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그가 건넨 명함을 받지 않았다.
모델이라.
전생에서도 연예인이나 모델로 데뷔한 헌터, 만신이 많이 있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저는 모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양의성은 내 반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소 지은 채 말을 받아쳤다.
“내 생각엔 좀 다른데요. 키도 180cm는 넘어 보이고, 얼굴도 준수하고. 아니, 준수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양의성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감흥은 없었다.
그의 칭찬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양의성은 여전히 여유 있는 태도로 말했다.
“이거 강림 씨한테도 좋은 일이라고요? 여기저기 강림 씨 얼굴이 나오면 인지도도 올라갈 테고. 몸매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재킷 한번 벗어봐요.”
“거절합니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차라리 모델이 아니라 아이템을 구해오라는 의뢰였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양의성과 인연이 닿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다만 모델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노예가 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양의성이 다가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요? 계약금이 부족한가?”
“애초에 저는 모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계약금이 얼마든 간에.”
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양의성이 나를 주시, 아니 노려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걸어가는 내 뒤로 비서가 조용히 따라왔다.
“나가시는 길,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걸었다.
복도가 쓸데없이 길게 느껴졌다.
옆에서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얌전히 걷던 비서가 말했다.
“대표님의 제안은 서강림 씨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겁니다.”
끝까지 나를 회유하려는 모양인가.
나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관심 없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의성 그룹입니다. 이곳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텐데, 아쉽지 않으십니까?”
ES 엔터테인먼트는 5대 문파 중 하나에 속하는 거대한 집단이지만, 아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양의성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전생에서 양의성은 ES 엔터테인먼트를 세워, 여러 만신을 연예인으로 만들었다.
그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만신 출신 연예인들은 빠르게 인지도를 쌓고, 수호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까.
하지만 계약에는 나쁜 점이 존재했고, 그 어떤 장점조차 빛이 바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헌터 활동 제한’ 항목.
마경에 가서 사고를 치거나 다쳐서 오면 안 되니 회사에서 허가하는 경우에만 마경을 돌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언뜻 보면 헌터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목줄을 채우는 조항이었다.
만약 양의성의 눈 밖에 날 경우.
그는 그 조항을 이용해 헌터들이 마경에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송 출연도 하지 못하고, 마경에도 가지 못하는 헌터.
그렇게 손발이 묶인 헌터의 결말은 참담했다.
비호문에 있다가 ES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갔던 한 만신도 결국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나 역시 ES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간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30억이라는 액수는 크지만, 그 돈을 받고 발목이 잡힐 수는 없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비서에게 말했다.
“몇 번을 물어도 똑같습니다. 의성 그룹의 모델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비서를 뒤로한 채 의성 그룹 빌딩을 빠져나왔다.
양의성의 제안을 거절한 것 자체는 후회가 없었지만, 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될 테니, 준비를 해야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더니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도현이 형, 통화 가능해?”
“[바빠. 용건만 말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강도현의 목소리는 그저 퉁명스러웠다.
나는 군말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형한테 선산이랑 집문서 있지? 나한테 좀 빌려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몇 초의 사이를 둔 뒤, 강도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동생이 없습니다.]”
“보이스 피싱 아니야. 진짜 서강림이라고.”
“[제 동생은 집안을 거덜 낼 만한 놈이 아닙니다만.]”
나는 한참이나 내가 정말로 서강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왜 돈이 필요한지도.
강도현은 가까스로 납득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에는 찝찝함이 묻어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산까지?]”
“잠깐만 대출 받을 거야. 곧 돌려줄게.”
“[너도 돈 있잖아?]”
내게 돈이 있긴 하지만 군자금은 많을수록 좋다.
어차피 강도현도 나중에 비호문에 들어올 테니, 투자하는 셈 치면 되겠지.
나는 아직도 망설이는 강도현을 향해 말했다.
“나만 믿어, 형. 내가 몇 배로 돌려줄게.”
* * *
서강림이 떠나고 난 뒤, 양의성은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맺힌 햇빛이 날카롭게 양의성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서강림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그는 크게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역시 넘어오지 않는 건가.’
애초에 서강림이 승낙할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했다.
서강림은 충분히 강한 헌터였고, 돈벌이에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
‘서강림은 앞으로 점점 인지도가 올라갈 거야. 그건 곤란하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데다가 능력까지 있는 인물.
양의성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상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비서를 불렀다.
“김 비서. 잠깐 이리 와보게.”
“네. 무슨 일이십니까?”
“손을 좀 써야겠어.”
유리창에 양의성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거울에 맺힌 양의성의 상이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서강림이 내게 스스로 기어 오도록 만들어야지.”
* * *
회랑에 수많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대마경이 열리는 날, 대마경의 입구는 첫 번째 대마경이 열렸던 날처럼 여러 사람이 몰려와 있었다.
그때보다는 사람 수가 줄어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수였다.
“왜 이리 사람이 많느냐?”
내 뒤에 서 있던 유하랑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하랑으로서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와보는 게 처음일 터였다.
청소년인 유하랑이 이곳에 있자 헌터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려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두 번째 대마경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 데려왔다.
애초에 유하랑은 이미 웬만한 헌터보다 강하니까.
통찰안이나 강제 해제 외에도 제 몸을 지킬 수단은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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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 꼭두각시의 신
[등급] 용삼품(龍三品)
[설명] 인형을 만들어 조종하는 능력. 자동으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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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모르게 사이비 교주 같은 이능이었지만, 능력 자체는 좋은 편이었다.
이 정도 능력이면 제 몸은 지킬 거고, 나도 동행하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유하랑을 향해 말했다.
“말했듯이 혼자 다니지 마. 나랑 같이 다녀.”
“참나, 걱정도 팔자구나. 내가 애도 아니고.”
“너 애 맞…….”
-퍽!
그때,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며 내 어깨를 강하게 쳤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모르는 얼굴이 서 있었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고 도리어 상대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뭐야? 왜 멍청하게 서 있어?”
어깨를 친 상대는 적반하장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굳이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친 걸 보면 고의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너 뭐냐? 네가 먼저 형님한테 와서 부딪쳐놓고 어디서 시비야?”
옆에 있던 장태헌이 울컥하여 나섰다.
상대가 흠칫 놀라 도망치려는 것이 보였다.
장태헌이 그를 쫓으려 하자, 나는 빠르게 그를 말렸다.
“됐어, 장태헌. 그냥 무시해.”
“젠장, 이 새끼들……! 아까부터 형님한테 대놓고 시비 걸고 있잖아.”
사실 이렇게 어깨를 치고 지나간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놓고 와서 나를 도발하는 놈들도 있었다.
장태헌이 이를 갈며 분을 삭였다.
“이게 다 그 기사 때문이야.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인데……!”
내가 양의성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틀 뒤.
뉴스에는 또다시 나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좀 심하게 많다 싶을 정도로.
[헌터 서강림, 교육 시설에서의 부정행위 발각.]
[첫 번째 대마경, 속임수로 최초 공략 보상을 받아낸 서강림.]
[성의결의 실종, 서강림과 관계있나?]
모두 나를 중상모략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확한 사실이 아닌 추측과 편집, 선동과 날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대중들에게는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 사람이 쓰레기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장태헌이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투덜댔다.
“왜 갑자기 이런 기사가 나오는 거지?”
아마도 양의성 때문이겠지.
내가 계약을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이런 짓을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헌터와 만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도.
연예인으로 만들어 대중의 호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면, 여론을 조작해 추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윤겨울도 부루퉁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사부는 억울하지도 않아? 한 방 먹여야지!”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이동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대마경의 문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문이 열립니다!]
-우우웅!
알림창이 뜨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송환이 되었다.
대마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이내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대체 뭐야……?”
이제까지 본 마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마치 놀이공원의 입구 같았다.
오색의 가랜드가 걸려있고, 종이로 만들어진 꽃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채의 마경.
그때,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대마경, 십이지 레이스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