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여러분이 뭐라 하든 동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독고준은 아쉬운 눈치였고, 신수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서강림을 향해 물었다.
“그러면 혼자 다니실 건가요?”
“네.”
“혼자서 1구역 사람들을 상대하긴 힘들 거에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신수아는 다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서강림을 바라보았다.
혼자서 또 전부 감당할 생각인 걸까.
마음 같아서는 계속 설득하고 싶었지만 서강림이 내켜하지 않는듯하여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세요.”
신수아가 물러서자, 서강림은 독고준을 힐끗 보았다.
신수아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지만 독고준이라면 같이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릴 법했다.
그러나 다행히 독고준은 순순히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나는 그러면 신수아 씨네랑 지내야겠다.”
그 말에 신수아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제 의사는요?”
“나 혼자 지내다가 마수나 1구역한테 습격당해 죽어버릴지도 몰라. 데려가줘, 신수아 씨.”
천연덕스러운 말에 신수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독고준의 실력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독고준 씨는 제가 데려갈게요.”
“아, 그리고.”
서강림은 요한 신부를 힐끗 보며 말했다.
“요한 신부님도 신수아 씨의 캠프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저만요?”
“예. 그편이 더 안전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서강림 형제님 혼자 두고 갈 수는…….”
망설이는 요한 신부를 향해 서강림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여기 마수들이 강하지 않아서, 회복 이능이 없어도 될 듯싶습니다.”
“아, 그래도…….”
“도리어 신부님이 계시면 제가 집중해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뒤에야 요한 신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수아는 요한 신부를 챙긴 뒤, 서강림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내일 다시 봐요, 서강림 씨.”
“내일 봐, 서강림.”
세 사람은 내일을 기약하며 야영지를 떠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나마 신들이 서강림의 곁에 남아 있었다.
【어라, 요한 신부 그냥 보내는 거야?】
【그러면 이제 강림이 독고기 먹방 안 해?】
【재밌었는데 더 해보지.】
【아니면 이제 안 먹으려고?】
“시선을 너무 끌었으니,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2구역 사람들이 이곳을 눈치챌 정도면, 1구역 인원들에게도 소식이 들어갔을 확률이 컸다.
혼자서 싸우는 건 괜찮지만 요한 신부를 두고 자리를 비웠다가 엄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독 내성’은 현재 충일품까지 오른 상태.
이 정도라면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서강림은 주변을 정리한 뒤 숲 안쪽으로 향했다.
과수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과실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과수원 초입에 다다르자 그 향기는 더욱 강해졌다.
오늘도 피와 살을 머금고 자라난 과일들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이번엔 과수원 서리하려고?】
【하급 난이도로 클리어할 생각인가.】
【아, 우리 강림이를 뭘로 보고 그러시나.】
서강림 역시 하급 난이도로 공략할 마음은 없었다.
공주로부터 온 제안도 있었으니.
그가 한 제안은 ‘상급 난이도로 최초 공략에 성공할 경우, 추가 보상을 주겠다’는 것.
그 메시지와 함께 선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꽤 유용한 아이템이었지. 추가 보상도 괜찮았고.’
애초에 고난이도로 공략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서강림은 무난히 수락을 한 상태였다.
서강림이 칼을 빼들고 과수원 안으로 진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근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오오오 원숭이 온다.】
【쟤네 오늘은 좀 더 빡친 것 같은데.】
원숭이들은 침입자를 발견하고 잔뜩 분개해서 달려왔다.
쇠집게를 든 마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서강림에게 달려들었다.
-우끼이익!
서강림은 동요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자, 원숭이의 머리가 열매처럼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이렇게 쉽게 해치우다니. 새삼 신기하네.’
전생에는 이 파수꾼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던가.
그가 마수의 입에서 영옥을 수거하는 사이, 품속에서 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딱딱!
근처에서 먹이 냄새가 나자 식욕이 동한 모양이었다.
서강림이 백향과를 몇 개 따서 알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알은 걸신들린 듯이 먹이를 먹어 치웠다.
【오구오구 잘 먹는다.】
【그래서 내기 성립한 거지? 너네 뭐에 걸래?】
【나는 황룡에 한 표.】
【나는 주작.】
【오오오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어느 정도 알에게 먹이를 먹인 뒤, 서강림은 과수원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수원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마치 섬의 대부분이 과수원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과일의 향기가 더욱 짙어지는 동시에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륵…….
서강림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람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쇠집게를 든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오, 성성이 나왔다~!】
【쟤는 아까보다 훨씬 세 보이네.】
【강림아 혓바닥 간수 잘해라!】
마수의 이름은 성성.
초입에 있던 원숭이와 유사한 형태지만 크기는 훨씬 컸다.
원숭이와 고릴라 정도의 차이일까.
등급은 인이품(人二品).
사주창을 살펴보니 체력과 민첩이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서강림에게는 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근력’이 25단으로 성장합니다!]
[‘체력’이 18단으로 성장합니다!]
[‘민첩’이 25단으로 성장합니다!]
[‘감각’이 26단으로 성장합니다!]
[‘마력’이 18단으로 성장합니다!]
그동안 쌓아놨던 공적치를 투자하여 능력을 상승시켰다.
성성이 쇠집게를 질질 끌며 과수원을 배회하던 중, 서강림의 영역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서강림이 마치 맹수 같은 모양새로 성성의 뒤를 노렸다.
-우꺄아악!
순식간에 목 뒷덜미에 칼이 박혀 피가 흘러넘치기 시작하였다.
보통이라면 즉사했을 테지만 성성이 순식간에 몸을 틀어 가까스로 급소는 피했다.
피를 막으려는 듯 제 목덜미를 붙든 채, 서강림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그곳에 서강림은 없었다.
-푸욱!
어느 순간 옆으로 다가온 서강림이 성성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급소를 찔린 성성은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헐 성성이 한 방에 죽었네?】
【야 서강림 많이 세졌다?】
【이 정도라면 과수원 금방 공략하겠는데?】
신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서강림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시체에서 영옥을 수거하며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왜 한 마리밖에 없지?’
보통 파수꾼들은 최소 셋 이상 짝을 이루어 과수원을 순찰하고 있었다.
파수꾼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극히 드문 일.
‘놈들이 있는 건가. 서둘러야겠군.’
서강림은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과수원 안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다른 종류의 과실수가 자라나 있었다.
백향과가 녹색을 띠고 있다면 이 열매는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열매를 따는 순간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아이템 ‘천향과’를 획득하였습니다.]
[‘발설의 방(난이도 중)’ 공략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오오오 서강림 중급 달성했네!】
【독고준이랑 신수아도 중급 못 찾지 않았어?】
【서강림한테 신내림하고 싶다 진짜…….】
【그런데 저건 천향과야? 향기가 더 좋은가?】
천향과라는 이름답게 백향과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이도 중급으로 완료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지만 서강림은 기쁜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딴 것도 아니었으니.
그가 천향과를 한 입 깨물어 먹었다.
[‘천향과’를 섭취하였습니다.]
[마력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독 내성이 소량 상승합니다.]
【서강림 저거는 그냥 보이면 다 먹네.】
【아니 왜 공략 아이템을 지가 먹고 있냐고.】
【그래도 저거 먹으니 마력이랑 독 내성 올라가는데?】
【맞아. 그래서 운명 보호국도 여길 선택한 것 같음.】
신들의 말대로, 이곳의 과일을 섭취하며 전투를 반복하다보면 느리게나마 이곳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강림이 몇 개의 천향과를 따서 먹던 중, 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왔나.’
서강림은 동요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파수꾼이 아닌 인간.
모르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강림을 둘러싸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당신이 2구역의 서강림? 맞지?”
서강림은 대답하는 대신 그들을 힐끗 보았다.
지난번 자신의 텐트를 습격했던 사람도 그곳에 있었다.
그때는 정신없이 도망가더니 이제는 기세등등하게 서강림을 보고 있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고.”
서강림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 명이 성성의 사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아까 파수꾼이 혼자 있는 것이 신경 쓰였는데, 나머지 파수꾼을 이들이 처치한 모양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어? 힘쓰고 싶지는 않으니 순순히 따라와 주면 좋겠는데.”
【마! 강림이가 가오가 있지! 그렇게 순순히 따라갈 것 같냐!】
“알겠습니다.”
【뭐?】
서강림은 그들의 제안을 순순히 승낙했다.
신들만큼이나 그들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상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따라와.”
그들은 서강림을 포위한 채 과수원을 벗어났다.
타 구역 사람들이 머무르는 야영지는 숲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 꽤 오래 머물렀던 모양인지 야영지에서 생활감이 느껴졌다.
‘사람 수는…… 우리 구역의 2배 정도인가.’
서강림이 야영지 안으로 들어오자 몇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경계의 시선은 없었다.
자신들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나오는 여유였다.
성성이를 쉽게 잡은 걸 보면 실제로도 실력이 좋은 편 같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
서강림을 데려온 사람이 가림막을 툭 치며 말했다.
꽤 넓어 보이는 텐트였다.
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담배 연기가 느껴졌다.
안에 있던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 서강림을 돌아보았다.
“아, 왔네.”
상대는 반쯤 타다 만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그것을 발로 짓이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뚝뚝하고 위압적인 외모를 한 남자였다.
“서강림이지?”
“그쪽은?”
“1구역 소속 홍대훈. 만나서 반갑다.”
반갑다는 이야기를 건네도 서강림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였다.
그가 홍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용건은?”
홍대훈은 서강림의 반응에 살짝 기분이 상한 듯싶었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말이 짧네? 지금 상황 파악 못 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