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능 ‘독 내성’이 발동됩니다!]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라 예상은 했다.
내게는 ‘독 내성’도 있고, 리니의 ‘정화’도 있으니 웬만한 독은 먹히지 않지만.
-퍼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혜령이 내 앞에 놓인 탁상을 발로 밀쳐낸 뒤, 나를 제압하려 했다.
그렇지만 너무 느렸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뒤로 돌아가,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커헉……!”
“혜, 혜령 씨!”
“다들 움직이지 마세요.”
한 손으로는 주혜령의 양팔을 잡아 뒤로 꺾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주혜령이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은인을 독살이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너무 강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녀는 토악질을 하듯 외쳤다.
나는 묵묵히 그녀를 내려보다가 다른 사람들을 응시하였다.
이들을 상대할 수는 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놓아줄 수도 없지.
“오른손잡이라고 했죠?”
-뿌드득!
“아악!”
【캬 강림이 인성 보소!】
【오른손잡이 오른팔 부러뜨리는 인성!】
나는 주혜령의 오른팔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덤벼들려 하여, 나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내 시선에 그들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팔 하나로 끝날 걸 두 개로 늘리고 싶습니까?”
“……!”
“독살의 대가로 팔 하나면 싼값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마음 같아서는 다리를 하나 정도 자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르니.
나는 주혜령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주혜령 씨는 제가 잠깐 데려가겠습니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30분 뒤에 찾으러 오세요.”
“뭐, 이런 미친……!”
나는 그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다음 방은 회의실 같았다.
문들을 살펴 보았지만 이쪽에도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핏자국이 간간이 남아있어 그것을 흔적이라 여기고 따라가기로 했다.
“네가 남유준을 죽였지? 그런 거지?”
주혜령을 끌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맞는 말이라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방을 하나 더 건너간 뒤, 나는 주혜령을 의자에 앉히고 끈으로 포박하였다.
마침 근처에 잘린 천이 많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곧 올 겁니다.”
“뭐? 이대로 두고 간다고? 마수가 오면 어떡하라고!”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북소리는 불규칙적으로 들려오지만, 최소 한 두 시간 동안 다시 울리진 않을 터였다.
마수보다도 타 구역 인원이 들어와 주혜령을 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러나 그건 내 사정이 아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는 주혜령을 무시한 채, 핏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 * *
서강림은 전생에 신수아와 거해의 방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2구역의 열등생답게 가장 마지막으로 거해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서강림의 옆에 신수아가 있었다.
이미 마지막 마경으로 들어갈 자격이 충분한 신수아였지만, 그녀는 서강림을 기다려주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들은 마지막 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탈출한 뒤에 마지막 마경에 들어서자 그곳은 싸움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수아 씨, 왜 저를 두고 먼저 가지 않으셨죠?]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신수아 정도 되는 각성자가 왜 굳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지.
자신에게 ‘사주 훔치기’가 있다는 것이 발각된 이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피했다.
비단 그 이능이 아니었어도 약한 서강림을 파티원으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신수아가 서강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서강림 씨가 마음에 들어요.]
[……왜죠?]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자신의 장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도 신들도 자신을 외면하는데 어째서 신수아는 자신을 기다려주는가?
신수아는 묵묵히 마경 안을 수색하며 말했다.
[서강림 씨, 아직 한 번도 사주 훔치기 쓰지 않았죠?]
[네.]
[그게 마음에 들어요. 악해지기 쉬운데도, 악한 길을 택하지 않는 게.]
그 대답을 들어도 서강림의 답답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주 훔치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착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죽일 만큼의 능력이 없기 때문.
만약 인급 정도의 능력자만 되었어도 여러 사람을 죽이고 그 능력을 빼앗았을 터였다.
[저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요. 나중에 여기를 나가서도 서강림 씨랑 연락하고 싶어요.]
신수아가 오해를 하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서강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아와 동행을 하려는 것은 불온한 이유에서였다.
틈을 노려 신수아를 죽이고, 그녀의 사주를 훔치기 위해서.
애초에 서강림은 신수아의 친절을 믿지 않았다.
모두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능이 희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수아가 그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서, 선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생각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딱히 배신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한 사람들은 이미 숱하게 겪어봤다.
자신도 적당히 신수아를 이용하다가 배신을 할 계획이었다.
신수아가 정말로, 순수한 호의로 자신을 믿고 원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서강림은 마경을 헤쳐나가며 자조했다.
신수아의 옆에서 이익을 챙기고, 언젠가는 그녀를 죽일 목적으로 비호문에 들어갔었다.
그랬던 자신이 지금은 비호문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여기엔 뭐가 없군.’
방을 몇 개째 지나왔지만 흔적은 없었다.
서강림이 서쪽의 문을 열어보니 그곳은 다도실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목 부근에서 끼리릭하고 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해의 띠 1단계가 진행됩니다!]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나?’
거해의 띠는 마경에 들어온 지 만으로 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톱날이 닿는 느낌은 없었다.
조금 초조하긴 했지만 목이 잘릴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대체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핏자국이 있는 장소를 추적하여 신수아를 찾고 있었지만, 아직 2구역과는 마주치지 못했다.
도리어 만날 필요 없는 타 구역의 일원들과 만나 전투를 벌이느라 시간 낭비를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서강림을 보자마자 마수라도 되는 듯이 달려들었다.
‘호패를 찾았지만 쓸모 있는 건 없었고.’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마냥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요롱이가 가볍게 서강림의 손을 깨물었다.
“캬앙!”
아프지는 않았고 자신을 보라고 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졸린 기색이 눈에 가득했다.
서강림은 그제야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알았어. 영계에 가서 좀 쉬어.”
허락이 떨어지자 요롱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리니는 부럽다는 기색이었다.
“요롱이 자고 오면 그 다음엔 너 보내줄게.”
“웅웅!”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두 마리를 동시에 영계로 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하루 간 이동을 하는 사이 영수들은 번갈아 가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야 근데 영수는 쉬는데 서강림 너는 안 쉬냐?】
【제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듯.】
“환약 먹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서강림은 하루가 넘도록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생이환을 먹어둔 덕에 몸에는 활력이 넘치고 있었으며, 며칠 간은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다.
설령 생이환이 없었더라도 쉴 수는 없었다.
‘흔적이 없으니 추적이 어렵네.’
그는 다섯 개의 문 중,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북쪽의 문을 열었다.
어딘가 모르게 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여긴…… 마구간인가?’
막 새로 지어진 건물인 양,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동물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 익숙한 무언가가 있었다.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엥? 저거 뭐임?】
【목걸이 아님?】
【멍청아, 쪽팔린다. 어디 가서 신이라고 하지 마라.】
【그러면 저게 뭔데?】
【묵주잖아. 성당 안 가봤음?】
【미친놈아! 다른 신의 집에 어떻게 들어가냐?】
서강림은 바닥에서 묵주를 집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목걸이라고 착각할 법한 모양새였다.
검은 구슬들이 목걸이처럼 꿰여있고 끝에는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요한 신부가 들고 다니던 묵주인가.’
요한 신부가 종종 들고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묵주의 디자인이 특이한 것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물건일지도 모르지만 요한 신부일 확률이 높았다.
‘여길 지나간 건 확실한 듯싶은데…….’
처음으로 발견한 단서에 기쁨보다는 조급함이 먼저 일었다.
요한 신부가 묵주를 떨어트릴 정도면 사태가 긴박했다는 뜻이니.
게다가 다시 되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방 안을 둘러보자 칼자국과 총알, 화살 자국 등이 가득했다.
‘어느 쪽으로 대피를 했을까?’
바닥에 남은 발자국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선명한 발자국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음 방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2구역 사람들인가?’
서강림이 다급히 서고 안쪽으로 들어간 순간, 그의 기대는 깨지고 말았다.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그림자였다.
게다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 가각…….
책장 사이사이에서 나오는 그림자는 끝이 없었다.
한둘이 아닌 얼핏 봐도 기십이 넘는 수준.
그림자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였다.
【수가 너무 많은데?】
【수라간에서 마주친 것보다 두 배는 되잖아?】
【아니 강림이 운빨 망했네.】
그들의 말대로 이번에는 수가 더 많았다.
운이 나쁜 거야 늘 있는 일이니 상관없었다.
한탄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베어내야 한다.
-가가각!
정면에서 그림자 하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쪽 팔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그 그림자는 왼손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강림은 검을 뽑아 그것을 꿰뚫는 동시에, 뒤에서 기습을 가하려는 그림자에게 불꽃을 날렸다.
-퍼엉!
머리가 날아가며 검은 재가 터져 나왔다.
서강림이 그림자를 처치하며 소리쳤다.
“리니, 후방을 맡아줘!”
“웅!”
[이능 ‘물잡이’가 발동됩니다!]
대기 중의 수분이 모이더니 거대한 물방울이 생성되었다.
물방울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림자들을 집어삼켰다.
그림자들이 물속에 갇혀 버둥거렸지만 죽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적들의 수가 줄어들자 서강림은 한결 움직이기가 수월하였다.
‘좋아. 이대로라면 시간은 좀 걸려도 쓰러트릴 수…….’
-타앙!
서강림이 총성을 들은 순간.
그의 옆구리에서 스멀스멀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서강림이 뒤를 돌아보자 자그마한 그림자가 소총을 든 채 그를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