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연구원 중에 서강림처럼 사주창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는 듯싶었다.
그는 마수의 얼굴과 손 등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양이백이 조용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능은?”
“단순 공격 이능 정도입니다.”
“그래도 등급은 높으니 광대패로 쓰면 되겠지. 우선 성장실로 옮겨두도록.”
어느새 마수는 환자복 같은 옷을 걸친 채, 운반형 침대에 뉘여져 있었다.
연구원들이 침대를 끌고 성장실로 향하자 차가운 냉기가 환풍구 안까지 전해져왔다.
‘……성장실이라고 했지.’
서강림은 넓은 방 안을 가득 채운 거대한 캡슐형 관들을 바라보았다.
B-142라고 명명된 마수는 곧 비어있는 관에 눕혀졌다.
양옆으로 쭉 늘어선 캡슐 안에는 인간형 마수들이 나란히 누워 잠든 채였다.
‘이 마수들을 광대패 대신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나 그것이 이 연구소의 존재 의의는 아닐 것이었다.
분명 그들은 ‘그릇’으로 쓰기에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릇이라면…… 설마 만신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던 건가?’
마수에게 신내림을 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수에게도 분명히 사주창이 존재하고, 인간형 마수는 그 운명을 훔칠 수도 있었다.
‘인간에 한없이 가까워진 마수라면 신내림이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인간을 찾아내 신내림을 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유용할지도 몰랐다.
이들은 미지의 알을 특정 시각에 부화시켜, 속성과 사주 등급을 사전에 조절하고 있었다.
강력한 만신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보호국이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직접 보니 충격이 제법 심했다.
그때, 양이백의 인이어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국장님이?”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곧바로 발을 옮겼다.
“아직 여유는 있었을 텐데……. 알겠다, 바로 가도록 하지.”
다급히 성장실을 나서는 양이백을 따라 서강림도 발을 옮겼다.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양이백이 들어선 장소는 연구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넓은 공간이었다.
비행기라도 보관할 만큼 거대한 창고 내부에 수많은 기계 장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앙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여러 연구원이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컥, 커헉……!”
침대에는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 누워 있었으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기계 장치와 관이 삽입된 채 누워있어 그 사람 역시 기계의 일부로 보일 지경이었다.
환자가 발버둥을 치면서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진 순간.
서강림의 시선이 환자의 얼굴에 박혔다.
그 얼굴을 보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공기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백영이었다.
은처럼 흰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런 식의 재회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살기등등한 분위기로 자신을 마주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백영을 마주하면 복수심이 머리 끝까지 올라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당혹감이 더욱 컸다.
왜 백영이 저런 꼴로 있단 말인가?
그때, 양이백이 작게 욕을 지껄이며 침대로 다가갔다.
“에휴, 결국 이 꼴이 났군.”
백영은 발작이라도 일어나는 듯 몸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넘친 피가 앞섬과 은색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가 연구원들을 향해 말했다.
“마력제 투여해. 강화제도.”
연구원들이 다급히 약을 투여하며 진정시켜보려 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가까스로 멎었으나, 연구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양이백이 바이탈 신호를 확인하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42대 국장, 13시 52분 사망. 그래도 이번에는 꽤 오래 버텼군.”
그가 흰 천을 끌어 올려 국장의 시체를 덮었다.
자신의 원수이던 백영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양이백의 발언에 서강림은 당황하고 있었다.
‘42대 국장이라니?’
보호국이 세워진 지 길어봐야 십 몇 년일 텐데, 42대?
서강림은 의아해하던 중, 어렴풋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호국의 신, 만신을 갈아치우고 있던 건가.’
너무 강한 신이 인간에게 내려올 경우, 수명이 줄 거나 미쳐버리는 식으로 대가가 주어지곤 하였다.
수도원에서 마주쳤던 베엘제붑의 사도가 처참하게 죽었던 것처럼.
어떤 신들은 만신을 일회용처럼 사용하고 버린 뒤, 새로운 만신을 찾기도 하였다.
‘국장이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 늘 가면을 썼던 건, 사람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인가.’
대체 어떤 신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백영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던 서강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실을 토해낸 뒤, 자신의 손으로 죽였어야만 했다.
증오와 분노, 혼란을 삼키며 서강림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연구원 중 한 명이 침대차를 끌며 들어왔다.
“양 팀장님, 다음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다만 예정 부화 시기를 맞추지 못한 터라…….”
“어쩔 수 없지. 실험이나 해보자.”
침대차에는 누군가가 실려 있었다.
거기에 있는 얼굴 역시 익숙한 모습이었다.
거기에도 백영이 있었다.
‘백영이 또 있다고? 쌍둥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리 봐도 백영이었다.
그 얼굴을 착각할 리는 없다.
그가 빠르게 두 사람의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이름 항목이 서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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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H-230
[이름] S-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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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인간의 이름은 아니었다.
서강림이 현재 상황을 정리하려 애쓰는 사이, 양이백이 입을 열었다.
“신내림이 시작된다.”
그 말과 동시에 잠들어 있던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크게 뜨인 두 눈에는 공포와 고통이 가득했다.
그녀는 불에 산채로 던져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아악! 싫어, 싫어! 당장 나가! 나가……!”
방금 전, 백영이 죽었던 장면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나가라는 비명이 바이탈 신호와 함께 사방을 가득 채우기를 몇 분.
요동치던 여자의 팔이 부르르 떨리다 툭 떨어졌다.
바이탈 신호는 또다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 역시……. 무리였네.”
양이백은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연구원 중 하나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신내림을 받을 그릇이 이제는 없습니다. 국장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괜찮아, 새 그릇 마련해 놨어.”
양이백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곧 누군가가 침상차에 실려 안으로 실려 들어왔는데, 그 역시 구속구로 온몸이 꽁꽁 포박된 채였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백영은 아니었다.
“양이백 팀장! 이게 무슨 짓이지? 당장 풀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서강림도 잘 아는 인물.
보호국 2팀 팀장인 공주였다.
공주 팀장은 평소의 그 오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짜증과 다급함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양이백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짓인지는 공 팀장도 알잖아. 아, 이제는 강등되었으니 팀장이 아닌가.”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실패를 했기로서니, 강등이라니! 다른 놈들도 많잖아!”
“나도 안타깝게는 생각해. 피의 잔만 있었어도 국장님이 좀 더 버텼을 텐데, 죽어버렸는걸?”
공주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국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움직임이 없었다.
공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양이백을 노려보았다.
“다른 실험체가 많잖아. 놈들한테 신내림을 시켜!”
“쓸만한 실험체는 이미 다 써버렸어. 나머지들은 역량이 부족해서 신내림을 받아 봐야 곧바로 미쳐버리거나 죽는다고.”
양이백이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한 대화 자체가 그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공 팀장. 공 팀장 정도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거니까 그릇으로 쓰는 거라고.”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해?”
“서문 팀장 질투했잖아? 승진하고 싶었는데 잘 됐지. 버티면 국장이 되는 거야. 힘내 봐.”
양이백은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며 공주를 실험대 위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양이백이 물러날 기색이 없자, 공주가 이제는 애원하는 어조가 되었다.
“제발 서문 팀장한테 말해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첫 번째의 주인을 찾는 일도 내가 진행 중이잖아! 그걸 마무리 지으면……!”
“아, 그거 4팀 팀장한테 이미 넘어갔어. 포기해.”
공주의 말을 흘려들으며 양이백이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는 강화제와 마력제로 보이는 아이템이 잔뜩 준비된 상황.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강림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의 주인을 찾고 있다고? 어떤 이유로?’
아군으로 삼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인가.
아니면 적이기에 찾고 있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첫 번째의 주인은 보호국의 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보호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공주 팀장 같은 요직까지 희생시킬 정도면, 놈들의 상황이 꽤 급한 모양이야.’
현재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공주만이 유일한 그릇으로 보였다.
이 상황에서 공주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신이 없는 신은 직접적으로 현세에 개입할 수 없다.
국장의 부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강림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오늘 이곳에 잠입한 목적은 연구소의 내부를 파악하는 것.
그러나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짜 둔 두 번째 계획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만일의 상황이었다.
“제기랄, 네가 뭐라 하든 내가 신내림을 거부하면 끝이야!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공 팀장, 구질구질하게 굴 거야? 고문실 가는 것보다 지금 받는 게 나을 텐데? 신내림 받는 게 살 확률이 조금이나마 높을 걸?”
그들이 언쟁을 벌이는 사이, 서강림은 행동을 개시했다.
-파지직!
삽시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내부의 전기가 모두 끊기고 희미한 비상등의 녹빛만이 발치를 밝히자, 내부에 있던 연구원들이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양이백이 미간을 일그러트린 뒤, 인이어에 대고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정전인가?”
“[누군가 강제로 전력을 끊었습니다! 아무래도 광대패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광대패가 들어왔다고? 병원을 통해 들어왔나?”
“[그건 아닌 듯합니다! 병원 쪽에는 아무 이상이…….]”
-콰직!
이어폰 너머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양이백이 듣고 있는 소리를 서강림도 들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서강림의 분신이 연구소 내부를 휩쓸고 있었으니.
그의 분신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터라, 연구원들이 보기에는 광대패가 쳐들어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신들이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 서강림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현재 건물 지하에까지 비호문이나 광대패가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서강림이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하나.
혼자서도 이 상황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 다들 막아! 광대패 놈들의 수는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놈들이 너무 강합니다……!]”
분신들은 서강림의 능력을 모두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했다.
인이어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양이백은 눈을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