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 소리에 서강림이 날렵하게 몸을 숨겼다.
윤봄 역시 눈치 빠르게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위를 올려다보자 땅거미를 짊어진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드디어 왔나.’
3m는 되는 듯한 거구, 온몸이 털로 뒤덮인 마수는 일견 사람과 유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만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귀삼품(鬼三品) 마수.
설인(雪人)이었다.
그때 설인 쪽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소리는 설인의 입이 아닌 손 쪽에서 나고 있었다.
설인이 손에 무언가를 꾹 쥐고 있었다.
윤겨울이 피범벅이 된 채, 설인에게 붙잡혀 있었다.
“……!”
윤봄도 그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비명을 참았으나 두 눈동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악이 담겨 있었다.
이대로 두면 윤겨울은 곧 설인의 식사가 되어, 머리 정도만이 남아 윤봄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서강림은 설인에게 달려드는 대신 상황을 보고 있었다.
‘우선 설인이 윤겨울을 내려놓도록 만들어야 해.’
설인은 제 먹잇감을 꽉 쥔 채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전투에 돌입하면 윤겨울이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
더군다나 윤겨울은 지금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서강림은 상황을 살피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선 설인이 윤겨울을 내려놓도록 만들어야 해. 내가 설인을 유도한 뒤에 네가 해줄 일이 있어.”
“네. 할게요.”
“위험한 일이야.”
“그래도 할게요.”
윤봄이 간절한 시선으로 말했다.
평소의 맹하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표정만 봐서는 이미 숙련된 헌터처럼 보였다.
“그래. 알겠어. 그러면 너는…….”
서강림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윤봄의 귓가에 자신의 계획을 작게 속삭였다.
지시를 확인한 윤봄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몸을 한껏 낮춘 채, 엉금엉금 기어 반대편 절벽 아래로 이동하여 몸을 숨겼다.
‘우선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설인을 유인한다.’
윤봄이 이동한 것을 확인한 뒤, 서강림은 저물대에서 소지품을 꺼냈다.
피비린내가 저물대에서 조금씩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동안 사냥하면서 해체해 보관해두었던 짐승의 고기들.
저물대 안에 넣어 두었던 터라 아직도 싱싱한 피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설인에게는 좋은 간식이 되겠지.’
그는 절벽 아래에 고깃덩어리를 쏟아 놓고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은 설인이 고개를 들었다.
-킁, 킁…….
설인의 입장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일 터였다.
잠시 킁킁거리던 설인은 윤겨울을 제 보금자리에 내려놓은 뒤,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곧 설인이 수북하게 쌓인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설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됐다.’
설인이 뼈째로 고기 씹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강림은 발소리를 죽인 채 안쪽으로 이동했다.
설인의 보금자리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지옥도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다.
마른 짚과 나뭇가지, 수많은 동물의 뼈와 가죽, 먹다 남아 썩어들어가는 시체들.
그 사이에 윤겨울이 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서강림은 윤겨울이 의식이 있는지 확인해보았으나 전혀 대답이 없었다.
‘팔과 다리가 부러졌나.’
윤겨울의 왼팔과 왼다리가 부러져 퉁퉁 부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쉽게 데리고 나갈 수가 없다.
환약을 먹이면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겠지만 의식이 없으니 먹일 방도가 없었다.
‘우선은 계획대로 한다.’
서강림은 윤겨울을 업은 뒤, 하늘을 향해 ‘광염일장’을 쏘아 올렸다.
내리는 눈 사이로 고요한 불꽃 하나가 날아올랐다.
‘여기서 설원으로 나가려면, 위로 올라가거나 절벽 사이의 외길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어.’
현재 서강림의 이능 중 도약이나 비행과 관련된 것은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외길 한 가지.
그러나 그 외길을 지나가려면 식사가 한창 중인 설인의 옆을 지나쳐야 했다.
설인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설인을 바깥으로 내쫓을 필요가 있었다.
-타앙!
설원의 상공으로 마른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설인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윤봄이 설인과 거리를 벌린 뒤, 허공으로 위협사격을 한 것이었다.
위협사격을 마치고 윤봄은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좀 더 벌린 뒤 두 번째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타앙!
그 소리에 설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서강림은 굳은 얼굴로 총성을 듣고 있었다.
‘윤봄은 잘 숨었을까.’
윤봄의 위치까지는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되니 불안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일단 설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윤겨울을 데리고 얼른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황급히 윤겨울을 업고 왔던 길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머리 위가 어둑해졌다.
서강림이 위를 올려다보고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 팔자에는 운이 없다니까.’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설인의 것.
이 둥지에 사는 또 다른 설인이 돌아와 서강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르릉……!
제 영역에 침입한 적을 발견하자 설인의 눈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살기로 번들거렸다.
설인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 서강림은 뒷걸음질을 쳤다.
‘두 번째 계획으로 간다. 우선 윤겨울이 휘말리지 않게 해야 해.’
서강림은 주위를 빠르게 훑어 지형을 파악한 뒤, ‘광염일장’을 발동시켰다.
-크아아악!
불꽃이 설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설인이 당황하는 사이, 서강림은 윤겨울을 바위 뒤에 눕혔다.
‘일단 이쪽은 됐어.’
이제 남은 것은 설인을 쓰러트리는 것뿐.
그가 검을 뽑아 든 순간, 설인이 서강림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쿠웅!
마치 지진이 찾아온 것처럼 발아래가 떨려왔다.
직접 마주하니 설인의 덩치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백영이라는 신급 존재를 마주한 서강림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설인의 사각을 노린다.’
뒤로 돌아가 설인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 그의 목표.
서강림은 빠르게 설인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크르르릉!
설인이 분노에 찬 울음을 토해내며 몸을 틀었다.
평소의 서강림이라면 쉽게 피할 공격이었다.
그러나 수의 기운에 침식된 탓에, 다리가 굳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서강림을 향해 거대한 손이 날아들었다.
-콰앙!
가까스로 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냈지만 충격을 모두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검을 쥔 손이 충격으로 저릿저릿했다.
‘운이 나빠.’
눈발은 점점 굵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눈과 함께 어둠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찾아오자 감각은 떨어졌고 수극화(水剋火)의 논리로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눈을 그치게 할 수는 없지만, 우선 어두운 것부터 처리를 해야 해.’
[이능 ‘광염일장’이 발동됩니다!]
등급이 오르긴 했지만 아직 충분히 밝은 빛은 아니었다.
설인 역시 잠시 움찔하기만 할 뿐, 겁을 내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서강림은 손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힘껏 내던졌다.
-크르릉!
설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애초에 서강림이 노린 것은 설인이 아니었다.
설인의 뒤편, 설인의 보금자리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불쏘시개가 될 만한 것들은 충분해.’
보금자리에는 나뭇가지와 마른 풀, 동물의 털가죽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조금씩 불씨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주변이 조금 밝아졌다.
추위로 얼어가던 몸에도 온기가 와닿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오래 가진 못하겠어.’
눈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눈으로 가득한 터라, 불을 지른다 하여도 곧 꺼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서강림에게 주어진 것은 얼마 안 되는 시간뿐이었다.
-크아아아!
자신의 보금자리가 불타오르자 설인이 분노하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서강림은 불을 등진 채, 설인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공적치를 소모해 능력치를 올렸다.
[민첩이 18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쿵, 쿵!
설인이 거칠게 발을 구르며 서강림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곡예를 선보이듯 아슬아슬하게 설인의 공격을 피해가며 검을 휘둘렀다.
설인의 몸에 상처가 생겼지만 찰과상 수준이었다.
‘이쪽 마수들은 방어력이 너무 높아.’
‘발검’보다 운명 등급이 낮아 실력 발휘를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 애초에 설인을 상대하려면 근력이 30단쯤은 되어야 했다.
‘아직인가?’
설인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서강림의 옆에 박혔다.
지면에 자국이 그대로 남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서강림은 때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벌고자 설인의 공격을 피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으나,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불길 역시 조금씩 사그라들던 그때.
-크오오오!
총성으로 유인되었던 설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총성이 들리는 곳으로 쫓아가도 먹잇감이 없으니 다시 돌아온 것이다.
두 마리의 마수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서강림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설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군.’
두 번째 설인이 등장하자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하였다.
설인들은 분노하여 발을 구르며 서강림을 쫓았다.
서강림이 불길과 마수들의 사이로 전광석화처럼 내달리던 그때.
-으직, 으지직…….
무언가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설인의 발구름이 심해짐과 동시에 서서히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됐어. 곧 무너진다……!’
이 지역의 땅은 언뜻 보면 단단하지만 눈과 얼음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설인의 보금자리도 그런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강림이 불을 피워 지반이 물러졌고, 거기에 두 마리의 설인이 몰려와 날뛰기 시작하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서강림은 균열이 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가장자리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설인들이 서강림을 쫓으려 발을 내디딘 순간, 바닥이 훅 꺼졌다.
-크오오오!
한쪽 발이 빠지자 금이 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설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며 잡을 것은 찾았지만 잡히는 것은 눈뿐.
설인 한 마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인의 머리가 으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서강림은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았다.
[귀삼품 설인을 처치하였습니다!]
[고정된 운명이 변화하였습니다!]
[운명 변화가 발생합니다!]