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대체 놈들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니, 지금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들이 어떻게 침입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당장 급한 것은 놈들을 제압하는 것.
또한 이 연구소는 이미 위치가 들통났으니 버려야 했다.
양이백이 다급히 연구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경호 인력이 광대패를 상대하는 사이, 연구원들은 중요 샘플과 자료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정리한다. 최악의 경우 미지의 알과 공주 팀장만 챙겨서 대피해!”
“네, 팀장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와중, 양이백은 공주가 누운 침대를 덥썩 붙잡았다.
침대를 끌고 비상 출구로 향하려 하자, 공주가 거칠게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양 팀장, 이거 풀어! 나도 같이 합세를……!”
“공 팀장이 도주하면 더 곤란해져. 마력 구속구를 채우느라 고생을 했으니. 좀 자고 있어.”
양이백은 공주에게 진정제를 투여하려고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당장 그릇이 될 공주를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때, 공주의 눈이 크게 뜨이고 뭔가를 외치려던 순간.
[이능 ‘철의 장벽’이 발동됩니다!]
-카가강!
바닥에서 철로 된 장벽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장벽을 후려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양이백의 목이 날아갔을 공격이었다.
‘역시 은둔자를 써도 감지를 하는군.’
서강림이 ‘은둔자’를 사용하고 기척을 모두 죽인 채 접근하였으나 양이백은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가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져왔다.
-콰가각!
서강림을 향해 철로 만들어진 뿔기둥이 바닥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그 공격들을 피해가며 양이백에게 접근을 하려 했지만, 양이백은 쉬이 틈을 주지 않았다.
“광대패,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가면을 쓰고 있는 터라, 서강림의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였다.
서강림이 대답하지 않자, 양이백은 양쪽으로 목을 꺾으며 말했다.
“하아, 말도 안 해? 정말 여러모로 귀찮게 한다니까.”
양이백의 얼굴에는 다급함 대신 약간의 짜증과 피로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자신이 질 리가 없다는 오만에서 나오는 권태로움이었다.
그가 퀭한 눈으로 서강림을 노려보았다.
“일단 생포해서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이능 ‘늪지화’가 발동됩니다!]
양이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척한 무언가가 서강림의 발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하던 바닥이 어느새 늪처럼 푹 꺼지기 시작했다.
몸이 끌려가기 전, 서강림이 벽쪽으로 뛰어오르며 상황을 살폈다.
‘이 방뿐만 아니라, 연구소 전역에 이능을 발동시켰군.’
서강림의 분신들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한 걸 알 수 있었다.
타이밍을 놓쳐, 지면 아래로 끌려들어간 분신도 몇 있었다.
이 와중에 연구원에게는 늪지화의 피해가 가지 않았다.
아군이 아닌 적군에게만 발동되는 고도의 주술이었다.
-그오오오……!
그 사이 바닥에서 진흙 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뭉개지고 일그러진 거대한 흙인형 같은 생김새.
양이백이 어느새 공주를 붙든 채, 진흙 덩어리들에게 말했다.
“확보해.”
-그오오오!
명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흙 덩어리들이 서강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강림의 검이 놈들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나, 형체가 없는 마수인지라 치명타가 되지는 못했다.
얼려버리거나 태워버리면 차라리 낫겠지만, 이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놈들이 내 정체를 눈치채게 되면 곤란하다.’
현재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가 들키지 않았지만, 특징적인 이능이나 아이템 등을 사용하면 눈치를 챌지 모른다.
전기를 끊어 감시 카메라는 모두 차단했지만 통신은 살아있는 상황.
외부로 자신에 대한 정보가 빠져나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많은 능력을 포기한 채, 검 한 자루만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남이 보면 미쳤다고, 만용이라고, 객기라고 할 것이었다.
강적 앞에 검 한 자루만 들고 뛰어들다니.
회귀 전, 벌레급의 팔자로 살아온 서강림은 언제나 자신의 분수를 알고자 했다.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아는 것, 그것이 약자가 갖춰야 하는 능력이었다.
약자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면 도망치거나 숨어,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서강림이 양이백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콰과광!
검에 마력을 실어 날리자, 진흙 덩어리들이 터지듯 파괴되는 것이 보였다.
피와 뼈 대신 흙과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주를 데리고 대피하려던 양이백이 그 파공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카가강!
어느새 서강림의 칼날이 그의 목덜미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장벽에 또다시 공격이 막힌 상태였다.
양이백이 귀찮다는 듯이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으음, 늪지화가 잘 안 먹히는 걸 보니 오행이 목(木)인가?”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서강림을 응시하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 지하에 하늘이 열린 것만 같았다.
[이능 ‘마탄’이 발동됩니다!]
[마탄의 속성이 금(金)으로 변경됩니다!]
상공에 강렬한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마탄의 세례가 서강림을 향해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금의 기운을 띤 광선이 한 곳을 향해 집중되자 눈이 멀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카가각!
마탄이 서강림의 온몸을 비처럼 꿰뚫었다.
일부는 파훼를 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대다수의 공격이 서강림을 직격하고 말았다.
그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꼬꾸라지자 양이백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러게, 평화롭게 대화하면 얼마나 좋아.”
가급적 생포를 하려고 힘조절을 했으나, 팔다리가 전부 아작이 나도 당연한 공격이었다.
애초에 목숨만 붙여 놓는 수준으로 조절을 했다.
그가 쓰러진 서강림을 집어 들려고 하는 순간.
마탄의 빛보다 더욱 강렬한 안광이 번뜩였다.
-서걱!
양이백이 놀랄 사이도 없이, 검이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황급히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여 치명상을 피했으나, 상대방의 검이 너무도 예리했다.
그가 다급히 뒤로 물러서서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손이 피로 젖어드는 가운데, 양이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탄을 맞고도 멀쩡하다고……?!’
서강림은 마탄을 맞아 온몸이 그을리고, 곳곳에서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양이백은 그 사실에 당황하다가 곧바로 다음 마탄을 준비했다.
[마탄의 속성이 화(火)로 변경됩니다!]
[마탄의 속성이 토(土)로 변경됩니다!]
속성을 변경하여 서강림을 향해 마탄을 발사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날렵하게 피하고 파훼하였다.
몇 공격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치명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양이백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뭐지? 왜 공격에 모두 내성이 있는 거지? 이 광대패, 모든 오행 속성을 갖고 있기라도 한 건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중 속성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주술에 능통한 양이백마저도 4 속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강림은 특별했다.
[오행 속성을 목, 화, 토, 금, 수로 지정하였습니다!]
[모든 속성 공격에 면역을 지닙니다!]
서강림이 이제까지 훔쳐 온 운명들 중에는 오행도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네 번째 대마경에서 얻은 아이템 역시, 양이백의 공격을 막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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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파마의 목걸이
[등급] 신삼품(神三品)
[설명]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주술의 데미지를 50% 경감시킨다. 주술과 착용자의 오행이 상생 관계일 경우, 경감률이 90%까지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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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양이백이 가하는 데미지 중 90%는 휘발되고 있는 상황.
10%의 데미지만으로도 충격이 상당하긴 했지만, 버틸 수 있는 레벨이었다.
양이백은 그 모습에 감탄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까지 내 공격이 안 먹히다니……. 이 정도 능력자라면, 공주를 대신해 그릇이 될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가능하다면 놈을 포획하고 싶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가 빠르게 통신을 보냈다.
“아직도 나머지 광대패를 제압하지 못했나? 지원군은?”
“[그, 그게……! 늪지화가 되었어도 놈들이 너무 강합니다! 그리고 지원군이 바깥에 발이 묶인 상황입니다!]”
지금은 서강림이 지시를 내려, 광대패가 병원 바깥에서 소동을 벌이고 있는 상황.
광대패가 나타난 이상 보호국이 그것을 보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안으로 접근하려는 차사는 저격수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고 있었다.
“하아, 결국 혼자 해야겠네…….”
그는 반쯤 지친 낯이 되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표정과는 다르게 손끝에는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능 ‘유성탄’이 발동됩니다!]
-쩌저정!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공격이 서강림을 향해 날아 들었다.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강력한 공격에 연구소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강림이 유성 속을 달려 나가며, 반신화를 발동시켰다.
[‘반신화’가 발동됩니다!]
반신화를 발동시키자 그의 몸 속에서 신력이 폭발적으로 일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강림의 검이 양이백이 쏘아대는 유성탄을 정면으로 갈랐다.
-쩌저정!
양측의 공격이 부딪치자, 충격파가 발생하며 사방을 찢을 듯이 퍼져 나갔다.
압력을 이기지 못한 조명이 모두 깨져 파편으로 흩날렸다.
정전 탓에 제 역할을 못하던 조명과 비상등마저 모두 박살이 난 상황.
어둠이 찾아온 가운데, 마탄의 빛이 번개처럼 번쩍거리며 사방을 밝혔다.
점멸.
빛과 함께 1초가 수백으로 쪼개져 분절하는 것만 같았다.
분절하는 세계 속에서, 양이백은 가면을 쓴 사내가 유성의 비를 가르는 것이 보였다.
데미지가 아예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닌 듯, 살갗이 타오르며 탄내가 났다.
점멸.
그럼에도 사내는 더욱 불이 붙은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 어떤 주술도, 그 어떤 공격 따위도 무용하다는 듯이.
점멸.
어느새 사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양이백은 죽음의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다급히 공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점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철의 장벽이 반동강이 났다.
양이백은 다급히 온몸에 마력을 둘러 자신을 방어했다.
점멸.
-으드득!
서강림의 검이 양이백의 가슴 중앙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왔다.
양이백의 몸을 두르고 있던 마력은 물리적인 형체를 띤 것처럼,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서강림이 검을 박아 넣은 곳을 중심으로 실금이 갔다.
-서걱!
마력 갑옷을 뚫고, 파격음이 혈향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이백의 가슴께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베이고, 빈틈을 드러났다.
서강림이 그의 목을 베어내려던 순간, 뒤편에서 시취 냄새가 느껴졌다.
-콰과광!
그와 동시에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서강림이 다급히 몸을 피한 사이, 폭발로 인한 연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연기 사이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양 팀장. 진작 풀어주지 그랬습니까.”
들려오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
공주가 구속구에서 해방된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