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0. 관계와 경계
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오래전에 보았던 얼굴이 보였다.
아마도 어머니 쪽의 친척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잡아끄는 손길도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친척의 손에 질질 이끌려 간 곳에는 또 다른 친척이 있었다.
그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떠넘기며 소리쳤다.
[저희는 이 애 더 이상 못 맡아요! 이 애가 집에 들어온 뒤부터 온갖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요!]
[그렇다고 우리에게 맡겨? 우리도 애들이 사고를 당해서 입원했다고!]
그래, 이 대화도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나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그러나 내가 들어간 집마다 온갖 사고가 일어나자, 그들은 나를 서로 떠넘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애를 버릴 수도 없고, 이걸 어쩌지?]
[쟤가 신내림을 거부해서 이 사단이 난 거 아닙니까?]
[그 무당이 스승님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랬다며?]
[그래, 그 사람한테 데려가서 내림굿을 해달라고 하자!]
깃발이 나부낀다.
나는 무당집 앞에 서서 흩날리는 깃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고요였다.
바깥에서는 온갖 환청이 들려오고 숨이 막혔는데 이 안으로 들어오니 몸이 한결 편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네가 강림이냐?]
위를 올려다보니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인상이 상당히 무뚝뚝했다.
그 여자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서화경이라고 한다.]
[…….]
[저자들이 너한테 내림굿을 해주라고 하던데…….]
그녀는 신당 안을 힐끗 보며 말했다.
친척들은 기가 죽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 사실 신내림 받기 싫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화경은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니야?]
[……받기 싫어요. 그렇지만 받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다치니까…….]
그녀는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서웠던 인상이 조금은 풀어졌다.
조금 곤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 표정이 왜 이따위야.]
그녀가 툴툴대더니 쭈그리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에게 내려오려는 신이 너무 강해서 내가 완전히 너를 지켜줄 수는 없어.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막아줄 수 있지.]
[…….]
[내 제자로 들어와라. 너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배울 때까지.]
서화경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흠칫 놀라 빼려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줌마도 다칠 거예요.]
[너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걱정하지마. 나도 나를 지켜주는 신이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손을 잡는 것까지 모자라, 나머지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서화경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네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다가올 거고, 너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
[그러니까, 서강림.]
그때, 그녀의 뒤로 펼쳐진 풍경이 조금씩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돌을 던져 수면이 흔들리듯이.
서화경이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제 눈을 떠. 돌아갈 시간이야.]
* * *
방 안의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둘러보니 마치 호텔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누워있는 침대의 주위로 여러 의료 장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병원인 것 같았다.
몽롱한 의식 사이로 한발 늦게 기억이 찾아왔다.
가까스로 모두 30단을 달성해서, 십이지를 개화했었다.
거해의 방에서 간신히 그림자를 쓰러트리고 쓰러졌었지.
그렇게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신수아는 어떻게 됐지?
내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몸 곳곳에 매달려 있던 장치들이 두두둑 뜯겨져 나갔다.
팔에 꽂힌 링거가 강제로 뽑히며 피가 흘러 넘쳤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곧바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윽……!”
온몸이 격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몸속의 뼈들이 모두 박살이 나서 내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
‘궁서의 포효’의 페널티인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지만 죽지는 않았다.
기어서라도 밖을 나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서강림 환자분! 움직이지 마세요!”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간호사였다.
그들이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워 침대에 눕히려 했다.
기껏해야 일반인일 텐데도 그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신수아, 신수아는…….”
“신수아 환자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도 무사하세요. 그러니 일단 침착하세요!”
그녀도 입원을 했나?
아니, 입원을 한 게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그토록 처참했으니 마경을 나왔다면 입원을 했겠지.
억지로 침대에 눕자 간호사들이 부리나케 실내를 정리하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면 곧 담당자를 모셔올게요. 한 달이나 잠들어 계셨는데,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한 달, 한 달인가.
꿈에 선생님이 나온 덕에 그나마 일찍 깬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신수아가 아직 입원을 하고 있다면, 그녀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영수 ‘리니’가 영계에서 소환됩니다!]
[영수 ‘요롱이’가 영계에서 소환됩니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두 마리가 나타났다.
묵직한 덩어리들이 내 배 위로 떨어졌다.
“쿨럭!”
이 정도에도 데미지가 오다니, 페널티가 강하긴 강한가 보다.
두 마리는 나를 보자마자 정신없이 달려들어 얼굴을 핥아댔다.
“웅웅!”
“캬아앙!”
리니의 두 눈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했다.
늘 까칠한 태도를 보이던 요롱이마저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걸 보니, 나를 많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나 이제 정신 차렸어. 괜찮…….”
두 마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던 중, 시야에 뭔가 기이한 것이 들어왔다.
병실 안에 못 보던 사람이 서 있었다.
간호사가 남아 있는 건가 싶었는데 복장이 달랐고, 한쪽 팔다리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저것이 산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바라보고 있자, 그것은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봐왔다.
귀신이라 할지, 마수라 해야 할지.
어쨌거나 모두 이승의 존재가 아닌 것들이었다.
누름굿을 받고 선생님과 지내며 더 이상 그런 것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잊고 말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보이게 된 거지?
[업보로 인해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내 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업보의 페널티인가.
수백 명의 사주를 훔칠 때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다.
교육 시설에서는 잠잠하더니, 이제야 활성화가 된 모양이었다.
업보를 쌓게 되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중 하나는 ‘경계’에 가까워진다는 것.
그 경계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라고도 했고, 인간과 귀신의 경계라고도 했다.
업보를 쌓고 경계에 가까워지게 되면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게 된다.
그러다 경계를 넘게 되면…….
“우웅?”
리니가 불쑥 제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대체 뭘 보냐는 듯이 날 보고 있길래 나는 리니를 쓰다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경계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지만, 한편으로는 희소식도 있었다.
내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운명 등급이 상승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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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서강림
[등급] 귀삼품(鬼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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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의 방을 공략하고, 장태헌을 영입한 뒤로 인이품까지 올랐던 운명 등급이었다.
그랬는데 한 번에 두 단계가 상승해서 귀삼품이 되다니.
확실히 내가 그곳에서 죽을 위기긴 했던 모양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신수아도 죽을 뻔 했었지.
그나저나 슬슬 나가서 신수아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데 간호사들은 올 기미가 없었다.
통증에도 익숙해졌고 팔다리도 움직인다.
잠깐 나가는 건 괜찮겠지.
영수들을 돌려보내고 병실을 나가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서강림 씨, 드디어 일어났군요.”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공주 팀장과 모르는 남자였다.
사주창을 확인해보니 이름이 ‘주성태’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저쪽도 차사 같았다.
공주 팀장이 태연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강림 씨.”
공주 팀장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일단은 환자인데, 회복을 축하한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마치 내가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는 팔짱을 낀 상태로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왜 이능을 훔치는 이능이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보호국 쪽에도 노출이 되었구나.
딱히 놀랄 일도, 안타까울 일도 아니었다.
이능 중 ‘사주 훔치기’는 언젠가 들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마경에서 들킬 가능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던 건 신수아와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무사히 나왔다면 이제는 밝혀져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공주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세요. 왜 이능을 숨겼는지.”
“이런 반응이 돌아올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 말에 공주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 대답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능을 훔칠 수 있다고 하면 모두에게 박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인데, 그 누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겠는가.
공주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다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능을 훔치기 위해, 고의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의가 아닌 경우는?”
“정당방위로 대처한 경우는 있습니다.”
이곳에 입소할 때, 우리는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계약서 항목에는 부상과 사망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마수나 교육생들간의 갈등으로 인해 부상,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
무차별 살인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 죄를 물지만, 정당 방위는 어느 정도 참작이 되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살인은 살인이지만.
주성태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나는 그들을 힐끗 보고 물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어떻게 됩니까? 처벌을 받게 됩니까?”
내 질문에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
관찰을 끝낸 공주가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서강림 씨.”
공주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전 구역의 교육생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를 완료했습니다.”
옆에 있는 주성태는 경악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참다못해 말했다.
“팀장님, 정말 이런 위험 분자를……!”
“입 다물어, 주성태.”
공주 팀장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자 주성태가 입을 다물었다.
공주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최우수 교육생인 서강림 씨에게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이라면?”
그가 악수를 청하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명보호국 제 2팀에서 서강림 씨에게 정규직 입사를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