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아뇨, 아직. 인지도는 꾸준히 쌓이고 있지만 충분한 양은 아닌 것 같아요.”
신수아가 유명인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신격화 단계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호문이 성장하며 주목받는 것은 문주인 나일테니.
이대로라면 신수아가 신격화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히 다섯 번째 대마경은 그 내용상 각성자의 인지도를 올리기 쉬운 구조다.
대마경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만, 찝찝한 부분도 있었다.
[공 팀장님, 대마경 역시 보호국이 만든 작품입니까?]
공주를 심문할 때, 나는 대마경에 관한 것도 물어보았다.
그들이 대마경에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보호국과 대마경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불변하는 영원은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걸맞은 만신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들었다. 기껏해야 몇 달, 잘해야 1년을 버틸 뿐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더군.]
어린 시절, 불변하는 영원은 나를 찾아왔었다.
내게 지독하게 매달리기에 내가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런 식으로 접근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때 신을 받아들였다면 나 역시 죽었을까?
[그러다 불변하는 영원은 미래에 각성자들이 나타나고, 마경의 문이 현세에 출몰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기로 했지.]
[자신에게 적합한 그릇이 없다면, 그릇을 직접 키워내겠다고.]
[불변하는 영원은 보호국을 만들고, 보호국을 이용해서 대마경의 출현을 계획했다. 기존에 존재하는 마경 중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그 문을 연결했지.]
[그리고 대마경을 미끼로 하여 각성자들이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즉, 대마경은 교육 시설의 연장선인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육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의 사육장에 갇혀 있던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신수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마경을 공략하지 않는 게 옳은 길일까요?”
“하지만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불변하는 영원의 계략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대마경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곳을 공략해서 얻는 보상은 확실히 매력적이고, 나의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다섯 번째 대마경은 인지도를 올리기에 좋은 구조였다.
“다섯 번째 대마경은 반드시 우리가 공략해야 합니다. 전생과 달라지지 않는다면, 신수아 씨도 그곳에서 신격화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신수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민을 하는 듯 미간이 작게 구겨져 있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대마경 자체로도 위험한데 보호국이 관여했다니 좀 걱정이 되네요. 미지의 알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아요. 특히…….”
그녀가 나를 힐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라나놋이라는 가짜 광대패가 강림 씨의 피를 노렸다고 했죠?”
“네. 맞습니다.”
“라나놋이 피를 가져가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미 강림 씨의 피로 미지의 알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수아 씨도 눈치채신 것 같군요.”
라나놋은 피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지만, 이미 보호국이 내 피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교육 시설, 마지막 일곱 번째 문을 빠져나올 때.
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긴 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를 돌본 것은 보호국이다.
강한 만신을 원하던 그들이라면 그사이 내 피를 가져갔을 확률이 충분했다.
그리고 신수아의 피 역시.
“그때, 저도 신수아 씨도 오래 잠들어 있었죠. 공주에게 물어보니 실제로도 피를 가져가 연구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내 피를 추가적으로 가져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내가 틈을 주지 않아 라나놋을 보냈다고 한다.
그 역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신수아의 표정이 굳어갔다.
나도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런 표정이었겠지.
신수아가 찝찝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의 피로 국장의 그릇을 만드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신력을 넣지 않을 경우 본체와 똑같은 외형이 태어난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네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나 신수아의 클론 같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개체와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공주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피를 주입한 알은 부화하지 않은 채 성장실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이백이 연구소를 파괴하였고.
알들이 화재로 인해 모두 타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대책은 마련해두겠습니다. 저는 그러면…….”
이제 슬슬 유하랑에게 가서 조사한 사항을 들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방을 가득 채운 풀내음에 잠시 다리가 멈칫거렸다.
마치 숲속에 있는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환각도, 환청도 없이 그저 세상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이곳이 천국 같았다.
그녀의 기운이 나를 생(生)하는 것을 떠나, 신수아의 존재는 내게 일종의 쉼터였다.
신수아가 멀쩡하게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꿈에서는 늘 죽는 모습만 봤으니까.
이렇게 핏자국도, 상처도, 고통도 없이 서 있는 신수아의 모습은 내게 도리어 환상처럼 느껴졌다.
“강림 씨?”
신수아는 왜 그러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과 갈색이 섞인, 녹나무 같은 눈동자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섯 번째 대마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나는 방에 머무르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아니,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대마경에 진입하기 전 전달해야 하는 사항이 많이 있었으니까.
신수아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려는 찰나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려왔다.
“아, 잠시만요.”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되었다.
“문하생들 쪽에서 온 연락이네요. 잠깐만 받고 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그러면 나도 그냥 가겠다고 말을 하려는데, 신수아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녀의 방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은 내게 큰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신수아가 떠난 뒤에도 방 안에는 청량한 나무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자 숲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았다.
피도, 시체도, 타오르는 연기의 냄새와 썩어들어가는 냄새도 없다.
그저 평화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회귀 전처럼, 비호문의 일행들과 함께 보내던 일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신수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우리에게는 희박한 미래를 상상했다.
* * *
“강림 씨, 저 왔어요.”
급히 통화를 끝낸 신수아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오며 서강림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5분 정도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 떠난 것일까?
신수아가 다시 한번 서강림을 부르려던 찰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소파에 서강림이 앉아 있었다.
생각에 잠긴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잠에 빠져 있었다.
‘강림 씨가 졸고 있다고?’
그 풍경이 신수아에게는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늘 칼같이 생활하는 사람인지라 서강림이 쉬는 모습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서강림이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다니.
신수아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히 근처로 다가갔다.
마치 잠든 맹수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수아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라면 침입자가 접근했을 때 곧바로 깨어났을 텐데도.
‘나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걸까.’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수아는 약간의 기쁨을 느꼈다.
아직도 서강림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거리를 둔 채 서강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누구라도 눈길이 갈법한 얼굴이었다.
수려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미남이었지만 신수아가 그를 바라보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눈가에 짙은 다크 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대로 못 잤나 본데…….’
사실 오늘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서강림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빠 보였고, 여가를 가지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친 티를 내지 않고 늘 달려가던 사람이, 지금은 이곳에서 짧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지쳤기에 잠들어 버린 걸까.
우리를 살리겠다고 혼자서 또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작 우리는 전생에 같은 문파원이었을 뿐인데, 당신은 왜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걸까.
잠든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안쓰러움이었다.
이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그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면 좋겠다.
쪽잠인데도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서강림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아직 날이 쌀쌀했다.
근처에 있는 담요라도 끌어와 그에게 덮어주려던 순간.
신수아의 시야에 천장이 들어왔다.
-콰당!
신수아의 놀란 눈동자에 서강림이 비쳤다.
어느새 자신은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신수아의 손목을 붙들어 제압한 서강림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서강림은 자신에게 무언가가 닿자,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잡아 제압해버렸다.
신수아의 실력이라면 피할 수 있었지만 방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방비했던 것이다.
“……아.”
서강림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신수아를 보고 몹시 당황했다.
이토록 당황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다급히 신수아를 일으켜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졸았습니다. 그래서 신수아 씨인 줄 몰랐습니다.”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는 게 늦었다면 신수아를 공격할 뻔한 상황이었다.
서강림은 자신이 신수아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깜빡 잠들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혹시 다치진 않았습니까? 제가 공격을 했다거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친 곳 하나도 없어요.”
신수아도 아직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도 서강림은 안심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신수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신수아가 달래듯이 말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까 대마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예. 그런데, 그……. 사람을 다 모아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강림은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여, 신수아는 차마 잡지도 못했다.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일 뿐.
“알겠어요. 그러면 다음에 불러주세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서강림은 도망치듯 신수아의 방을 빠져나왔다.
아직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공격하려 했다는 게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착각을 해서 공격했다면?’
얼마 전에도 환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TV를 박살 내지 않았던가.
혹여라도 자신이 비호문 일행을, 신수아를 착각해 공격한다면?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 그는 이번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악몽을 꾸지 않은 게 얼마 만이지?’
늘 날이 서 있어 잠드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잠들더라도 고통이었다.
그런데 신수아의 방에서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잠을 자면서도, 꿈에서 깨어나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다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몇 시간이고 그 방에서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꿈도 없이 그저 편안한 잠.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서 잠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