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신수아는 쓰고 있던 광대패의 가면을 벗었다.
망토를 두르고 있던 터라 잘려 나간 왼쪽 팔은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는 광대패일 것이었다.
“들키진 않았죠?”
“네. 절 몰라보더군요.”
“미안합니다. 위험한 일을 맡겨서.”
“뭐가 미안해요? 내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일인데.”
멸망꽃의 존재, 그리고 광대패의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서천 꽃밭을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말대로 그 힘은 너무도 위험했으니까.
신수아 역시 내 이야기에 동의하고, 서천 꽃밭을 궤멸시키는 데에 일조하였다.
자진해서 광대패 역할을 맡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광대가 남긴 지도가 확실해서 다행이었어요. 정확한 위치에 씨드 뱅크가 있더군요.”
죽은 광대패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던 소지품 중에는 멸망꽃 뿐만 아니라 연구소의 지도도 있었다.
“연구소에 있던 씨앗은 보이는 대로 가져왔어요. 이게 정말…….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거죠?”
신수아는 각종 씨앗이 담겨 있는 유리병을 내게 건네주었다.
누구라도 탐낼 법한 아이템들.
하지만 지금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네. 하지만 광천못이 말라버려서 당장 쓸 수는 없겠지만요.”
혈악귀를 부화시키고, 멸망꽃을 피워내느라 광천못은 전부 말라버리고 말았다.
광천수가 있어야지만 키울 수 있는 꽃들이라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광천수, 혹은 그를 대체할만한 물을 찾는다면 충분히 활용이 가능했다.
“씨드 뱅크도 파괴됐고, 광천못도 모두 말라버렸을 테니 사라 도령도 재건은 힘들겠죠.”
신수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불타오르는 연구소를 응시하였다.
“강림 씨는 평소에도 이런 일을 하고 다니나요?”
“아뇨.”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꽃만 얻고 귀환할 계획이었다.
그저 신수아의 팔을 재생할 생각이기만 했는데.
나는 그녀의 빈 팔을 잠시 바라보다, 저물대에서 꽃을 꺼냈다.
분홍, 빨간색, 흰색의 꽃들.
잘린 그녀의 팔에 세 송이의 꽃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흰빛이 피어나더니, 그녀의 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강림 씨, 이건 대체……?”
신수아는 놀라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만져보면서도 믿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녀는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구하려고 이 위험한 곳에 온 건가요?”
“아뇨. 본 목적은 다른 것이었고, 겸사겸사.”
“……진짜 매번 거짓말만 하네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수아가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고마워요, 강림 씨.”
내 손을 감싼 양손의 감각이 생경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한 번 토닥여주기만 했다.
그녀가 한참이나 내 손을 잡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팔이 생기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한 손으로 싸우는 게 익숙했는데.”
신수아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그렇게 운을 띄우고 잠시 웃었다.
“이제 돌아가요. 여기서 너무 오래 있어도 좋지는 않을 것 같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패왕의 신하로부터 받은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깨자 곧 문 하나가 생성되었다.
우리는 불타는 서천 꽃밭을 뒤로한 채, 문으로 들어섰다.
반대편으로 나오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사부님! 수아 언니! 드디어 오셨네요!”
“으악, 둘 다 꼴이 이게 뭐야?”
현세의 문은 비호문의 건물 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진작 볼일을 끝내고 온 것인지, 모두가 모여 있었다.
요한 신부가 허둥대며 우리를 치료했다.
“괜찮으십니까? 두 분 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치셨어요? 하루 내내 소식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조금 일이 있었습니다. 별거 아니었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격한 전투를 치르느라 나도 신수아도 엉망진창이었다.
장태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 했길래 그래? 십이지신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고. 뭘 좀 찾으러 갔다가 오느라 오래 걸렸어.”
나는 신수아의 팔을 재생시킬 아이템을 찾으러 갔었다고 가볍게 설명했다.
신수아와는 우연히 마주쳤고.
다른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납득하는 표정이 되었다.
윤봄이 살짝 감탄하듯이 말했다.
“그러셨구나. 그러면 사부님은 질문권을 그걸로 쓰신 거네요?”
“그래. 넌?”
“저는 강해지는 방법을 물어봤어요! 자세한 건 말하지 못하도록 서약을 해서…….”
윤봄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장태헌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비슷해. 자세한 건 말 못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생에도 질문권을 얻은 사람들은 특수 아이템, 특수 마경 등의 위치를 물어봤었다.
정보가 새는 걸 막기 위해 질문의 답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 없고.
그러다 문득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고준은?”
독고준도 우리와 함께 이동을 했으니, 이쪽으로 송환했을 텐데 보이지 않았다.
윤겨울이 대수롭지 않게 답해주었다.
“소설 마감한다고 돌아갔어. 의외로 성실하다니까? 대체 뭘 쓰고 있는 건지 궁금하네.”
또다시 소설 마감인가.
지난번에도 소설을 쓴대 놓고 다른 짓을 했던 터라 약간 마음에 걸렸다.
독고준이 질문권으로 뭘 물어봤을지 궁금했다.
보통은 무기나 아이템의 위치 같은 걸 물어볼 테지만, 그 인간이라면 분명 괴상한 것을 물어봤을 터였다.
그때 신수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강림 씨,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신수아가 지내는 집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상황이 급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했네요. 제가 호제왕에게서 점괘를 들었다고 했죠?”
“네. 저를 노리는 적에 대해 물어봤다고.”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신수아는 자신의 왼팔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호제왕이 줬던 정확한 점괘는 서강림의 앞에 두 개의 이름이 어른거리고, 그 중 한 가지는 ‘첫 번째의 주인’이라는 이름이라고 했어요. 나머지 하나는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이름이라고?
‘첫 번째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신명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니.
서패왕이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두 개의 이름 중 하나는 그 신인 걸까?
그 신과 백영이 무관하다고 나왔으니, 백영은 ‘첫 번째의 주인’과 연관 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신수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교육 시설에 있을 때, 계속 신내림을 권유하던 신이 있는데…… 그 신의 신명이 첫 번째의 주인이었어요.”
“신수아 씨에게 신내림을 하려 했다고요?”
“네. 다른 신들도 저에게 신내림을 제안했어서, 그 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첫 번째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명백히 위험한 것은 알 수 있었다.
신수아에게 접근해 무엇을 할 생각이었을까?
그런 신이 신수아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신명만 봐서는 어떤 신인지 알 수 없어서 신내림을 안 받았는데……. 다행인 것 같아요.”
신수아가 만약 ‘첫 번째의 주인’을 받아 들였다면, 일이 어떻게 됐을까.
‘첫 번째의 주인’이 왜 나를 노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존재인 건 확실했다.
“고맙습니다. 신수아 씨 덕분에 중요한 이름을 알게 되었네요.”
적이 두 명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첫 번째의 주인’이라는 신명.
내게는 중요하고, 또 큰 정보였다.
신수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면 저는 좀 쉴게요. 내일부터 호제왕이 준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해서.”
“네. 푹 쉬세요.”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여러 정보가 머리에 쌓여있는 상태였다.
‘첫 번째의 주인’도 신경이 쓰이지만, 현재로서는 단서가 없다.
우선 비교적 명확한 것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방금 전 마주쳤던 광대패.
이제 시체가 된 그녀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우리는 인간을 위해서 신의 힘을 꺾으려 하고 있어요.]
[신이 강력해지면 인간도 좋을 거라 생각하죠. 그렇지만 아니에요. 신들이 그렇게 자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나요?]
[서천 꽃밭은 신이 쥔 무기 중 하나고, 우린 그걸 파괴하려고 해요.]
그들은 ‘인간’을 위해 서천 꽃밭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아이템을 독점하려는 속내를 감추고자 했던 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대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혈악귀를 부화시켜 서천 꽃밭을 파괴하려 했다.
그런 점을 봤을 때, 그들이 신의 독점을 막으려한다는 것은 사실 같았다.
광대패의 정체는 대체 뭘까?
전생에서는 극악무도한 악당,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더, 더 강해져야 해 서강림. 지금보다도 훨씬 더. 그래야 그 분께서 기뻐하실 거야.]
또한 버나가 말한 그 분이라는 사람 역시 신경 쓰였다.
왜 광대패의 수장이 날 살려두려는 걸까?
전생에는 나와 전혀 인연이 없던 집단이었는데.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광대의 시신을 확보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가면을 벗겨낸 뒤 얼굴도 확인했고, 사주창도 볼 수 있었다.
이름은 천여울,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도 운명 보호국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우선 강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했다.
* * *
서패왕은 보료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무불통신을 이용하여, 현세의 커뮤니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서패왕이 주로 찾아보는 것은 서강림의 이야기들.
그가 십이지 레이스에 우승했을 때부터, 아니 사실은 꽤 오래 전부터 서패왕은 서강림을 신경 쓰고 있었다.
‘서강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인간이었지.’
현세에서도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눈여겨본 인간이긴 했다.
쥐의 해에 태어난 인간이라 더욱 마음에 들기도 했었고.
그리고 또한, 같은 해에 태어난 또 다른 인간도 신경이 쓰였었다.
‘그 인간, 독고준이라고 했던가.’
쥐의 해에 태어난 또 다른 인간, 독고준.
서강림이 모든 질문을 끝내고 떠난 뒤, 서패왕은 독고준을 불러와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무엇이든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겠다고.
독고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흥미로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한 가지 질문이라……. 앞에 있던 서강림도 똑같은 보상을 받은 건가?]
[그래. 그렇다.]
그때, 독고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질문을 던졌다.
서패왕은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서강림이 했던 세 가지 질문만큼이나 독고준의 질문도 흥미로웠다.
그때, 눈을 빛내던 독고준의 얼굴.
그가 서패왕에게 던졌던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다.
[난 서강림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 알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