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전생에 서강림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보고자 여러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고 이능을 훔칠 정도로 자신은 강하지 못하다.
인간형 마수를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 역시 없다.
그렇다면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 시체는 어떨까?
‘전생에서는 실패했었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찾아내, 사주를 훔쳐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이능을 발동시키자 취소 문구가 나왔을 뿐이었다.
[육체가 훼손되어 백(魄)의 기운이 약해졌습니다.]
[부족한 백(魄)을 채울 마력이 없어 사주를 훔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혼백이라 합쳐 부르는 혼과 백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인간이 죽으면 혼은 육체를 떠나지만, 백은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 것.
‘사주 훔치기’는 백에 남은 정보를 훔쳐낸다.
때문에 시체가 훼손되거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백이 흐려지고 만다.
죽은 지 오래된 시체에는 백이 얼마 남아 있지 않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전생의 나는 마력이 부족해서 실패했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한철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각성의 날 즈음.
살아있었다면 유능한 만신이 되었을 거라며 아쉬워하던 기사들이 여럿 올라왔었다.
서강림은 그걸 보며 다른 생각을 했었지만.
‘몇 년이라면 모르겠지만 몇 달 전이라면 충분한 백이 남아 있을 거야.’
그가 망설임 없이 장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 삽도 질이 좋네.’
한로야가 만든 삽은 확실히 품질이 좋았다.
단단하게 굳은 땅이 삽을 박아 넣을 때마다 부드럽게 부스러졌다.
아직 사주창을 보지 못할 뿐이지 실력 자체는 있는 듯싶었다.
서강림이 묵묵히 땅을 파내려 가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 미친놈이 뭘 하는 거야! 아이고-! 이놈이 내 무덤 다 털어가네-!】
꼬장꼬장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에도 서강림은 계속 땅을 파내려 갔다.
‘한철인가? 역시 조상신이 되었나보군.’
한철 정도 되는 장인이라면 죽은 뒤 신이 될 거라 예상하긴 했었다.
서강림은 목소리를 무시하고 작업을 이어나갔다.
‘이승에서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걸 보면……. 내 업보 때문인가? 여기가 한철의 무덤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마경은 귀기가 강하기 때문에 신들의 목소리가 쉽게 전달되지만, 이승에서는 무불 통신이 약해진다.
전파가 약해지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단, 죽은 사람의 무덤이나 사당 같은 곳에서는 해당 신과 연락하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
‘경계에 가까워져서 죽은 사람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네.’
그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흙을 밖으로 퍼냈다.
와중에 한철은 고막을 터트릴 기세로 소리치는 중이었다.
【이 도둑놈! 훔칠 게 없어서 남의 무덤을 파헤쳐? 이놈아! 내 무덤에는 아무것도 없다! 천벌을 받으려고!】
천벌이라는 말에도 서강림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강한 신도 아니고, 만신도 없었다.
즉, 서강림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때, 삽이 턱 소리를 내며 뭔가에 막혔다.
‘드디어 관이 나왔군.’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오동나무 관이 보였다.
관이 나타나자 한철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강림은 깔끔하게 그를 무시한 채 관 뚜껑을 열었다.
“……후.”
관을 열자마자 역한 시취가 훅 풍겨왔다.
묻힌 지 얼마 안되었다고는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시체.
흉측한 모습에 눈을 돌릴 법도 한데 서강림은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이능 ‘사주 훔치기’가 발동됩니다!]
[훼손된 백(魄)만큼 마력이 소모됩니다.]
[이능 ‘대장장이의 불’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능을 획득하고 서강림은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시체를 앞에 두고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한철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너, 너 대체 뭐야? 대체 남의 무덤을 왜 파헤치는 건데!】
“볼일이 있어서. 정리는 깔끔하게 하고 가도록 하죠.”
다시 관 뚜껑을 덮은 뒤, 서강림은 땅을 메우기 시작했다.
이미 무덤이 파헤쳐진 탓인지 한철이 한결 조용해졌다.
구멍의 절반 정도가 메워질 무렵 한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썩을놈아! 내 무덤을 파헤쳤으니, 인간적으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다소 해탈한 듯한 목소리였다.
서강림이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물었다.
“말씀하세요.”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니, 내 손녀한테 가서 이야기 좀 해다오.】
한로야는 현재 사주창이 열리지 않아, 무불 통신도 닫힌 상태.
조상신인 한철의 목소리 역시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서강림이 봉분을 쌓으며 말했다.
“뭘 이야기하면 됩니까?”
【운명 보호국에 연락해서, 사주창 좀 열어달라고 해라. 신내림을 하려는데 애가 듣지를 못하니…….】
한철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그득히 담겨 있었다.
서강림이 듣고 있자 한철은 제 한풀이를 하듯 말을 이어 갔다.
【한창 나이에 돈도 제대로 못 벌고, 매일 같이 불 앞에서 고생만 하는 게 안타까워 죽겠는데 이제라도 빛을 봐야지.】
“알겠습니다. 해야 할 일만 끝내고 처리하도록 하죠.”
한철은 한로야를 보호국으로 데려가서 사주창을 각성시켜 달라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강림이 각성시켜주면 되니까.
어차피 한철의 이능을 훔치면서 한로야도 포섭할 생각이긴 했었다.
‘대장장이의 불’을 훔쳐, 서강림에게도 제련 기술이 생기긴 했다.
당분간은 다른 멤버들의 무기도 자신이 봐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
앞으로 얻을 공적치는 대장장이 이능이 아닌 다른 이능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비호문에는 제대로 된 대장장이가 필요하고, 이대로 한로야를 방치하면 보호국에서 그녀를 찾으러 올 테니까.’
중요한 장인을 보호국에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
볼일만 끝나면 바로 한로야를 포섭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덤을 원 상태로 되돌려 놓은 뒤 발을 옮겼다.
그런데 서강림이 향하는 방향은 산 아래가 아니었다.
【응? 너 왜 위로 올라가냐? 산은 안 내려가고 뭘 하려고?】
한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는 묵묵히 산을 올랐다.
높은 곳으로 올라서자 사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스산하다고 할 법한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곳곳에 수많은 무덤과 묘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철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설마 다른 무덤들을 파헤치려고……?】
방금 전, 한철의 시체에서 사주를 훔치는 데에 성공했다.
만약 다른 시체에서도 그만큼의 능력을 훔칠 수만 있다면 빠른 시간안에 성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교육 시설을 나오자마자 실험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이 산에는 무덤이 가득했다.
‘바로 죽은 시체가 제일 좋지만, 산 사람 죽일 수는 없으니.’
서강림은 망설임 없이 무덤을 파내기 시작했다.
한철이 한탄하는 소리가 거슬렸지만 이내 그도 포기한 듯한 눈치였다.
그가 근방에 있는 무덤을 하나 파헤쳐 관을 끌어냈다.
죽은 지 오래된 듯, 시체는 거의 뼈만 남은 상태였다.
[이능 ‘사주 훔치기’가 발동됩니다!]
[훼손된 백(魄)만큼 마력이 소모됩니다.]
[마력이 충분하지 못해 발동이 취소됩니다.]
‘역시 너무 오래된 시체는 무리인가.’
한철처럼 몇 달 정도면 모를까, 몇 년 단위로 가니 마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그럼에도 서강림은 아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마력만 충분하다면 오래된 시체에서도 훔칠 수 있어.’
서강림이 다른 묘비를 확인해 최근에 묻힌 시체를 찾아냈다.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한철이 이제는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남의 무덤을 파고 다니냐? 뭘 훔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취미냐?】
“취미라고 쳐두…….”
무덤을 파헤쳐내던 중, 서강림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불안한 침묵이 주위를 가득채웠다.
아니, 침묵이 아니었다.
어둠 사이에서 무언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수인가.’
각성의 날 이후, 마수는 마경이 아닌 이승에도 몸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무덤처럼 귀기가 강한 곳일수록 마수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강림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한 쌍의 안광이 점멸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크릉……!
그러나 곧 한 쌍이 두어 쌍으로 늘어나더니, 십여 개의, 수백 개의 눈동자가 서강림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이놈아! 얼른 도망가라! 마수다!】
살펴보니 마수들의 등급은 인급 정도.
하나하나로만 따지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이 모든 어둠이 마수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서강림은 마수들을 경계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수가 너무 많아.’
한철의 시체에서 사주를 훔치느라 상당량의 마력을 사용한 상태였다.
전어도가 있으니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서강림이 검을 들고 마수들을 경계하던 그 순간.
-촤악!
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격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마수들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덤 주변에는 귀기가 강해서, 마수들이 잘 나타나.”
죽어 나가는 마수들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에 탈을 쓰고 있는 남자.
운명 보호국의 차사인 걸로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이 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르릉……!
마수들은 이제 서강림이 아닌 차사를 목표로 삼았다.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며 차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바닥이 핏빛으로 물들 뿐이었다.
-서걱!
깔끔하고 잔인한 검격.
순식간에 수많은 마수의 시체가 쌓였다.
칼끝에 핏방울이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몸을 피로 적신 채, 차사가 서강림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파헤쳐진 무덤을 힐끗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추잡한 짓을 하는군.”
남자의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사실 그가 말하기 전부터, 서강림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길게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눈에 익었다.
서강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차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알아보는 것 같네.”
그는 서강림의 침묵을 오해한 것 같았다.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아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가 천천히 탈을 벗자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호문의 두 번째 간부, 강도현.
그가 날 선 시선으로 서강림을 노려보았다.
“오랜만이다, 서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