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무기가 강철이로 변한 것은 한(恨) 때문이었다.
천 년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그 증오와 한이 이무기를 마수로 만들었다.
만약에 그 한을 정화할 수 있다면?
“너는 마수도, 실패작도 아니야. 너는 그저 용일 뿐이야.”
서강림은 아무 의심도, 속임수도 없이 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무기를 향해 뱀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강림의 말에 강철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몸을 뒤덮던 열기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마수 ‘강철이’의 기운이 약해집니다!]
[마수 ‘강철이’의 한이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강철이가 눈을 감자 몸이 조금씩 줄어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불꽃이 비를 만나 사그라드는 것처럼.
작은 산만했던 강철이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이제는 리니 정도 되는 크기가 되어 서강림의 품에 안겼다.
그것은 이제 작은 용일 뿐이었다.
“이걸로 강철이는 처리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강철이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처리의 일종 아닙니까?”
임무의 내용은 강철이를 살해하는 것이 아닌 처리.
강철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작은 용뿐.
공주가 어물거리는 사이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마수 ‘강철이’를 처리하였습니다!]
[가장 큰 공헌자로 추가 보상이 발생합니다!]
[추가 보상으로 영옥 ‘20,00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마경 내에서 강철이의 기운이 사라지자 시스템은 임무가 완료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앗, 나도 임무 완료되었다고 떴어!”
“누나도? 나도 처리했다고 나온다.”
강철이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안내창을 확인하였다.
모두 임무 완료로 뜬 기색이었다.
서강림이 그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강철이를 처리했다고 임무, 완료가…….”
서강림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안색이 좋지 않고 피부가 거의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2구역 인원들이 다급히 서강림을 향해 다가왔다.
“사부님, 괜찮아요?”
“강림 씨!”
누가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리니와 요한 신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치료를 하려던 그때.
서문용녀가 옆으로 다가와 서강림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독기와 화기 때문에 내상이 심하군요. 내버려 두면 죽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제 옆에 있는 차사 한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차사였다.
그 차사가 멍하게 서강림을 바라보고 있자, 서문용녀가 말했다.
“와서 치료 좀 해줘. 아이템 있지?”
“네. 있습니다.”
차사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서강림에게 다가갔다.
서강림이 힘없는 시선으로 차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 됐습니다.”
차사가 치료를 끝내고 일어섰다.
서문용녀는 강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서강림 씨, 고생 많았어요.”
방금 전까지 죽일 기세로 낙뢰를 퍼붓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좀 쉬겠어요? 치료 시설로 보내줄 수도 있는데.”
“……사양하겠습니다.”
서문용녀의 친절을 거절하며, 서강림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품 안에는 작은 용을 든 채였다.
그가 공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용은 제가 데려가도 됩니까? 혹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제가 보호하고 싶습니다.”
“……좋을 대로.”
공주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서강림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대박이다 진짜. 영수가 두 마리라고?】
【보호는 핑계고 그냥 영수 키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노렸네, 노렸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무기를 택한 것 중 하나는 우호의 증표로 길들여 데려가려 했기 때문.
【그치만 저 정도면 인정해줘야 하는 거 아님?】
【맞아. 아무리 영수로 데려가고 싶어도 목숨 걸 인간이 몇이나 있겠어?】
【솔직히 걍 죽이는 게 더 편했을 텐데.】
【그래 봐야 어쨌든 영수 갖고 싶어서 난리 발광한 거 아님?】
신들이 뭐라 하든 간에 서강림은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된 와중 여러 사람이 바빠 보였다.
차사들은 심각한 부상자들을 돌보거나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고, 남은 교육생들은 당혹스러워보였다.
“다른 뱀 죽여야 우리도 통과할 텐데…….”
“아씨, 근데 뭔가 좀 상황이 애매하네.”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훑던 서강림이 3구역 인원들이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곤혹스러워하는 3구역 인원들 가운데 멍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장태헌이 서강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네가 덤빌 차례인가?”
서강림이 장태헌을 향해 물었다.
장태헌 역시 임무를 완료하지 못했지만, 아직 시간은 남은 상태였다.
만약 그 사이 용을 죽인다면 장태헌은 이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태헌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건 뱀이 아니라 용이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거지? 다른 뱀을 찾아 죽일 거야?”
“아니. 어차피 널 못 이기면 다른 뱀을 찾을 생각도 없었고.”
그는 탈락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그다지 개의치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장태헌이 쭉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으아- 이제 끝이네. 나도 탈락인가.”
“탈락하기 전에 내 명령부터 들어야지.”
“아, 그거.”
장태헌이 귀찮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래. 뭘 명령할 건데?”
“잠깐 자리를 옮기자.”
“대체 뭘 시키려고…….”
장태헌은 미심쩍은 눈으로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서강림이 장태헌을 데리고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둘만이 남게 되자 서강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명령은…….”
“명령은?”
“소속을 2구역으로 옮기도록 해.”
그 말에 장태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역을 옮기라고?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해?”
“그래. 가능해.”
“옮겨봐야 무슨 소용인데? 어차피 난 탈락이잖아.”
“구역을 옮길 경우, 모든 것이 리셋되어서 처음부터 도전하는 게 가능해져.”
뱀이 죽어서 탈락한 사람들이 항의를 할 때, 안나비는 그렇게 말했었다.
[2구역의 임무는 뱀의 보호고, 여러분은 2구역의 임무에 실패하셨습니다. 새로운 뱀을 찾아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2구역의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해당 임무 기간이 끝난 뒤 자동 퇴소가 되니 그 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2구역의 임무는 실패했고, 2구역의 임무를 재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안나비는 ‘2구역의 임무’라는 말을 강조했다.
또한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굳이 바로 내쫓지 않고, 유예기간이 있다고도 알려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힌트였다.
운명 보호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임무를 실패해도 재도전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건 바로 구역을 변경하는 것.
각 구역에는 담당자가 있고 승인에 따라 구역을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담당자들이 종종 타 구역 인원을 스카우트하여 데려오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탈락 위기에 처한 인재를 그런 식으로 빼오곤 했다.
또한 담당자가 제안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구역을 바꿀 수도 있었다.
만약 다른 구역의 문을 찾아 열려고 시도할 경우 해당 구역의 담당자에게 연락이 간다.
담당자가 승인을 할 경우에는 문이 열리고 구역이 변경된다.
말이야 그렇지만 대부분 승인을 하기에 타 구역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의 100% 구역 변경이 가능했다.
스스로 타 구역의 문을 찾아내고 적진에 들어설 배포를 갖고 있는 인재라면 내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그게 아니더라도 자기 구역의 인원이 늘어나면 여러모로 이익이니, 개차반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통과일 터였다.
혹시 몰라 안나비의 사무실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서강림 씨가 추측한 대로입니다. 조건에 맞으면 타 구역 인원이 2구역으로 올 수도 있죠. 눈여겨 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직은 어떨지 모르지만요.]
차사 쪽의 허락도 받았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서강림이 장태헌을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탈락보다는 낫겠지.”
단점이 있다면 마경을 처음부터 다시 공략해야 한다는 것.
모르는 사람, 혹은 적대하던 사람들의 집단으로 들어가 처음부터 공략한다는 건 여러모로 리스크가 크다.
“그래서, 어때?”
서강림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놀란 눈이 되어있을 뿐.
‘내키지 않는 건가.’
아까까지 적대하던 구역이니 떨떠름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강림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타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해. 이 경우는 타 팀의 담당자에게 연락해야겠…….”
“2구역으로 갈게.”
서강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태헌이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커다란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모양새였다.
“2구역이 마음에 들어. 그쪽이랑 앞으로 더 싸워보고 싶기도 하고. 이번엔 졌지만 다음엔 사정이 다를걸?”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장태헌이 2구역으로 온다면 서강림으로서는 환영이었다.
가볍게 악수를 하자, 장태헌이 힘을 꽉 주며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할게.”
다소 거친 악수를 나누고 있자, 서강림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것은 운명의 방향을 알리는 소리였다.
[‘장태헌’과 ‘서강림’의 운명이 얽히기 시작합니다!]
[비틀리던 운명이 서강림의 뜻대로 자리를 찾습니다.]
[서강림의 운명 등급이 ‘인이품’으로 상승합니다!]
* * *
차사들이 교육생들을 치료하고 마경을 정리하는 동안, 서문용녀는 자신의 사무실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회사 복도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였어. 과연 상급 난이도로 최초 공략을 할 법하네.’
발설의 방에서 공주 팀장과 한 내기에서 패배한 뒤.
그녀는 2구역의 인원, 그중에서도 서강림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다.
직접 보고 싶던 참에 강철이가 나타나 준 것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강철이를 죽여서 서강림이 임무를 실패하게 만든 다음 스카우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고작 교육생이 자신의 번개를 막아 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강철이를 제압할 줄이야.
‘그리고 서강림 외에도 눈여겨볼 사람이 많았어.’
이번 강철이 공략에 합세했던 여러 인원들.
각자의 기량도 뛰어났으나 그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단합력이었다.
‘마수의 공략법을 짜는 것보다 실행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아무리 훌륭한 전법을 짠다 하더라도 장기 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용지물.
특히 위험한 임무일 경우 장기 말들은 몸을 사리기 쉬웠다.
‘지휘를 한 사람은 서강림인가? 왜 다들 서강림의 지시를 따랐을까?’
단기간에 사람들이 누군가를 따르는 경우, 그 사람에게는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보통은 성품, 혹은 강함이었다.
‘실력은 있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성품이라는 건데…….’
사무실에 도착한 서문용녀는 답답한 재킷과 장갑을 벗어 소파에 대충 던져두었다.
책상 앞에 앉은 뒤에도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녀를 따라 들어온 차사가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서문용녀는 힐끗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가만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서강림이 갖고 싶어. 어떻게 해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