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수없이 나열된 분기점 사이에, 유일하게 생(生)의 기운이 희미하게 보이는 운명이 있었다.
매일 보던 것과 다른 미래.
환영처럼 일렁거리고 있어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 했지만, 미래는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 * *
[현재 만신들에게 네 번째 대마경에 대한 계시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 번째 대마경은 약 2주 후 활성화가 될 것으로 보이며…….]
서강림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잘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말끔한 얼굴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으나, 서강림은 남과는 조금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 ■■■■.】
【■■■, ■■■. ■■■ ■!】
【■, ■■■.】
그 어떤 나라의 언어도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뉴스의 음성과 함께 섞여서 들려왔다.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세상의 색채가 바뀌는 것 같았다.
세상은 피와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빨강이었다가, 재와 뼈무덤의 흰색으로, 어둠과 늪의 검정으로 바뀌어갔다.
아나우서의 얼굴 역시 진흙처럼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귀문을 열었더니 확실히 상태가 더 안 좋아졌네.’
평소에도 환각과 환청은 겪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상태가 조금 더 심했다.
자신이 현세가 아닌 마경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귀문이 열리며 신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능력치도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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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77
[체력] 78
[민첩] 78
[감각] 79
[마력]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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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가 모두 70대 후반으로 올라갔으니, 이런 풍경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 와중,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대마경 공략자로 유명한 서강림 헌터가 준 문파인 비호문을 창설하였습니다. 정식 문파로는 등록이 되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멤버들이 모두 잔류하기로 결정한 뒤, 서강림은 비호문을 다시 창설했다.
정식 문파로 등록할 경우 보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식으로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내 인지도가 오르면서 비호문도 유명해졌으니, 다른 멤버들에게도 영향이 가겠군.’
현재도 여러모로 변화가 생기고 있는 상태였다.
다들 인지도가 오르는지 인터뷰 요청이나, 다른 문파에서 영입을 제안해오기도 했다.
어지럽던 시야가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 나야. 들어가도 돼?”
“들어와.”
곧 윤겨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치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쭈뼛거리는 기색.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응시하고 있자 윤겨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부. 내일 특수 마경에 갈 예정이었잖아. 같이 가기 어려울 것 같아. 누나도.”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윤겨울은 상당히 껄끄러운 얼굴이었다.
말하기 힘든 주제인 듯, 망설임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가 인지도가 조금씩 오르면서 인터뷰나 모델 제의가 들어와서, 내일 그쪽에 가야 할 것 같아.”
“또? 너의 성장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선택일 텐데.”
연예인처럼 활동하여 인지도를 올리는 헌터들은 흔히 찾아볼 수 있었고, 그 방법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수호신이 강해지면 그로부터 받는 힘도 늘어나니까.
다만 만신 자체의 능력이 낮으면 수호신이 강해지더라도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최필영이 인지도의 힘으로 강화되었으나 처참하게 패한 것처럼.
인지도를 올리는 것만큼이나 전투 센스를 기르는 것도 중요했다.
수호신의 인지도가 높아져서 강력한 무기를 선물한다 한들, 활 쏘는 법을 잊어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윤겨울 역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라니……. 그런데 계시가 내려와서 거부할 수가 없어.”
“계시가?”
“응. 아무래도 수호신은 내가 강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인지도를 올리는 걸 원하는 것 같아. 상황을 몰라서 이러는 것 같은데. 설득은 해보고 있는데 잘 안 먹히네.”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보호국이 광대패라서 그놈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면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아니. 그 부분은 말하지 마.”
현재 수호신들에게는 서강림이 회귀자라는 사실, 보호국이 테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숨겨두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보호국의 신과 연이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러 위험성이 있었다.
수호신들의 목표는 정의 구현이 아닌 인지도를 올리고,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만신을 보호하는 것.
만약 보호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만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보호국에 붙는 대가로 만신을 살리려고 하는 수호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서강림을 배신하는 편이 인지도 상승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희대의 악당인 서강림을 쓰러트린다면, 이제까지 서강림이 쌓아온 명성을 모두 가져갈 수도 있을 테니까.
‘만신이 거부를 하려 해도, 계시에는 강제성이 있으니 결국 수호신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어.’
만약 수호신이 서강림을 배신하라고 계시를 내리면, 만신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다.
수호신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상 중요한 정보는 숨겨놔야 했다.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자 윤겨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알겠어. 인터뷰랑 모델 활동은 결국 해야 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무력으로는 사부 이상으로 유명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수호신이 만신을 강하게 키우는 것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서강림이 독보적으로 강해진 이상, 마경 공략이나 무력으로는 유명해질 수 없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서강림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흐름은 아니었다.
“네 번째 대마경을 가라는 계시는 왔어?”
“응. 그런데 조금 달라. 예전에는 그냥 대마경을 가라는 계시였는데, 이번에는 서강림과 동행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어.”
그 이야기를 듣자 서강림은 수호신의 속내를 대강 알 것 같았다.
윤겨울을 비롯해 다른 일행들은 비호문에 가입하며, 서강림의 명성에 힘입어 인지도가 올라갔다.
신들도 쏠쏠하게 인지도를 벌어들였을 것이다.
어차피 대마경은 서강림이 깨줄 테니, 적당히 이름만 올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포교 활동에 전념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무임승차를 하게 둘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당사자랑 직접 이야기해야겠네. 네 수호신한테 메시지 좀 전달해줘.”
“뭐라고 전해?”
“윤겨울은 오늘부로 비호문에서 제명이라고.”
그 말에 윤겨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날 제명한다고? 진짜로?”
“일단 네 수호신한테 메시지 넣어줘.”
윤겨울은 불안해하면서도 무불 통신을 열어, 수호신에게 연락을 취했다.
뭔가 요란하게 이야기가 오고가는 듯 했다.
잠시 후, 윤겨울이 쭈뼛대며 말했다.
“내 수호신이 사부랑 직접 이야기하고 싶대.”
서강림이 무불 통신을 열자, 곧바로 연달아 메시지가 날아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상당히 다급한 티가 났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당신의 결정을 당혹스러워합니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어째서 윤겨울을 제명하려하는지 궁금해합니다.]
윤겨울은 개인의 강함보다도 비호문의 일원이라는 사실 덕분에 인지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명을 당한다면, 수호신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수호신을 향해 서강림은 냉랭하게 말했다.
“윤겨울이 제 예상보다 약해서, 이대로 두면 비호문의 명성에 해가 됩니다.”
“사부……?”
윤겨울이 충격을 받은 듯 눈동자가 떨려왔다.
물론 그를 내보낼 생각은 없다.
현재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비호문 멤버들의 실력은 상당히 우수하니까.
하지만 백영과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윤겨울을 내쫓으려 하다니, 매정하다고 비난합니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교육 시설 때부터 쌓아온 인연을 끊으려는 거냐고 질타합니다.]
“저도 인연을 딱히 끊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말했듯, 너무 약한 문파원을 데리고 있어봐야 손해일 뿐입니다.”
이렇게 냉정하게 말할 정도로 윤겨울이 약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서강림이 윤겨울을 제명하겠다고 협박하는 건, 수호신의 태도 때문이었다.
‘비호문 명성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꼴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리고 수호신 같은 강력한 배경이 있는데, 그냥 놀리는 것도 아깝고.’
수호신을 이용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이야 아이템을 보내주거나, 종종 자신의 신력을 보태주는 정도가 전부.
하지만 수호신이 작정한다면 만신을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었다.
‘신역에 방문하면, 단기간 내에 성장이 가능하다고 했었지.’
신역을 가는 것은 어렵지만 만신이 수호신의 신역에 방문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간혹 수호신의 총애를 받는 만신이 신역에 들른 경우를 종종 봤으니까.
수호신이 갖고 있는 지식, 아이템, 능력을 모두 사용해서 만신을 키운다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신역이라면 보호국이 그들을 방해할 수도 없을 테고.’
특수 마경을 돌면서도 불안감은 있었다.
언제 보호국이 나타나 습격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하지만 신역에서 신의 보호를 받는다면 안전하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윤겨울이 제 기준만 넘긴다면, 저로서는 윤겨울을 내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즉, 비호문에서 내쫓기고 싶지 않으면 네 만신을 키워내란 소리였다.
현재 윤겨울이 강하긴 하더라도 백영과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서강림의 말에 수호신이 답을 보내왔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윤겨울의 모든 능력치를 최소 65 이상으로 만들어주세요. 그 전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현재 윤겨울의 평균 능력치는 50 정도.
유명하던 최필영의 능력치가 40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 높은 수치였다.
65이라는 수치에 수호신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단기간에 능력치를 15씩 올리는 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명할 수밖에요.”
수호신이 직접 나서면 못할 수치도 아닐 것이다.
다만 신역으로 만신을 불러들이면, 그만큼 자신의 힘을 나눠줘야 하기에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수호신은 계산을 끝냈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서강림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태양을 머금은 활시위’가 윤겨울을 신역으로 불러들여, 성장시킬 것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