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엥? 쟨 누구임?】
【너 강림이 주시한 지 얼마 안 됐나 보다?】
【지난 방부터 봄.】
【쟤 주혜령이라고, 4구역 일원임. 서강림이랑 좀 싸웠어.】
살인자인 남유준이 속해있던 4구역의 리더.
그때 남유준이 나를 살인자로 몰아세웠고, 주혜령은 그 말을 믿었다.
아직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이곳으로 가야 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나는군요.”
나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마도 수라간, 그러니까 궁궐의 주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이 마경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방마다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교육생들에게 여러모로 인기였다.
지금도 보아하니 식사를 하러 이곳에 모인 모양이었다.
주혜령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또 마주칠지는 몰랐는데.”
“제가 달가운 것 같지 않으니 금방 가겠습니다. 하나만 여쭤보고.”
“뭔데?”
“저희 구역 사람들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들을 마주친 적이 있습니까?”
X표시가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여기로는 가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불확실한 감이 있었다.
주혜령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살인자일지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전 살인자가 아닙니다. 남유준이 살인자였죠.”
“그 말도 못 믿어. 그러면 유준이는 왜 사라진 건데?”
“살인자라서 도망갔을지도요.”
물론 그는 도망가지 않았지만.
그때 일을 목격한 신이 별로 없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나와 주혜령이 눈싸움을 하고 있자, 한 사람이 어색하게 우리를 말렸다.
“자, 자. 그만 해요. 이 사람이 살인자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잖아요.”
“…….”
“일단 우리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니, 이야기 좀 들어보자구요. 당신도 밥 못 먹었죠?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해요.”
식사를 할 마음은 없지만 나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요리를 하는 중인지 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주혜령도 맞은편에 앉아 삐뚜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목에 생겼네.”
그녀는 내 목에 걸린 거해의 띠를 보고 있었다.
주혜령은 오른쪽 손목에 띠가 걸린 채였다.
나는 옷깃을 세워 내 목을 가리며 말했다.
“왼손잡이십니까?”
“아니. 오른손.”
“오른손이 잘리면 큰일이겠군요.”
“목이 잘릴 당신보다 더 하겠어?”
내 대답에 주혜령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손가락이나 귀에 생기기도 하던데. 당신이나 나나 운이 없어.”
그녀의 말대로 거해의 띠는 사람마다 다른 부위에 장착되어 있었다.
주혜령처럼 손목에 걸린 사람도 있었고, 발목이나 종아리, 손가락, 귀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수로 따지자면 귀나 손가락에 생긴 사람이 많았고, 그 다음으로 손, 발 순이었다.
나처럼 목에 걸린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서, 2구역 사람들을 봤냐고 물었지?”
“예. 봤습니까?”
“아니. 못 봤어. 그렇지만 만약 마주치게 된다면 알려줄게. 대신…….”
주혜령이 거래를 하는 상인의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도 정보를 넘겨줘. 만약 우리 구역의 호패를 찾으면 위치를 알려주는 거야.”
지금 나는 신수아를 찾는 것이 1순위였지만, 이 마경의 임무는 호패 찾기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그냥 제가 주워와도 되는 거 아닙니까?”
“당신 아직 호패 찾은 적 없구나?”
주혜령은 살짝 으스대는 어조가 되었다.
그녀가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호패는 주인이 아니면 만질 수 없어.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러니까 호패를 찾으면 위치를 기록해두는 게 좋아.”
“참고하도록 하죠.”
일단 필요한 정보는 교환했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대충 방을 훑으며 다음 표식을 찾았다.
그러나 이 방에는 표식이 없었다.
이 장소에서 신수아와 다른 사람들이 증발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가장 큰 가능성은 그들이 표식을 남길 만한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이었다.
즉, 신수아를 포함한 전원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곳곳에 흩뿌려진 피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듯하였다.
전투 중에 다급히 대피를 하느라 이곳을 바로 떴을 것이다.
만약 사소한 전투였다면 대피를 한 뒤, 다시 돌아와 흔적을 새겼을 터였다.
그런데도 흔적이 없다는 건 아직도 위급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피투성이인 신수아가 찍혀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그때, 먼 곳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웅…… 두웅…….
북소리였다.
느릿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북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질렸다.
“젠장, 벌써?”
“밥 한 끼도 못 먹게 하는구만.”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혜령 역시 얼굴이 긴장으로 굳은 참이었다.
“당신도 일어나서 싸울 준비 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검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하자 잠시 후, 북소리가 잔향도 없이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방 곳곳에서 검은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왔다!】
【서강림 신고식 기대된다!】
【잘 버텨봐라, 강림아!】
-가가가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람 크기의 검은 덩어리였다.
언뜻 보면 인간의 형상과 유사했으나 그것에는 이목구비가 없었고, 대신 몸 곳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림자를 엉겨 만든 듯한 조각상에 더 가까운 듯싶었다.
이제까지 본 마수와는 다르게 이 마수들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가…… 가각……!
마수들은 망가진 인형처럼 움직이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덩어리들이 녹슬고 이가 나간 검을 휘두르자, 주혜령이 창을 휘둘러 마수를 베어냈다.
“다들 다른 방으로 도망가! 모이던 장소에서 다시 모인다!”
그들은 싸우는 대신 후퇴를 택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글거리며 몰려드는 마수들의 수가 상당했다.
20체 정도인가.
적의 수를 파악하던 중, 천장에 붙어 있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가가각!
“캬르릉!”
그때, 주먹만 한 불공 같은 것이 날아와 마수의 다리를 날려 버렸다.
불이 붙은 마수가 바닥에 떨어지자, 요롱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마수의 목을 물어뜯었다.
-가, 가가각…….
마수는 이내 재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요롱이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웃자, 핏자국처럼 검은 액체가 입 한가득 번져 있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마수?”
“용인가?”
“용치고는 다리가 짧은데…….”
“저 사람, 용까지 데리고 다니는 거야?”
요롱이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 기색이 되었다.
영수를 볼 일이 없을 테니 놀랄 법도 했다.
-가가가각!
반면 마수들은 제 편이 죽었는데도 동요 한 번 하지 않고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내 앞으로도 마수 하나가 달려들었다.
-서걱!
칠지도가 곧바로 마수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진흙 인형처럼 무너지는 그림자를 향해 다시 한번 칼을 꽂아 넣자 완전히 스러져버렸다.
지난 생에는 이놈들을 상대하느라 제법 고생했었는데, 이번에는 수월했다.
머릿수만 많지 각각의 개체가 강한 것은 아니다.
-촤아악!
마수가 휘두르는 검을 튕겨내며 나는 그들의 목을 베어나갔다.
살아 있는 생물을 베는 듯한 감각은 있었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내가 앞을 처리하는 동안 요롱이 역시 뛰어다니며 마수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삽시간에 마수들이 소탕되었다.
“끝난 것 같군요.”
굳이 도망갈 정도는 아니었다.
쓰러진 마수들은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주혜령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당신…… 이렇게 강했던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롱이는 사라져가는 마수들을 잡으려고 앞발을 내리치고 있었다.
리니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구석에 숨은 채였다.
그 외의 사람들은 다들 얼떨떨한 모양새였다.
주혜령이 사람들을 살피며 말했다.
“다친 사람 있어요?”
“아니, 다들 멀쩡해.”
“이렇게 빨리 퇴치한 건 처음이야.”
일단 볼일이 끝났으니 다음으로 가야 했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주혜령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저기,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아까까지만 해도 날이 서 있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조금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 뭐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은데…….”
“됐습니다. 어차피 제 몸 지키려던 참이었으니.”
“그렇겠지.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여기에 대한 정보라도 알려줄게.”
이 마경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혹 뭔가 달라진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 주혜령이 입을 열었다.
“이번 마경은 아마도 전 구역이 참가하는 것 같아. 네가 말한 사람들은 못 봤지만, 타 구역 사람들은 자주 마주쳤어.”
전 구역이 모였다면 꽤 많은 인원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는 건 다들 깊은 곳으로 갔거나 탈락, 혹은 통과했다는 뜻일 터였다.
“아까 봤던 것처럼 북소리가 울리면 마수가 나타나. 우리는 편의상 그림자라고 부르고 있어.”
그림자라.
제법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놨구나 싶었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그녀가 설명을 이어 갔다.
“북소리가 들리는 시간은 랜덤이야. 다행히 다른 방까지 쫓아오진 않아서 옆방으로 도망가면 무사할 수 있어.”
“그리고요?”
“음…… 그 정도.”
초행인 사람에게라면 꽤 유용한 정보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것보다 나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주혜령의 불안한 표정 뒤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식사라도 좀 하세요. 다행히 솥이 멀쩡해서…….”
4구역 일원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내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죽이 담긴 질그릇으로, 내용물은 나물과 쌀을 넣어 끓인 죽 같았다.
그때 리니가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그것을 먹으려 하기에 냉큼 그릇을 받았다.
“잘 먹도록 하죠.”
나는 죽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딱히 더 먹고 싶어지는 맛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요리가 가지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한 술을 더 뜨려다가 앞에 있는 주혜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긴장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당신은 안 먹습니까?”
“어, 어? 나? 나중에 먹으려고. 일단 은인부터 대접해야지.”
은인이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들고 있던 죽그릇을 내려놓은 뒤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은인에게 독이 든 음식을 제공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