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시간이 지날수록 이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략 조건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보스를 잡으라는 것도 아니고, 섬멸이라니. 그렇다면 최초 공략자는 어떻게 정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마수를 죽인 사람이 최초 공략자가 되는가?
그게 아니라면 가장 많은 수를 죽이는 것이 조건인가?
이현은 간부 중 하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찰조로부터 보고는 있나?”
“아직입니다. 찾아보고 있지만 수상한 장치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확실히 이 대마경에 뭔가가 있긴 할 거다. 이토록 강한 위화감이 드는 걸 보면…….”
이현의 능력 중 하나는 바로 공간을 감지하는 것.
사방위와 산세, 지세, 수세 등을 파악하여 그 기운과 흐름을 느끼는 능력이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이곳의 풍경이 다르게 보이고 있었다.
‘이 대마경, 뭔가가 일그러져 있다.’
이 대마경에 들어섰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마력의 방향이 다소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혼돈 가운데서 규칙성이 느껴지는 듯한 마력의 흐름.
‘그동안 여기서 찾은 것 중, 수상한 건 호백석 정도인가.’
이현은 철갑어의 사체로 다가가, 살덩어리 사이에서 돌을 꺼냈다.
지난번 서강림이 획득한 것과 같은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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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호백석
[등급] 귀일품(鬼一品)
[설명] 독특한 마력을 발산하는 마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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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마경에 장치가 있다면, 이것이 힌트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직까지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호백석을 주머니에 넣은 순간,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호백석’이 10개가 모여 공명을 시작합니다!]
[‘호백석’의 마력이 또 다른 ‘호백석’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호백석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현이 호백석을 꺼내 쥐자 끊임없는 진동과 함께, 어떤 끌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현은 먼 곳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력을 감지했다.
‘이게 바로 단서였던 건가……!’
단서를 얻은 것은 좋았지만,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서강림 역시 상당한 강자.
철갑어를 쉽게 처치하는 서강림이라면, 이 사실을 진작에 눈치챘거나 곧 눈치챌 것이 뻔했다.
“간부들은 즉시 따라오도록.”
전투가 끝났으나 쉴 틈도 없이, 그는 다급히 간부 두 사람을 이끌고 마경 안쪽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으나, 한 발을 더 내디딘 순간 호백석이 더욱 강력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호백석’의 효과로 인해 결계가 가시화됩니다!]
호백석의 마력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자, 눈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강력한 허상 결계가 흐릿해지자 이현은 그 너머에 숨겨진 장소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니 아무리 수색을 해도 못 찾았군.’
호백석이 없는 한, 다들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터였다.
간부들은 아직 결계가 보이지 않는 듯, 멀뚱멀뚱 허공만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현은 나머지 호백석을 두 명에게 나눠주었다.
“둘은 따라오고,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해.”
호백석을 건네받은 간부들은 그제야 눈앞의 풍경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대마경 안쪽을 향하자, 넓은 터와 함께 그 중간에 기괴한 형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백석갑어’를 발견했습니다!]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백석갑어가 알을 낳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에서 흘러넘치는 호백석과 같은 종류의 마력.
간부 한 명이 감탄과 경악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마수들이 생성되고 있었군요.”
“그런 것 같군. 저게 아무래도 그 장치인 것 같고.”
이현의 예상대로 이 대마경에는 따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저 마수를 처치하지 않는 이상 이 대마경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현에게 있어서 눈앞에 있는 마수들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일단 물러난다. 이쪽으로 따라오도록 해.”
기이한 마력의 흐름이 이 안으로 들어오자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이곳의 지하로 흐르고 있었다.
‘단순한 마력은 아니야. 그것보다 더욱 탁하고, 불길한…….’
살(殺)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이 불길한 마력.
발밑의 감각이 뭔가 이상했다.
지상 위로는 마기가 가득했으나, 지하에는 사뭇 다른 기운이 감지됐다.
이현은 한 발씩 내디디며 땅의 기운을 읽었다.
그가 마력을 더듬는 것처럼 추적하던 그때.
이현이 우뚝 멈춰 서서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과광!
그가 땅 중에서 혈이 약한 곳을 직격하자 바닥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바위가 부서지듯 돌덩어리가 튀어 오르더니 그 아래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간부들이 놀라서 다가왔다.
“문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이 아래에 뭔가가 있다.”
대마경 전역에서 느껴지던 위화감이 이곳에 접근하자 한층 더 강렬해졌다.
지하에서 인위적인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우선 상황만 살피고 바로 나오는 걸 목표로 한다. 한 명은 경계를 서도록 해.”
간부들이 이현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깨진 틈을 통해,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현은 강렬한 마력을 감지했으며, 다른 사람 역시 이쯤 오니 뭔가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여긴 숨겨진 장소일까요? 위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땅 위의 마경이 오지처럼 참혹한 풍경을 보여주던 것과 다르게, 지하는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유적 같은 느낌.
그들이 점점 안으로 들어가던 순간, 이현이 우뚝 멈춰 섰다.
‘물소리……? 지하수라도 흐르는 건가? 하지만 이 냄새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곧 그 정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지하로 흐르는 물줄기가 붉었다.
사방에서는 쇠비린내가 풍겨오는 중이었다.
“이건 피인가?”
날카로운 비린내에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출 정도였다.
피가 작은 강을 이루어 흐르는 듯하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땅에 고인 피가 아래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위에서는 격렬한 사냥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었다.
죽은 마수의 피가 모여 한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길의 도착지점에는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저 잔은 대체 뭐지? 피가 계속해서 들어가는…….’
이현이 의문을 느낀 그 순간, 한층 더 강렬한 피 냄새가 흘러넘쳤다.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이 살기.
그가 다급히 검을 휘둘렀으나, 상대의 공격이 더 빨랐다.
-푸욱!
암기 하나가 이현의 허벅지에 깊이 박혔다.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않았다면 즉사했을 터였다.
지금 바닥에 쓰러져있는 흑의문 문파원처럼.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자신 정도 되는 각성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공격은 빠르고, 신속했다.
그가 다급히 뒤로 물러서자 습격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불청객이네?”
검은 가면을 쓴 사람이 여럿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광대패.
이현은 적을 확인한 순간, 곧바로 광대패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앙!
치솟아 오른 돌기둥을 피하지 못한 채, 광대패 하나가 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광대패의 목에는 은침이 박히고 곧 같은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상공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흑의문 문주답네.”
상공에는 가시 바퀴가 둥둥 떠 있었다.
바퀴를 조종하는 것으로 보이는 광대패는 바퀴에 올라탄 채 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행 타입인가. 상성이 좋지 않군.’
이현은 상대를 노려보며 자신과의 역량을 가늠해보았다.
그의 이능은 강력하지만 지상전에서 빛을 발했다.
또한 진공 결계를 사용하기에는 상대방의 움직임이 너무도 재빨랐다.
“이렇게 부수고 들어오면 어떡해? 하아, 곤란해. 위에서 깨지겠어.”
광대패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가시가 박힌 바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현은 바짝 긴장하여 퇴로를 확인하였으나, 성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목격자는 제거해야지. 그러면 안…….”
-콰아앙!
이현이 공격을 받으려던 그때, 그가 진입했던 통로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광대패의 비명 소리와 함께.
바퀴 위에 올라타 있던 광대패가 다급히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문파원들이라도 더 데려왔나? 정리하느라 고생 좀 하겠는데……. 아니?’
입구를 향해 진입하고 있는 헌터의 얼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광대패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서강림?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콰앙!
굉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서강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당황하는 사람은 광대패 뿐만이 아니었다.
서강림은 당황해하는 이현을 힐끗 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이현이 죽을 위기에 처했군.’
이현은 회귀 전, 이곳에서 광대패에 의해 죽었다.
다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뉴스를 통해 단편적인 일만 파악할 수 있었다.
[흑의문 문주 이현 씨가 네 번째 대마경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도망친 이현 씨는 광대패와 조우했다는 말을 남긴 채, 그 자리에서 숨져…….]
[보호국 측에서 조사에 나섰으나 광대패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광대패는 이 대마경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현은 사망했다.
이현 정도 되는 만신이 죽을 사건이라면 이번에도 높은 확률로 재현될 터.
때문에 서강림은 대마경 공략을 미룬 채, 이현의 뒤를 쫓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지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서강림이 흘러내리는 피 사이로 반짝이는 잔을 바라보았다.
‘저기 있는 아이템……. 범상치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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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의 잔
[등급] 용일품(龍一品)
[설명] 피를 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아이템. 들어가는 양에 제한은 없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담긴 피의 양에 따라 정제된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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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경의 공략 조건은 마수의 섬멸.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의 마수가 죽어 나가고, 피를 흘렸을지 알 수 없었다.
저 잔에 담긴 피의 양 역시 가늠할 길이 없었다.
‘저 아이템은 이 대마경의 히든 아이템인가? 그게 아니라면…….’
여러 추측이 머리에 쌓여갔지만,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급한 일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카가강!
고속으로 회전하는 차륜이 서강림의 얼굴에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빠르게 검으로 튕겨냈으나 충격은 얼얼하게 전해져왔다.
이 차륜, 익숙한 무기였다.
“서강림까지 오다니. 귀찮게 됐어.”
허공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차륜을 타고 위에서 서강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십이지 레이스 때 마주쳤던 광대패, 버나였다.
“그때는 물러섰지만 오늘은 이대로 집에 못 보내준다고, 서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