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 자식,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우리를 이용했어……!”
방금 전까지는 열심히 내숭을 떨던 인간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찬찬히 그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무기는 사용금지 아니던가?”
“상관없어. 널 탈락시킬 수만 있다면.”
전원이 다른 띠인데도 함께 활동하는 것을 보면 원래 알던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나를 노린 것처럼 보였다.
성의결 때처럼 누군가의 사주라도 받은 건가?
“네가 아무리 강해도 2대 1은……!”
-빠각!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 곧바로 달려들어 얼굴을 무릎으로 가격했다.
그가 컥 소리를 내며 쓰러지려는 것을 붙잡아 다시 한번 추가타를 먹였다.
상대가 이능을 사용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멱살을 잡았다.
“마력 없지?”
그들이 나에게 승선을 제안했을 때.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다들 상당한 능력자였다.
내가 그들보다 강하긴 하지만 4명을 상대하면 체력이나 마력을 소모할 것이 뻔했다.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마력을 전부 소진하게 했다.
이 정도라면 이제 쉽지.
반쯤 기절한 한 명을 다시 물에 빠트리고, 나는 남은 한 명을 돌아보았다.
“이젠 혼자네.”
“과연 그럴까?”
그는 혼자 남았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자신만만해 보였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그가 씩 웃더니 조명탄을 하늘 높이 쏴 올렸다.
-퍼엉……!
한낮임에도 조명탄의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 있던 배 몇 대가 우리 주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모두 한 패인 것 같았다.
수적으로 우위인데다가 능력도 탁월, 외모까지 상당히 수려했다.
“당신들 ES 엔터테인먼트 소속인가?”
“……!”
정곡을 찔렸는지 모두의 얼굴에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다들 곱상하게 생겨 찍어봤는데, 정답인 모양이었다.
나는 카메라 드론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방송이 송출되는 중인데도 이러는 걸 보면, 그다지 유명인들은 아닌 것 같고.”
기껏해야 연습생이나 신인들이겠지.
나를 잡기 위해 양의성이 뿌린 총알받이들.
수는 대략 20명, 꽤 강한 만신이 절반 정도인가.
나는 빠르게 영수를 소환했다.
[영수를 영계에서 소환하고 있습니다!]
소환 메시지와 함께 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롱이까지는 불러낼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나중에 요롱이가 나서야 할 때를 대비해 힘을 아껴둘 필요도 있고.
“뭐야 저건? 저게 영수?”
“그냥 작은 사슴같이 생겼는데.”
그들은 이미 영수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사실 이들을 이기는 것은 쉽다.
다만 시간을 많이 낭비할 뿐이지.
최대한 빨리 놈들을 제압하고 전진하려던 그때.
-콰과광!
맨 끝에 있던 배에서 비명과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느새 배가 반파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비명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계속 지켜보려 했는데, 슬슬 나설 타이밍 같아서.”
누군가가 돛대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갑다는 듯이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독고준.
그가 매고 있는 명패에는 나와 같은 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야, 같은 띠라니. 따로 싸워도 재밌었겠지만, 역시 같은 편이 좋다니까.”
동갑내기인 건 진작 알고 있어서 이번에도 얽힐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날 따라왔겠지만.
독고준이 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 동료를 공격했으니, 나도 나서야겠지?”
그의 그림자가 간판 위로 드리워지고, 그림자 속에서 독고준이 미소 지었다.
[이능 ‘부식’이 발동됩니다!]
[이능 ‘그림자의 쥐’가 발동됩니다!]
[마경의 효과로 인해 십이지와 관련한 이능이 강화됩니다!]
그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그 속에서 검은 쥐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쥐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색채는 빛을 잃었다.
배 곳곳이 검게 변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배, 배가 침몰한다!”
“다들 도망쳐!”
쥐들은 역병처럼 배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에서 독고준은 웃고 있었다.
여유롭게 관람을 하는 사람 마냥.
“와, 이번 마경에서는 십이지 관련한 이능이나 아이템이 강화된다더니. 효과 좋네!”
독고준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역시 쓸만한 놈이라니까.
나는 그 틈을 노려 나머지 인원들을 제압하러 나섰다.
“리니, 물잡이! 배를 가속해!”
“웅!”
‘물잡이’로 인해 물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거의 해일과도 같은 거친 물결.
배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질주하는 와중, 사람들의 비명과 타격음이 물결쳤다.
어느새 카메라 드론 여러 대가 이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중위권에서도 대전투가 발발!]
[쥐띠인 서강림 선수와 독고준 선수가 연합을 맺은 모양입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적을 제압하고 있는 쥐띠 동맹!]
어느새 대부분의 배가 침몰하고, 멀쩡한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독고준이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휴, 정리 끝! 귀찮은 놈들 같으니……. 그나저나 서강림, 인기 많다니까. 어딜 가나 사람들이 몰려드네.”
“귀찮으면 먼저 가도 되는데.”
“널 두고 내가 어떻게 먼저 가겠어? 계속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정말 지극정성이다.
날 위해 헌신하겠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나는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조연 역할을 다 하겠다고 그랬지?”
“응, 그랬지.”
“그러면 마력 충전이나 좀 해.”
지금도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더 높이는 것도 가능했다.
독고준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서강림. 동료를 소중히 하지 않는 주인공은 비호감이 되기 쉬워.”
“가서 충전이나 해.”
“알았어, 까칠하기는. 뭐, 그런 점도 나쁘지 않지만.”
독고준은 싱긋 웃더니 배에 다가가 마력을 주입했다.
[마력 충전이 시작됩니다!]
[속도가 증가합니다!]
독고준의 마력량이 상당하다보니,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잠깐은 숨을 돌릴 수 있을 듯 했다.
내가 배 한 쪽에 걸터앉자,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붙여왔다.
“아, 서강림. 지금 입고 있는 옷 대마경 보상이지?”
그는 친구에게 말을 걸듯,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독고준이 내 옷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판타지 소설 주인공들은 옷 스타일이 다 비슷할까? 다들 같은 옷가게에 다니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혼자 떠들고 있는 독고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못 보던 이능이 생겨나 있었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보려고 사주창을 연 순간, 나는 잠시 멈칫했다.
“너, 아까 못 보던 이능이 있던데. 신내림이라도 받았어?”
“맞아! 눈치가 빠르네.”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신명 항목이 생겨나 있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괴랄한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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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 묘사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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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공포 소설에 나오는 신, 니알라토텝.
이쪽 계열의 신들은 혼돈과 악이 주 속성이라, 제정신인 사람이면 신내림을 받지 않는다.
받아도 미쳐버리는 경우가 다수였지만, 독고준은 아직 제정신인 것 같았다.
“누굴 신내림 받았는데?”
“묘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신이야. 신내림 받을 생각은 딱히 없었는데 재미있어서 받았어.”
“재미?”
대체 저런 신의 어디가 재미있는 거지.
독고준은 조금 들뜬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이 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신이거든.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라는 게 재미있었어.”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라.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하랑과 유선민을 떠올렸다.
왠지 유선민이 여기에 있다면 독고준과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역사가 1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신인데 영향력이…….”
독고준은 그렇게 떠들던 중,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정면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2라운드네.”
우리를 추격하던 배들은 이제 없었지만, 대신 새로운 것들이 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에서 사는 거대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르르륵……!
쉽게 여길 통과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무기를 들고 뱃머리에 서자, 독고준도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강바람이 나와 독고준의 머리카락을 쓸며 지나갔다.
독고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또 놀아볼까?”
* * *
[쥐띠 동맹, 강합니다! 단숨에 중위권을 돌파하여 상위 그룹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화면을 통해 대마경의 모습이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선두를 비추고 있던 화면은 이제 중위권들의 전투를 보여주고 있었다.
카메라는 서강림을 중심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방금 전, 다른 경쟁자들과 수상전을 펼치고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물살이 마수들이 나타나 이제는 마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전투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거의 일방적인 유린, 학살에 가까운 현장.
독고준의 ‘부식’이 마수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살덩이는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쩌저적!
그리고 그 뒤편으로 서강림의 모습이 비쳤다.
양손에 푸른 불꽃을 두른 채 서 있는 서강림.
그가 ‘서리 불꽃’을 발동하자 마수들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강 위에 수많은 얼음 조각과 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마수가 5분도 채 되지 않아 절멸한 상황.
사회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마의 구간인 마수의 수역을 가뿐하게 통과해냅니다! 쥐띠 동맹 쾌속 전진!]
서강림과 독고준이 탄 배는 뻥 뚫린 수로를 홀로 주파해나갔다.
소파에 앉아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양의성이 말했다.
“방금 전, 서강림한테 진 놈들. 전부 퇴출하도록 해.”
“네, 대표님.”
서강림의 예측대로 그들은 양의성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양의성이 만든 기획사에서 성장 중이던 만신들.
그러나 더 이상은 양의성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본 건가.”
양의성이 소파에 깊이 몸을 뉘었다.
서강림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모로 손을 썼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의도적인 음해 기사에도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헌터와 만신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양의성은 속에서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역시 아깝긴 해. 모델로 데뷔를 한다면…….”
확실히 여러모로 이목을 끌법한 인재였다.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망가트려야 하는데 그것이 참 안타까웠다.
양의성이 침묵하고 있자 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대표님. 아직 고용한 만신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애초에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어.”
현재 서강림을 공격한 무리는 일종의 애피타이저였다.
진짜 무기는 따로 숨겨 놓아야 하는 법.
양의성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웃었다.
“결국 그도 내게 무릎 꿇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