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죄송해요. 건물 근처까지 왔는데 정문에 사람이 많아서 못 들어가겠습니다.]
하긴, 나 같아도 저 인파를 뚫고 들어오긴 망설여질 것 같았다.
뒷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알려주고 마중을 나가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로야 씨,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잔뜩 상기된 채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대장장이 장인, 한철의 손녀딸인 한로야였다.
지난번 한철의 무덤을 파헤치던 날 만난 뒤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그녀와 연을 맺게 된 것은 한철 때문이었다.
한철은 내게 한로야의 사주창을 각성시켜달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철의 부탁이라는 것은 숨긴 채, 나는 한로야를 각성시키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제가 지금은 아무 대가 없이 사주창을 각성시켜드리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면……?]
[차후 저를 위해 일을 해주세요. 그 대신 그때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고, 사례도 톡톡히 하겠습니다.]
그런 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나는 한로야에게 금전과 영옥, 아이템을 꾸준히 보내주고 있었다.
그 사이 한로야는 뛰어난 장인으로 성장했고, 이 정도라면 일을 맡겨도 될 듯싶었다.
한로야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와, 진짜 놀랐어요. 그때 찾아왔던 손님이 서강림 씨라니……. 서강림 씨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예인을 본 것과 비슷한 반응.
나로서야 반가운 반응이었다.
“여기서 머무르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나중에 소개해 드리죠. 일단 지내실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한로야가 올 것을 대비하여 공방 역시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녀가 사용할 개인실과 공방의 위치를 안내하는 동안 한로야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늦어서 죄송해요. 올라오는 길에 천해산 쪽에서 마수가 출몰하는 바람에, 그 인근 도로가 다 막혀버렸거든요.”
“천해산이요?”
“네, 이번에 꽤 큰 마수가 출몰했어요. 요즘 들어 마수가 자주 나타나는 것 같네요.”
전생에서도 천해산 쪽에 귀급 마수가 출몰했던 것이 생각났다.
천해산이라…….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공방에 도착했다.
한로야는 시설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와, 이렇게 좋은 설비라니……! 준비된 게 전부 최상급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보수는 이렇게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고용 계약서를 건넸다.
그곳을 본 한로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이 액수를 다요……?!”
“네.”
어차피 돈은 넉넉하게 있고, 박봉 따위로 한로야를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아깝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돈으로 묶어두는 것이 낫지.
당장 부탁할 것도 있고.
“그리고 오신 첫날부터 죄송하지만, 급해서 바로 착수를 해주셨으면 하는 건이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 물론이죠!”
계약금을 본 한로야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곧바로 아이템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난번 대마경, 가장 깊은 무덤에서 챙겨온 방울이었다.
상당히 녹이 슬어 있고 파손되어 있어, 금속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손을 봐줘야 했다.
무기나 장비 쪽은 아니지만 한로야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방울……? 으음. 일단 해볼게요.”
“수리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래도 이런 아이는 처음이라…….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지만, 못해도 며칠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나저나 이건 무슨 용도인가요?”
그 아이템은 광대패와 나를 연결해줄 열쇠였다.
광대패에 백영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추적하는 것도 있지만,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고, 나를 영입하려 했으며, 내 피를 노렸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
어렴풋하게 짐작은 가지만 당사자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확실할 터였다.
“개인적으로 쓸 곳이 있어서요.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네, 맡겨만 주세요!”
믿음직한 눈빛의 한로야를 뒤로한 채, 나는 개인실로 돌아왔다.
우선 아이템 쪽은 한로야가 맡아줄 테고, 나는 다른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곧바로 사주창을 띄워보았다.
[당신에게 우호적인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명이 변화할 가능성이 보입니다.]
지금도 인지도는 차근차근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우호적인 방향으로.
방향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인지도의 총량이 부족한 듯싶었다.
[충분한 인지도가 부족하여, 무불 통신 시스템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충분한 인지도가 부족하여, 신역 시스템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이용 불가라는 메시지만 떴다.
무불 통신과 신역이라.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백영이 그 신의 만신이라면 백영을 죽여봐야 끝나는 것이 없다.
결국 그 신의 진명을 알아내고, 신역에 잠입하든 해서 끝장을 봐야 했다.
문제는 그 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다행히 유하랑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 수호신인 ‘모든 기록의 서기’가 기록보관소에 접속을 허가해주었다. 그쪽을 확인해보면, 첫 번째의 주인에 대해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유하랑은 전생의 수호신이었던 ‘모든 기록의 서기’를 다시 신내림 받았다.
‘모든 기록의 서기’는 기록과 역사, 지식의 여신인 세스헤트(Seshat).
현재 나는 내게 신내림하려는 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모든 신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유하랑이 백영에게 살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세스헤트가 그 신일 확률은 낮으니 믿을만했다.
지식이나 기록 쪽에서는 세스헤트를 따라잡을 신이 없으니, 시간은 걸리더라도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다만 유하랑이 ‘첫 번째의 주인’의 정체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내가 약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단은 내 인지도를 빠르게 올려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신수아의 인지도 역시 올리고 싶었다.
신수아 역시 현재 신내림을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으니 인지도가 쌓여가고 있는 상태.
신격화를 할 경우 여러 가지 단점이 있지만, 그보다는 장점이 더 크다.
어떤 미래에서든 그녀는 나와 관련되어 죽는 것 같으니, 신수아 역시 성장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문제는 어떻게 단기간에 인지도를 올리느냐인데…….
아까 천해산에 마수가 출몰했다고 했었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신수아에게 연락을 했다.
[신수아 씨, 어디 계시죠?]
[저 지금 훈련실에 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곧 가겠습니다.]
훈련실로 향하니 신수아 말고 윤봄도 있었다.
한로야 이야기도 해야 하는 참이니 잘된 일이었다.
신수아가 땀에 젖은 목덜미를 수건으로 닦아내던 중, 나를 돌아보았다.
“아, 강림 씨. 무슨 일이에요?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번에 대장장이인 한로야 씨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나는 짧게 한로야에 대해 설명했다.
두 사람은 대장장이라는 말에 꽤 반가운 기색이었다.
신수아가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이따가 가서 인사해야겠네요.”
“네. 그리고 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이틀 뒤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이틀 뒤요? 시간은 괜찮은데 무슨 일인가요?”
“놀이 공원에 같이 가주세요.”
“……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느낌.
그때, 옆에 있던 윤봄이 놀란 얼굴이 되어 말했다.
“사부님, 설마…….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데이트?
데이트라는 말을 듣자, 신수아가 당황하는 이유를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윤봄이 좋아라하며 말했다.
“와아, 진짜인가보다!”
“그런 거 아니야.”
데이트라기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웠다.
어차피 신수아랑 단둘이 갈 것도 아니고.
나는 빠르게 오해를 수습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너도 이틀 뒤 따라와, 윤봄.”
“네? 저는 왜요? 설마 사부님…….”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갈 거야.”
그 말에 윤봄은 더욱 어리둥절한 기색이 되었다.
놀이 공원에 가는 건 휴식이나 유흥 때문이 아니라,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나나 신수아나, 우리는 강제로라도 유명인이 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녀와 꼭 놀이 공원에 가야 했다.
* * *
[행복의 나라, 아이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개장 1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
유쾌한 멜로디와 함께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10주년 이벤트 중이라 그런지 유독 사람이 많았다.
놀이 공원 외부 구역에는 놀이 기구가 없는 대신 수많은 꽃나무와 꽃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번 시즌의 꽃은 동백꽃으로, 붉은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상당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과일처럼 커다란 꽃송이, 그리고 떨어진 꽃잎이 붉은 비단처럼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그 사이로 수많은 친구, 연인, 가족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다들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강림은 인파를 피해 길가에 서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이 가려진 상태.
서강림은 이어 커프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다들 별일 없지?”
“[응. 아직까지는 이상 없어, 사부!]”
윤겨울의 대답을 이어, 다른 멤버들도 대답을 이어나갔다.
현재 이 놀이 공원에는 비호문 일행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놀러 온 것은 아니었다.
서강림은 회귀 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기억하지는 못했다.
다만 특별한 케이스는 몇 가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천해산에 마수가 출몰하고 이틀이 지난 뒤, 놀이 공원에 마수가 나타났던 사건.
사상자가 역대 최대치였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었다.
멤버들에게는 예언 아이템이 마수의 등장을 알려줬다고 설명한 뒤, 이곳으로 왔다.
강력한 한 마리면 모를까, 놀이 공원 전역에 걸쳐 마수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기에 혼자서는 커버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비호문 일행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배치된 상태였다.
그리고 서강림의 파트너는 신수아였다.
‘원래 단둘이 행동할 계획은 없었는데.’
서강림은 옆에 서 있는 신수아를 힐끗 보았다.
다른 멤버도 동행할 계획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윤겨울의 반대가 거셌다.
[사부, 우리도 눈치 있어. 둘 사이에 끼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