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제대로 미쳤군.’
서강림은 스스로를 경멸했다.
신수아를 공격할 뻔했으면서, 그 방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신수아의 방을 도망치듯 나온 것은 자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치졸함에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였다.
서강림은 한숨을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유하랑의 공방이었는데, 무언가를 만드는 듯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서강림. 어서 오거라! 지금 작업을 하던 중이다.”
공방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처럼 수많은 인형과 함께 유하랑이 서강림을 반겨주었다.
유하랑은 이능을 이용해 사람 크기의 인형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서 자그마한 목우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보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서 토끼 인형이 폴짝 뛰고 있었다.
“하랑님! 이번에는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세요!”
토끼 인형 속에 들어간 영혼은 천여울이었다.
원래 쓰던 인형이 파괴된 뒤, 서강림은 잠시 토끼 인형에 그녀의 영혼을 강령해두었다.
강령 방울은 동일한 영혼이라면 횟수 차감이 되지 않았다.
옆에서 방방 뛰고 있는 토끼 인형을 향해 유하랑이 말했다.
“알겠다. 내가 역작을 만들어주지. 그나저나 몸이 박살나다니, 내가 없는 사이에 보호국 놈들이랑 싸우기라도 한 것이냐?”
“비슷하죠!”
천여울은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복수를 끝냈기 때문일까.
천여울이 자신의 복수를 끝낸 뒤, 서강림도 공주의 복수를 끝냈다.
서강림에게 한 번 파괴 되었음에도 그녀는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일단 작업은 이 정도로 하고……. 난 잠깐 서강림과 이야기 좀 하고 오마. 자리를 좀 비켜다오.”
“네에, 하랑 님! 그러면 청소하고 있을게요!”
토끼 인형을 비롯해 목우들이 후다닥 자리를 비워주었다.
유하랑은 인형을 뒤로한 채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흐음, 오늘은 얼굴이 좀 보송보송한데? 무슨 일 있었나, 서강림?”
유하랑의 질문에 서강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왠지 신수아의 방에서 잠든 사실을 들킨 것 같아서, 서강림은 질문을 대충 넘기며 말을 돌렸다.
“딱히 없었어. 그나저나 기록보관소에서 불변하는 영원에 대해 찾아낸 게 있어?”
보호국의 신의 신명을 알게 된 뒤, 서강림은 유하랑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불변하는 영원에 대해 한 줄이라도 자료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었다.
유하랑은 팔짱을 낀 뒤 입을 열었다.
“그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오래된 기록까지 찾아보았는데도 그 부분은 유실되어 있었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 와중 유하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과가 없음에도 히죽 웃는 것을 보아하니, 그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찾은 게 있는 것 같네.”
“맞아. 첫 번째의 주인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기록이 많이 파손되었으나 쓸만한 것도 있었고. 대략 이런 내용이었지.”
유하랑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의 주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에, 속죄의 길을 걷기로 했다고 적혀 있었다.”
속죄?
신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유하랑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첫 번째의 주인은 불변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대속의 업을 마치겠다고 하더구나.”
불변의 고리.
그 이름은 언뜻 불변하는 영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첫 번째의 주인이 불변하는 영원의 적대자인 것을 보면 동일한 신을 가리킬 확률이 높았다.
서강림은 유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불변의 고리가 불변하는 영원을 뜻하는 말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첫 번째의 주인은 꽤 괜찮은 신처럼 보이지.”
유하랑의 말대로 첫 번째의 주인은 악보다는 선에 가까운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서강림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잘 모르겠네. 첫 번째의 주인을 믿어도 될지.”
“수상한 부분이라도 있느냐?”
“예전부터 신경 쓰이던 부분이 있었어.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보호국의 목적은 강한 만신을 키우는 건데, 왜 백영을 보내 나를 죽이려 한 걸까?”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다.
지금이야 강해졌지만 전생의 서강림은 약해빠진 충급일 뿐이었다.
약한 자는 불변하는 영원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반면에 강한 자는 키워서 자신의 그릇으로 써야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은 불변하는 영원에게 노려질 이유가 없는데, 왜 자신을 죽이려 했을까?
또한 백영이 비호문을 살해한 방식 역시 보호국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굳이 얼굴을 노출해가며 서강림을 죽이러 올 이유가 없다.
가짜 광대패를 이용하여 죽인 뒤, 테러에 휘말렸다고 위장하면 될 일이니까.
“확실히 앞뒤가 맞지 않는구나. 서강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백영의 얼굴을 했을 뿐, 보호국 소속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연구소에서 봤던 백영들에게는 이름 대신 H-230처럼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서강림을 죽이려고 왔던 백영에게는 엄연한 이름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영이 보호국 소속이 아니라면 의심 가는 자는 하나였다.
“나는 첫 번째의 주인이 백영의 수호신이고, 나를 죽이려고 백영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점괘에서도 그렇게 나오지 않았던가.
그의 적은 두 명이고, 그중 한 명은 첫 번째의 주인이라고.
유하랑도 이야기를 듣고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그쪽이 앞뒤가 맞는군. 다만 어째서 너를 노렸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야.”
그 질문에는 서강림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명백한 진실은 당사자, 첫 번째의 주인을 만나면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섯 번째 대마경을 공략해야만 했다.
“일단 다섯 번째 대마경부터 대비하려고 해. 참여하는 인원도 좀 고민해 봐야겠고.”
다섯 번째 대마경은 꽤 장기전이 될 것이다.
그 오랜기간 동안 멤버 전원이 대마경으로 가버리면 보호국의 동태를 파악할 인원이 없어져 버린다.
유하랑은 그 이야기를 듣고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섯 번째 대마경은 어떤 곳이냐?”
유하랑의 말에 서강림은 전생에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다섯 번째 대마경에 다녀온 뒤, 사람들은 그곳을 이렇게 평가했다.
서강림이 전생의 유하랑이 했던 말을 유하랑에게 돌려주었다.
“다섯 번째 대마경은 낙원이라고 했어.”
* * *
늘 향하던 대마경의 입구였으나, 오늘따라 발밑의 감각이 다르게 느껴지는 듯하였다.
다섯 번째 대마경이 열리는 날.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은 일종의 흥분, 희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긴장감이 더욱 강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려움과 적의가 깔려 있었다.
“이야, 수가 많이 줄었네? 잔챙이들이 없으니 좋은가.”
그 와중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독고준 정도였다.
옆에 있던 윤봄이나 신수아가 긴장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런 독고준을 보며 장태헌이 투덜거렸다.
“저 자식은 왜 요즘 들어 기분이 더 좋아 보이지? 기분 나쁘게.”
장태헌의 말대로 독고준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단순히 대마경에 간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신격화되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독고준은 이런 상태였다.
원래는 내게 신명이 생겼다는 사실을 독고준에게 숨길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마경에서는 무불 통신을 이용해 연락해야 하니 사전에 밝혀둬야만 했다.
어차피 알려줘야 한다면, 그를 제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네가 쓴 소설 덕분에 내 신격화가 시작되었어. 네 수호신도 소설에서 등장한 뒤, 실제로 신이 되었다고 했지? 그런 이치인 것 같은데.]
독고준이 쓴 소설이 어느 정도 영향은 미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신격화가 독고준이 원인인 것처럼 설명했다.
독고준이 나를 배신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그런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으니까.
나보다 더욱 흥미로운 인물을 찾아내면, 그쪽에 빌붙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자신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내가 쓴 소설로 인해서 너라는 신이 태어난 거라고? 내가 신을 만들었어?]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독고준의 눈에는 광기와 환희가 감돌고 있었다.
자신이 쓴 글로 인해 나라는 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독고준에게 상당한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나는 확고하게 ‘독고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알려준 뒤부터, 꿈에서 배신하는 갈림길을 보는 일이 적어졌다.
나에게 보이는 비정상적인 관심도 한 단계 올라가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만했다.
내가 잠든 사이, 방에 몰래 들어와 감시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고 하는 것쯤이야.
기분 나쁜 건 변함이 없지만.
[대마경으로 입장합니다!]
그 사이, 문이 발동하며 순식간에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팀 단위로 이동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없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흰 벽뿐이었다.
그리고 벽 한 면에는 액자 하나가 걸려있었다.
“이게 강림 씨가 말한 그림인가요?”
신수아가 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액자라는 표현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그림이었다.
마치 벽 한 면을 모두 채운 벽화 같은 느낌.
옆에 있던 윤봄이 신기하다는 듯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이 정말 크네요. 대체 뭘 그린 걸까요?”
그곳에는 수백, 수천의 짐승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모두 사람처럼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으며,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수인들 외에 인간과 유사한 생김새를 한 종족도 그려져 있었지만, 미묘하게 인간과 달랐다.
이종족들이 입고 있는 옷은 처음 보는 복식이었으나 오래된 동양풍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림의 하단에는 다소 허름한 옷을 입은 이종족들이 있었고, 그림 위로 올라갈수록 복식이나 주변 풍경이 화려해졌다.
아무래도 계급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가장 위에 앉아 있는 이종족은 화려한 의복과 의관을 갖춘 채,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하늘이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좌의 뒤로는 날개 달린 용의 석상이 그려진 채였다.
그림 구경은 어느 정도 끝났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높은 확률로 모두 흩어질 테지.
나는 멤버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다들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시죠? 안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나는 가장 먼저 그림으로 다가갔다.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대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낙원국(樂園國)으로 진입합니다!]
그림의 형태가 일그러지더니 색채가 해일처럼 내게 몰려왔다.
수많은 색깔이 내 몸을 휘감으며 내 영혼과 몸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쇠비린내가 풍겨왔다.
-철컥, 철컥.
나는 어두운 방 안에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없다.
그저 창살 너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등잔불의 빛만이 발치를 밝혀줄 뿐이었다.
피가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철컥, 철컥.
팔을 흔들어보자 손목을 묶고 있는 수갑과 쇠사슬이 부딪쳐 마른 쇳소리를 냈다.
양팔이 수갑과 쇠사슬에 묶여 양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나는 무릎이 꿇린 채 포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