 속의 세계에 빙의되었을 터였다.

전생의 역할들을 참고하여 뽑아왔는데, 그때와 같을지 모르겠다.

멤버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중, 근방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벌레 놈, 징하다니까. 채찍을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어.”

잠시 기다리자 곧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족보행을 하는 멧돼지였다.

그림에 그려져 있던 것처럼 그들은 사람 옷을 걸치고 있었다.

복장으로 봐서 귀족까지는 아니고 평민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놈이야. 별것 아닌 일에도 늘 반항을 하다니. 매질로는 부족한 것 같던데, 차라리 다리 힘줄을 잘라서…… 어라?”

그러다 놈들이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은 내가 방금 전까지 갇혀 있었던 감옥을 보고 있었다.

쇠창살이 뜯겨 나가고, 내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놈이 도망갔다! 얼른 잡…….”

-으드득!

놈의 머리가 한 바퀴 회전하며 요란한 뼛소리를 냈다.

감독관은 내 기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어느새 목이 180도로 돌아가 있었다.

“이, 이 노예 놈이……!”

나머지 감독관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바로 죽여도 되지만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지.

그때 놈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건방진 벌레 새끼가 감히!”

-콰직!

나는 감독관이 든 검을 붙잡아 그대로 부숴버린 뒤, 놈의 놀란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죽지 않도록 조절했지만 누런 이빨 몇 개가 피와 함께 튀어나왔다.

명치에 한 번 더 주먹을 갈기자 감독관이 바닥을 기었다.

“컥, 커헉……. 버, 벌레 주제에 어떻게…….”

놈의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경멸과 두려움이 반씩 섞인 눈동자였다.

나는 감독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벌레여도 너보다 강한 벌레니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아직 눈동자에 경멸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좀 더 손을 봐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죽은 놈이 갖고 있던 칼을 꺼내든 뒤, 살아남은 놈의 다리를 툭툭 쳤다.

“다리 힘줄을 끊을 거라고 했던가?”

“……!”

그제야 눈동자에 공포가 더욱 커졌다.

나는 칼자루에 슬쩍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얻어맞아서 그런지, 기억이 날아갔거든. 여긴 어디고 넌 누구지?”

“여, 여기는…… 노예들을 관리하는 곳입니다. 노예를 사고팔기도 하고, 그 노예를 노동에 투입하기도 하는…….”

나는 다섯 번째 대마경에 직접 들어온 적은 없지만, 비호문 멤버들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낙원국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나라는 철저한 계급제 사회다.

가장 위에는 왕족, 그다음에는 귀족, 상민과 평민 순으로 내려간다.

그중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예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한다.

가축, 혹은 물건과 비슷하게 취급되며 주인이 없는 경우에는 살해당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낙원이라는 국명이 붙기에는 우스운 모습이었다.

하긴, 왕족이나 귀족 나으리에게는 낙원이겠지.

그때, 놈이 눈알을 굴리다가 내가 빈틈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배은망덕한……!”

-서걱!

제 다리 힘줄이 잘릴 것을 걱정하던 감독관은 목이 베인 채 쓰러져 있었다.

목숨 정도는 살려줄 생각이었는데.

이곳의 규모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더 물어보려 했지만, 직접 확인해도 되는 일이다.

나는 피가 묻은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무딘 칼날이 거울처럼 내 얼굴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원래의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외부에서 편입한 사람들에게는 원래의 얼굴로 보이지만, 그림 속 세계의 인물들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아마 나 역시 이종족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기존의 인물에게 빙의를 한 거니까.

비호문 일행끼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크게 상관없었다.

일단은 여길 나가야 한다.

‘은둔자’와 ‘도둑쥐’를 사용하면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만…….

-저벅, 저벅.

나는 조용히 감옥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오자 이곳이 어디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건축 현장처럼 보였다.

곳곳에서 곡괭이질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많은 이종족이 보였다.

나처럼 허술한 옷을 걸친 이종족들은 정신없이 땅을 파고, 흙과 돌을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로 채찍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이 노예놈들아!”

조금 더 부티 나는 옷을 입은 이종족이 노예들을 향해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 채찍을 맞은 노예가 헉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헉, 커헉…….”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나이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상태가 나쁜 것은 명확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데다가 털이 숭덩숭덩 빠져 있었다.

누가 봐도 병자였다.

채찍을 맞고 일어서지 못하자, 조금 어려 보이는 이종족이 다급하게 달려와 병자를 감쌌다.

감독관이 이를 으득 갈며 다가왔다.

“뭐 하는 거지? 제자리로 돌아가라.”

“제가 더 일할게요! 아저씨는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오늘만 쉬게 해주세요!”

“이 버러지가 감히 어디서 말대꾸를……!”

감독관이 다시 한번 채찍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팔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잡고 있었으니까.

놈이 당황할 새도 없이 심장에 검이 박혔다.

-푸욱!

놈은 그대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시체를 밀어낸 뒤, 감독관 앞을 막아선 이종족을 내려다보았다.

얼떨떨한 얼굴을 한 어린 이종족을 향해 나는 말했다.

“노예들을 데리고 구석으로 몸을 피해.”

“예, 예?”

“얼른.”

방금 전의 사태를 다른 감독관들이 못 봤을 리가 없다.

어느새 무장을 한 감독관들이 사방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노예는 대체 뭐지?”

“일단 죽여! 당장 제압해라!”

어린 이종족은 상황을 눈치채고는 노예들을 끌고 다급히 안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족갑을 차고 있어서 아예 밖으로 도주하지는 못하겠지.

근처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능 ‘서리불꽃’이 발동됩니다!]

바닥을 타고 얼음들이 빠르게 뻗어나가며 감독관들의 다리를 붙들었다.

놈들이 당황하며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자리에 고정된 상대만큼 쉬운 사냥감도 없었다.

-서걱!

얼음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감독관들을 쉴 새 없이 베고, 꿰뚫었다.

놈들도 전력차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당황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컥, 커억……!”

“노, 노예 놈이 어떻게 이런 강한 이능을 쓰는 거지?”

반응을 보아하니 여기에 몰려든 놈들은 전부 말단이다.

규모를 보아하니 상당히 큰 집단인 것 같다.

윗대가리를 치지 않으면 나중에 후환이 남을 것이었다.

“얼른 단주님께 보고해!”

그때, 한 놈이 부리나케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단주에게 가는 모양이었는데 나로서는 고마울 노릇이었다.

나는 놈을 일부러 잡지 않은 채, 다른 감독관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능 ‘마탄’이 발동됩니다!]

-콰과광!

양이백으로부터 훔친 이능이 내 손끝에서 발동되었다.

마탄은 빛과 같은 속도로 적을 꿰뚫었다.

차라리 검이라면 맞부딪쳐볼 수라도 있겠지만, 이들은 무형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컥, 쿨럭…….”

어느새 주변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개 중 한 명은 아직 숨통이 붙어 있는지, 힘겹게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네놈……. 그래 봐야 단주님께서 오시면 끝장이다……!”

보아하니 단주가 단순히 상단을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력도 갖춘 모양이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노예 놈, 대체 몇 명이나……!”

안으로 들이닥친 놈이 단주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털이 반지르르한 이종족이었는데 입고 있는 옷이 화려한 데다가 질이 좋아 보였다.

단주는 나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검을 좀 쓸 줄 아는 놈이었나……. 차라리 잘됐어. 전투 노예로 비싸게 팔면 되니까.”

“다, 단순히 검만 쓰는 게 아닙니다! 저놈, 노예인데도 이능을 썼습니다!”

“뭐?”

내가 이능을 썼다는 말에 단주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에서 이능은 귀족, 혹은 왕족에게만 주로 발현되는 능력이었으니까.

이 세계와 바깥 세계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좋은 팔자를 타고나는 상위 계급일수록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노예들도 종종 이능을 사용하긴 하지만 거의 쓸모가 없다.

강한 이능을 갖고 있는 노예라는 것은 희귀 생물에 가까웠다.

바닥에 남아 있는 서리 불꽃의 흔적을 발견하고 단주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계산을 끝냈는지, 방금과는 달리 다소 누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흠, 노예 놈이지만 그래도 싸울 줄 아나 보군.”

지금 제 부하들이 열은 족히 죽어 나갔는데도, 놈은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잘 싸우는 노예는 꽤 비싼 값에 팔리니, 죽이는 대신 회유하기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이런 곳에서 노동을 하기에는 아까운데……. 어떤가, 내 호위가 되지 않겠나?”

노예에서 단주의 호위라.

다른 노예들이 들으면 혹할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능 ‘마탄’이 발동됩니다!]

-콰과광!

피할 틈도 없이 마탄이 단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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