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변명이다. 애초에 신수아는 네가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림자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무너져내릴 것처럼 아팠다.
방금 전의 어둠으로 돌아간다면 고통도 없이 그저 편안할 것을 알지만 나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수아는 너를 데려온 걸 후회했을 것이다.】
【너와 마주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네가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울렸다.
신수아가 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안다면, 분명히 나를 경멸할 터였다.
그러나 경멸받더라도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신수아를 살려서 내보내야 했다.
-툭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저 암흑이었으나, 벽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나가야 했다.
-콰직!
나는 검을 들어 벽을 향해 내리찍었다.
통증이 내 팔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어왔다.
벽은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이곳을 나가봐야 고통만이 존재할 텐데.】
조롱하는 목소리들이 사방을 꽉 채웠다.
어둠조차도 흐려질 정도의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기절하지 않도록 혀를 짓씹으며 계속 칼을 휘둘렀다.
-콱, 콰각!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몇백, 몇천 번을 휘두른 끝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작은 틈에 불과할 뿐이었다.
통증 때문에 양팔에는 이미 감각이 사라졌다.
억지로 검을 들어 올리려는데, 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콱, 콰악…….
무언가를 내리치는 듯한 소리.
나는 지금 칼질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건 누구의 소리란 말인가?
【……림 씨!】
칼질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벽 반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벽을 부수고 있어 조금씩 틈새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려요!】
한 조각이었지만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틈을 향해 칼질을 시작하였다.
양쪽에서 벽을 내리치자 쩍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서강림 씨, 정신 차려요!】
그 외침과 함께 온 어둠에 금이 가고, 빛이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신수아가 있었다.
“강림 씨!”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내 몸에 엉겨 붙어 있던 그림자가 투둑 끊어져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고통스러운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강림 왔다-!】
【야 너 괜찮냐? 살았어?】
【그림자 도둑한테 먹혀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너 신수아한테 고맙다고 해야해!】
【신수아가 계속 그림자에서 너 꺼내려고 했어!】
맞은편에서 벽을 부수던 사람은 역시 신수아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내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강림 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나오지 않아서 들어와 봤더니…… 서강림 씨가 그림자에 먹히고 있었어요. 독고준 씨가 그걸 막고 있었고요.”
그림자 도둑이 보여주는 환술에 먹힐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상의 트라우마나 소망을 자극해 아예 삼켜버린다고 들었는데, 듣던 것보다 역겨운 경험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중, 신수아의 왼쪽 팔에 시선이 닿았다.
그녀의 팔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신수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손이 왜……!”
“……시간이 경과해서 거해의 띠가 작동했어요.”
붕대로 감아둔 끝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내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저 안에 있었지?
그보다, 신수아는 왜 안 나갔지?
“왜 나가지 않았습니까? 호패 들고 바로 나가면 됐을 텐데……!”
“강림 씨가 그림자에게 먹히고 있는 걸 보고 그냥 가라고요?”
미친 인간 같으니.
나랑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제 팔을 희생시킨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독고준은요?”
“독고준 씨는…… 제한 시간 전에 나갔어요. 양쪽 손목이 잘리면 소설 못 쓴다면서.”
【그 새끼 진짜 또라이라니까.】
【와중에 너 먹혔다고 꺼내려 하더라?】
【그러다가 서강림이라면 자신이 다치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주인공이니 살아남을 거라고 하면서 도망감.】
【진짜 웃기는 놈임.】
그들은 독고준을 비웃고 있었지만, 차라리 독고준이 제정신인 인간이었다.
그 인간은 최소한 자기 몸뚱이 귀한 줄은 아니까.
왜 신수아는 그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는가?
세상 어떤 인간이 만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제 팔을 포기하는가?
나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수아 씨도 그때 나갔어야죠! 왜 멍청하게 여기 남은 겁니까!”
“자꾸 이미 끝난 일…… 로…….”
신수아가 반박을 채 끝내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나는 다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신수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작부터 탈진 상태였다.
애초에 한쪽 팔이 톱에 잘려 나갔는데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출혈이 심한 상태에서 계속 그림자를 내리치고 있었으니 체력 소모도 심했을 터였다.
【서강림 나쁜 새끼야! 지금 너 구하려고 남은 사람한테 왜 그러냐!】
【신수아, 팔 잘려 나갔는데도 그림자 공격하고 있었다고.】
【진짜 신수아도 보통은 아니야…… 산 채로 몸이 잘려 나가는데 그걸 어떻게 버팀?】
【칼질하다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칼질하다 기절하고.】
신들의 질책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한 놈, 왜 괜히 신수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나.
그 시간에 얼른 신수아를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눈앞이 어둑해졌다.
《돌아와라…….》
소리는 뒤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방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벽, 천장, 바닥 할 것 없이 모두 검게 뒤덮인 상태였다.
문까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니, 저거 안 죽었어?】
【와중에 문 다 막아 버렸네.】
【저거 쓰러트려야 나갈 수 있겠는데?】
신들의 말대로 이대로 도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거대한 검은 바위 같은 것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그 사이로 사람 크기의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아이야, 돌아와라…….》
그림자의 목소리는 내 것과 같았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를 해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오지 않겠다면…….》
그림자가 손을 뻗자 검은 손안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검은 타르 같은 것들이 일그러지고 엉기면서 형태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능 ‘마수 창조’가 발동됩니다!]
그림자에서 태어난 마수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었다.
젠장, 저런 이능도 훔친 건가.
설명창을 살펴보니 마력을 소모하여 새로운 마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나는 다급히 영계에서 요롱이와 리니를 소환했다.
“웅? 우웅?”
“캬앙?”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두 마리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칠지도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신수아 씨를 보호해.”
현재의 내 상태로는 마수들을 상대하며 신수아까지 지킬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무로 만들어진 칠지도는 방금 전, 화염에 너무 오래 노출된 바람에 손상이 간 상태였다.
문을 하나만이라도 연 뒤, 신수아를 내보낼 수만 있다면…….
【영수 두 마리 모두 신수아 호위에 붙이는 거야?】
【강림이 너는 어쩌고?】
【그래! 한 마리는 너랑 같이 싸워야지!】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일갈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느새 화원 안을 가득 채운 마수들이 눈을 번뜩이며 포효했다.
-크오오!
마수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어 이빨과 발톱을 들이밀었다.
사방에서 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촤아악!
내 그림자는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지만 사방에서 뻗어나온 검은 가시들이 내 보행을 방해했다.
내 앞을 가로막은 마수들을 베고, 찢고, 꿰뚫는 동안 나를 조롱하듯 이능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이능 ‘마수 창조’가 발동됩니다!]
[이능 ‘마수 창조’가 발동됩니다!]
[이능 ‘마수 창조’가 발동됩니다!]
제기랄, 대체 마력이 얼마나 남은 거지?
하나가 쓰러지면 둘이 일어나고, 둘을 베면 넷이 살아나고 있었다.
마수들의 공격에 내 몸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도 멍청하네! 서강림 공격해봐야 자기한테 데미지 들어오는데!】
【서강림, 버텨! 버티는 동안 영수들에게 처리해달라고 해!】
【그래. 조금만 더 있으면…… 어?】
그때 그림자가 제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마수의 이빨과 발톱에 찢겨나간 팔이었다.
그때 손끝에서 일그러짐이 포착되었다.
[이능 ‘재생’이 발동됩니다!]
‘재생’이 발동되자 순식간에 그림자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림자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상태였다.
욕을 내뱉을 틈도 없이 마수들이 덤벼들었다.
-서걱!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내가 죽인 마수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아직, 아직인가?
조금만 더 죽이면 될 것 같은데……!
“캬앙!”
내가 쉴 새 없이 마수들과 싸우고 있자 보다 못한 요롱이가 달려들었다.
요롱이가 마수를 향해 화염탄을 쏘기 전, 나는 곧바로 마수를 반으로 갈랐다.
“나서지 마!”
“컁?”
“넌 신수아 씨 옆에 있어! 절대로 나서지마!”
내 말에 요롱이는 움찔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단 한 마리의 마수도 놓칠 수 없었다.
지금 희미하게 들려오는 알림음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공적치를 10점 획득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마수가 있다면, 해치울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공적치가 쌓일 것이었다.
그것을 모아 능력치를 올린다.
현재로서는 그것에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나의 그림자는 더더욱 나에게 압박을 가해왔다.
《아이야, 왜 그리 발버둥 치느냐.》
《왜 그리 업보를 쌓으려 하느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왜 행하려 하느냐.》
뇌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저놈의 마력은 끝도 없는 모양인지 그림자 속에서 끊임없이 마수가 태어나고 있었다.
《아이야, 내 안에서 잠들라.》
수많은 마수의 그림자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칼을 휘두르느라 이미 내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이 전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
자살한다면 저 그림자도 사라질 텐데.
나는 왜 이런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수 중 한 마리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입안에 어둠이 있었다.
그저 평화로웠던 어둠.
이대로 죽는다면 편해질 수 있을 …….
“강림 씨, 죽으면 안 돼요!”
그러나 죽지 말라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고함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마수가 반토막이 난 순간, 내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근력’이 30단으로 성장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30단을 달성하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두 번째 특성 ‘십이지(十二支)’가 개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